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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통령께서 이미 1979년10월26일 김재규의 흉탄에 비명에 가신지가 어언 54년이 지나가는 지금 그동안 국내 좌파 학자는 물론 종북세력, 좌편향 정치인들이 있지도 않는 것을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오도하고 왜곡 굴절시켜 퍼나르면 말이 말을 만들어 박정희 지우기 위해 교과서까지 일편적으로 군사독재 정권으로 매도하여 박정희라고 하면 포악한 군사독재 부패한 사람으로 잘못 전파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과 철저한 반공주의 그리고 철저한 자기 관리, 그래서 전세계 모든 지도자 중에 가장 청렴한 지도였음을 알수 있도록 박정희 대통령에 재임 중 일화를 당시의 수행했던 경호원 그리고 박정희 정부에 일하신 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적시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근거와 실존 인물들의 말을그대로 전하는 팩트이기에 오해 없이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영화 “건국전쟁”으로 열광하고 있다. 종북좌파 특히 정치 지도자로 칭송받는 대통령병에 걸렸던 졸렬한 일부 정치모리배 꾼들에 의해 잘못 왜곡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누명같이 쒸워진 독재자라는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큐 박정희도 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을 5천년의 가난에서 해방시킨 영웅 박정희는 독재자로 낙인찍어 버리고 반듯한 기념관이나 동상 하나 세우지 못하게 한다. 고향 구미시에서 사저 관리에 대한 예산지원도 좌파들의 여론몰이로 중단시키고 감액시켜 생가도 초라하게 관리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폄해하고 업적을 평가하는 것을 부정하고 아예 국민들이 관심에서 지우기 위해 조직적으로 좌파 세력들은 온건 좌파 세력을 '개량반동'이라 몰아붙였고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였다고 부정적인 음모를 펼쳤고 온건 우파들도 극우 세력의 매카시즘에 의해 공산주의로 내몰기도 했다.
지식인이라고 자칭하며 여론몰이에 앞줄에 서있는 진중권 교수는 이만갑 등 각종 TV프로에 출연하여 역사적 이슈에 대해 논란을 하면 언제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직함을 입에 담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총칼을 앞세운 포악한 군사독제자로 매도하는 것을 더 이상 낡은 이념 논리를 입에 담지 못하게 반드시 박정희 실체를 바로 알리기 위해 반드시 다큐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는 “‘박정희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이며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는 도덕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으며 류 교수는 “당시의 리더십은 “‘잘 살기 위해 부정부패 안하고 열심히 할테니, 국민도 잘 따라오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청렴한 것처럼 떠들던 YS가 부정부패 타파를 외쳤지만, 정작 본인의 측근 비리, 친인척 비리를 피해가진 못했다. 수십년간 김영삼의 금고지기 역할을 하던 집사 장학로가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주변 측근들과 많은 상도동계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히 임기 후반 아무런 공식 직함도 없는 둘째 아들 김현철이 국정에 전방위적으로 개입하면서 사실상 소통령으로 군림했다는 것이 폭로되자 김영삼지지율이 폭락하게 된다. 결국 김현철이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 되면서 극심한 레임덕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동력을 상실하고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급박한 경제 상황에도 리더쉽을 상실하여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결국 외환위기가 폭발하여 지지율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김대중 때도 마찬가지다. 김대중의 아들 김홍업 씨의 비리 정황을 포착되어 결국 김홍업도 구속수감 되었는데 김홍업은 현대, 삼성으로부터 활동비 22억원, 기업체 청탁 대가로 25억 8,000만 원 총 47억 8,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 때맹위를 떨쳤던 게이트들, 특히 3대 게이트 중에서도 윤태식 게이트 등이 터지고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소위 홍삼트리오 가 줄줄이 구속되면서 국민의 정부의 체면을 구겼으며 게이트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권 시절, 형 노건평, 이명박 정권 시절 형 이상득 이원에 대해서도 재임 중 수사하고 처벌받았다.
그리고 IMF 사태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인기는 높아졌는데, 이를 '박정희 신드롬'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좌파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조석곤은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평가하며, 일종의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한다.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도 "독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신화 속의 허구"라 비판하며, "청산해야 할 독재통치 18년"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고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부조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은 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1999년 미국의 주간지 타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강의 기적을 이끈 인물로 '20세기 아시아인' 최고의 10인 중 한 명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 18년 재직하면서도 물려준 유산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만큼 청렴했다는 것은 사후에 낱낱이 밝혀졌다.
박정희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고도 반말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관이나 참모들은 물론 청와대의 이발사, 청소부 등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고 한다. 박정희 본인이 군인 출신인 데다가, 당시 사회는 평범한 사기업에서도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는 서슴없이 반말을 하는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독특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일상생활이 검소했다고 한다. 비름나물이나 두부 같은 향토음식을 좋아했다고 하며, 허리띠가 해져도 모르다가 청와대 전속 이발사가 알려줘서야 알아차렸다거나,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겨울 난방도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는 증언도 있었으며, 변기물을 아끼려 변기 뒷칸에 벽돌을 놓았었다는 것.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생활습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해외의 한국 근현대사 관련 학자나 정치학자들도 박정희의 생활이 검소했다고 평가했다.
지방순시 중에는 전용차를 놔두고 슬쩍 지나가던 시외버스를 타고 승객들이랑 노가리 깐 적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승객들은 앞에 가는 전용차를 타신 높으신 양반에 대해 씹고 뜯었지만, 정작 그 높으신 양반이 자기네와 같은 차를 타고 있는 건 몰랐다고 한다.
식당에서 자신보고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는 주인장에게 "박정희가 날 닮았지, 어찌 날 보고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는거요?"라며 뻔뻔하게 대꾸한 적도 있다는데, 아마 밑에도 있는 전주 삼백집 일화의 일부인 듯하다.
전주 지역 시찰을 마친 후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삼백집에 수행원을 시켜서 배달을 요청했는데, 하필이면 주인이 욕쟁이 할머니였다. 당연히 "이 썩을 놈아, 얻다 대고 배달을 해달라고 XX이야! 와서 처먹어!"라는 호통이 날아왔고 이에 사색이 된 수행원이 보고하자 박정희는 "허허허, 그럼 가야지?" 라면서 국밥집을 찾아갔다.
물론, 수행원들이 미리 찾아가서 제발 욕을 하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개무시했다. 이에 개의치 않은 할머니는 계속 욕설섞인 응대를 했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국밥을 먹던 박정희가 "장사는 잘 되십니까?"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 씨X. 웬 사내놈들이 와가지고 일하는데 자꾸 옆으로 찾아와서 나한테 욕을 하지 말라고 헝게 답답해 죽겄어!
이 놈아! 얼씨구? 네놈은 생긴게 꼭 박정희를 닮아서 밥을 잘도 쳐먹네? 어찌 그리 박정희를 쏙 빼닮았냐? 누가 보면 네놈이 대통령인 줄 알겄다 이놈아!" 라고 지나가다가 다시 "그래도 그놈은 큰일이나 했지. 옛다, 여기 계란이나 하나 더 쳐먹어!" 라면서 계란을 하나 더 서비스로 까서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에 박정희도 지지 않고 껄껄 웃으면서 "허허허, 할머니? 박정희가 날 닮았지, 어찌 나더러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슈?" 라는 말로 응수했으며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맛있게 국밥을 다 먹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나름대로 칭찬도 들었으니 그렇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청와대 출입기자와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하순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81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한국 기술로 개발한 핵무기를 공개한 뒤 전격 하야할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 후계자로는 김종필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박상범 전 경호실장도 1978년 3월에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경상북도 순시를 하고 구미 관광호텔에 하루 묵으신 다음 날이었어요. 여느 날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을 나가셨어요. 대통령도 저희 수행원들도 모두 쓰레기봉투를 들고 따라 나섰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산책을 나갈 때 늘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박 군만 따라오라’ 하셔서 저만 따라 나갔습니다. 말없이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같이 앉으라’ 하시고는 ‘집은 샀느냐’ ‘가족들은 건강하냐’ 물으셨죠. 그러더니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집권이) 18년 됐지? 지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 20년 되는 해에 전격 하야하고 떠나야겠다. 어때? 그러는 게 좋겠지?’ 물으시는 거예요. 그냥 한 번 생각난 김에 툭 던진 말이 아니라는 게 표정에서 다 느껴졌습니다. 속으로 너무 놀랐죠.”
ㅇ 박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
박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단 한 번도 친인척이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또한 청와대로 초청한 적도 없으며 집안 중 누구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지 않았다. 단 한 푼의 재산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았고 특혜도 베풀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어릴 적 등에 업고 다니며 극진히도 돌봐주시던 누님이 딱 한 분 계셨다. 동생이 대통령이 되었을 당시 누님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렵게 살아 올케인 육영수 여사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편지를 보냈다.
이에 육 여사는 친인척 담당 비서관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당시 비서관은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였고 대통령 집안을 잘 아는 분이었다.
비서관은 대통령 모르게 은행에서 도움을 알선하여 누님의 아들인 조카에게 택시 3대로 먹고 살도록 주선을 해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박 대통령은 친구이기도 했던 담당 비서관을 파면하고, 택시를 처분함과 동시에 누님과 조카를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조카는,
“삼촌! 대한민국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습니다." 라며 울먹이며 대들었지만 박 대통령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누님의 원망을 들은 박 대통령은
"누님 제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때 잘 모시겠습니다." 하고 냉정하게 외면했다고 한다.
그후 누님은 할 수 없이 대구에서 우유 배달로 생계를 유지했다고한다.
단 한 분 그것도 자신을 극진히 돌봐 주던 누님이 어렵게 사시는데, 대통령이 된 지금 이렇게도 냉정하게 뿌리친 심정은 어떠했을까?
*임종덕은 6. 25 전쟁 고아로 미국에 입양되어 하바드 대학을 졸업하고 백악관 비서관에 올랐던 인물이다..
ㅇ 대통령 아들
백악관 임종덕 비서관이 박대통령에게 지만이를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하면서 학비 일체는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제의했다.
대통령은 상기된 얼굴로 버럭 화를 내면서, “내가 아들을 유학 보내면 지금 장차관들이 자기 자식들도 전부 유학 보낸다고 할 것이다.
공장 여공들이 피눈물로 벌어들인 외화가 장차관 자식들 학비로 쓰인다면 이 나라가 언제 자립하고 자주국방을 하겠느냐 !
지만이는 육사를 졸업하고 중령에서 예편하면 연금으로 살 수가 있다. 그러니 앞으로 지만이 유학 이야기는 절대로 꺼내지 말게..."
- 부채 하나
"각하! 저는 미국 맥도널드사의 데이빗 심프슨 사장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앉으시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켠다는 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 에어컨을 꺼 놓았었소. 나는 이 부채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 에어컨을 켜는 게 어떻겠나?"
- 맥도널드의 돈 봉투
예정대로 그는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말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 소총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 결정이 한국의 방위에 크게 기여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준비한 수표 봉투를 내놓으며,
"저의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십시오."
"이게 무엇이오?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지 못할 큰돈이구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라면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오. 내 돈으로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이 돈의 가치만큼 M-16 소총을 더 가져오시오."
이상은 임 비서관이 직접 본 박대통령 회고이다.
ㅇ 받침 따로 찻잔
박대통령의 국장이 끝나고 일본인 지인들이 신당동을 찾았다. 유족들이 차 대접을 하는데, 가만히 보니 찻잔하고 받침이 하나도 짝이 맞는 게 없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아! 박정희는 죽어서도 교훈을 주는구나. 18년간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사람 집에 제대로 된 다기 세트 하나가 없으니..."
ㅇ 마취 않고 수술
1960년대 후반 박대통령은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하기 전에 대통령이 의사에게 몇 시간이나 걸리겠냐고 물었다.
의사는, "수술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리고 마취 깨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그러면 마취하지 말고 그냥 하시요. 그렇게 한가하게 보낼 시간이 어디 있소."
놀랜 의사가 이 수술은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안 된다고 했으나 박대통령은 고집대로 마취를 하지 않고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술 도중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고 통증을 참았다.
ㅇ 기워 입은 바지
10ㆍ26사건 당일, 서울육군통합병원 당직군의관이 합수부 조사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응급실에 안치된 시신이 VIP일 것이라고는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대통령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바지는 도대체 몇 번을 수선했는지 매우 낡아 있었고, 혁대도 다 닳아 헤지고, 넥타이핀도 표면이 다 벗겨지고, 시계도 흔해빠진 싸구려였다는 내용이 있다.
대통령은 사건 당일에도 바지의 허리부분을 수선해서 입었고 그 바지를 입고 최후를 맞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ㅇ 아래글은 박정희 저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中 35p~36p 인용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애용 일부를 인용하면 박 대통령께서는
아무리 제도를 뜯어고치고 틀을 바꿔 봐야 그 제도를 구성하는 개인이 예전 그대로라면 달라질 게 없다.
우리가 새사람이 되자고 부르짖고 겨레 사랑을 누누이 강조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겨레 사랑의 기특한 마음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집단이기주의에 몰두하는 파당주의가 별안간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안에 자라난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사대주의 사상과 양반, 상놈을 가르는 투철한 계급의식 그리고 네 조각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싸우던 사색당쟁을 말한다. 그것은 조선 왕조 오백 년이 남긴 한심한 유산이었다.
그런 당파싸움 끝에 나라가 망하고 왜놈들을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역사를 까맣게 잊은 채 또다시 당파싸움에 몰두한다면 서글픈 게 아니라 한심한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이 되자는 운동은 그런 생각들을 깨끗하게 쓸어 내고 새로운 마음을 갖자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유민주주의에 걸맞은 자질을 갖추자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참된 자기를 세우는 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참된 자기를 세움이 없이는 평등도 자유도 없다. 자기에게 평등과 자유가 없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의 평등과 자유를 알고 존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참된 자기가 없으면 평생을 남의 종 노릇으로 보내게 된다. 참된 자기가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세울 수 있는지 알고 행한 다음에야 자기가 이 겨레를 구성하는 한 사람이라는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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