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변의 역사 2009.3.3.화
구정려와 전주사고
구정려(具廷呂)의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직제학 구종길의 후예로서 진사 구원 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한 그는 임진왜란 당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있었다.
구정려는 1952년 전란의 와중에서 이태조의 어진(御眞)과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정읍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겨 보관했다. 당시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구정려는 조선왕조실록 등을 이듬해 강화(江華)까지 무사히 옮겼다. 그는 당시 오희길, 손홍록, 안의 등과 함께 이 일을 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時政)을 기록하였다.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부터 1413년(태종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다. 1426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13)에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 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었다. 그래서 1445년(세종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다.
1592년 4월 14일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4월 27일 성주, 4월 28일 청주 그리고 5월 2일에 서울마저 함락되면서 세 곳의 실록은 불타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뿐 이었다.
유생 안의 와 손홍록 등 두 사람은 왜군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 집안의 머슴들을 이끌고 전주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전주사고의 참봉 그리고 오희길 등과 함께 실록을 정읍까지 피신시킨다. 전주부의 책임자들은 모두 싸움터에 나가 실록을 지킬 만한 경황이 없었다.
모두 64궤짝이나 되는 실록 등을 말 등에 싣고 전주를 떠난 네 사람은 6월 22일 정읍에 도착했다. 그들이 실록을 피신시킨 곳은 내장산 은봉암 이라는 작은 암자다. 지금은 다만 내장산의 금선폭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다시 7월 1일 이들은 태조의 어진을 조금 더 깊은 산중, 지금의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긴다. 유일하게 남았던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의 어진을 지키기 위해 혹은 함께, 혹은 교대로 밤잠을 자지 않으며 지킨다.
이듬해 7월 왕명으로 실록이 정읍현청으로 옮겨지기까지 내장산에서 실록을 지킨 날 수는 무려 383일, 1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정읍현청으로 옮겨진 실록은 그 후 선조가 피신해 있는 해주까지 이송되었다.
그 뒤 영변 묘향산으로, 다시 부본을 인쇄하기 위해 강화도까지 옮겨졌다. 이 때 실록을 옮긴 것도 이들이다. 당시 손홍록의 나이는 56세, 안의 의 나이는 64세였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선조 36년, 실록은 다시 네 벌로 등사돼 사고에 봉안된다.
손홍록과 안의 는 실록 보존의 공으로 선조에게 두 차례나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끝내 마다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다시 실록 피난에 나섰다가 안의 는 이때 얻은 병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창원구씨(昌原具氏)의 시조는 구성길(仇成吉)이다. 구(具)씨는 원래 구(仇)씨였으며 구성길은 중국 송나라 대부 구목 의 후손이다. 우리나라에 귀화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성길이 945년(고려 혜종 2년) 찬성사를 지냈으며 서경에서 왕규의 전횡을 토벌하여 의창군에 봉해진다. 의창은 창원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구(仇)씨가 구(具)씨로 성을 바꾼 것은 조선 정조 때다. 1791년(정조 15년)에 구(具)씨로 사성을 받으면서 성이 바뀐 것이다. 후손 구시창(仇始昌)이 초관(哨官)의 후보자로 왕에게 천거된다. 왕이 보고 "구성(仇姓)은 구성(具姓)만 못하니 구(具)로 고치라“고 했다. 이때부터 구(具)씨가 새로 태어난다. 구(具)씨는 1924년 족보를 만들면서 일부는 능주와 회산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그러나 같은 혈족으로 여긴다.
창원구씨의 중시조는 조선 세종 때의 구종길이다. 그는 1363년(공민왕 12) 경남 의창군 북면 내곡리에서 생원 구설 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역에 통달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진력하다가 늦게 벼슬길에 나선다. 1422년(세종 4)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거쳐 직제학에 이르렀다.
구종길의 아들 4형제가 창원구씨의 4대 산맥을 이룬다. 맏아들 구복한 은 부사공파, 둘째 구동설 은 진사공파, 셋째 구동직 은 승지공파, 막내 구석훈 은 처사공파로 각각 분파되었다.
구종길의 7세손 구응진은 임진왜란 때 제포만호로 김해, 노현 등지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나 왜군에게 무참히 처형당했다. 그의 아우 구응삼도 임진왜란 때 훈련원첨정으로 선조를 의주에까지 호종하고 전쟁에서 순절했다.
진사 구명람의 아들 구응성은 구응진의 종제(從弟)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훈련원주부로서 의병을 모아 권율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그의 아들 구동 은 약관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의령, 함안 등지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으나 끝내 싸움터에서 숨졌다.
1967년 구응진, 구응삼, 구응성, 구동 등 일문4충(一門四忠) 4부자형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경남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에 사충기적비(四忠紀蹟碑)가 세워졌다.
창원구씨의 항렬자는 17世 동(東), 18世 환(煥), 19世 재(在) 재(載), 20世 진(鎭) 옥(鈺), 21世 영(永), 22世 근(根), 23世 병(炳), 24世 효(孝), 25世 종(鍾), 26世 수(洙), 27世 상(相), 28世 렬(烈) 이다.
본관 창원(昌原)은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다. 고대에는 금관가야(金官伽倻)에 속했으나 신라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굴자군(屈自郡)이 설치되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합포현(合浦縣: 馬山)·웅신현(熊神縣: 熊川)·칠제현(漆隄縣: 漆原)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금주(金州: 金海)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6년에 경상남도 창원군이 되었다. 1980년에 마산시 의창동을 편입하여 창원시로 분리 승격되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창원구씨는 1985년에는 총 5,056가구 22,127명, 2000년에는 총 4,391가구 14,03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 구존유(具存裕)로 선대에 대하여는 명확하지 않다. 구존유는 고려시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에 이르렀다.
구존유의 장인인 주잠(朱潛, 신안주씨 시조)은 송나라 한림학사로서 송나라가 몽골에 패망하자 1224년(고려 고종 11년) 망명하여 금성(錦城, 나주의 옛 이름)에 정착하였다. 주잠이 능성에서 살며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이 구존유와 혼인하여 능성에서 살게 되자 구존유가 능성을 본관으로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구존유는 송나라가 원나라에 패망하자 1224년(고려 고종 11년) 주잠과 함께 망명해온 뒤 원나라가 이들을 추적하자, 구적덕(具積德)으로 이름을 고쳐 능주(綾州, 능성)에 숨어 지내다가 주잠의 딸과 혼인하였다고도 한다.
능성구씨의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194명이다. 능성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옛 지명이다. 1908년에 화순군이 능주군에 병합되었으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능주군을 화순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능주군은 폐지되었고, 능주면으로서 화순군에 편입되었다. 능성구씨는 1985년에는 총 27,231가구 111,834명, 2000년에는 총 37,706가구 120,503명이다.
능주구씨(綾州具氏)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가 51명이다. 능주구씨는 1985년에는 총 3,938가구 17,010명, 2000년에는 총 7,807가구 25,484명이다.
( 성씨 전문기자, 전북매일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