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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51년(문종 1)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1457년(세조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 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 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 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의 글씨는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에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이며,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476년(성종 7)에 ≪삼국사절요≫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에 ≪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전년에 완성된 책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동국통감≫ 56권을 신편하였다. 원래 세조가 목표했던 의도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권근(權近)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기왕의 고대사 서술이 탈락된 것이 많아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1476년에 완성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거의 짜여진 ≪동국통감≫의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해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1474년에 영의정 신숙주(申叔舟)가 편찬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신숙주가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죽음으로써 노사신(盧思愼)이 주축이 되어 서거정·이파(李坡)·김계창(金季昌)·최숙정(崔淑精) 등의 도움을 얻어 완성하였다. 내용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의 연결을 의식하고 편찬한 듯한 ≪삼국사절요≫는 ≪삼국사기≫에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수이전≫·≪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이용하려던 고기류(古記類)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수사관(修史官)이 완성한 것이지만 세조 자신이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보다 고대문화를 훨씬 포용하고 있다. 이는 처음으로 삼국의 세력이 대등하다는 입장이 표방되어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을 수정했다는 것과 찬자 자신들의 사론을 적어넣지 않음으로써 고대문화에 대한 비판을 완화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신편동국통감≫은 서술 체재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였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 부족으로 체계적인 왕조사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며,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 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均敵論)을 내세워 어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 대비된다 하겠다.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의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과는 달리 즉위년칭원법으로 바꿔 당시의 사실과 맞게 고쳤다. 또한, 범례는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을 ≪자치통감강목≫을 따라서 두 사서의 정신을 절충시켰다는 점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한편, 모두 382편의 사론이 있는데,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는 찬자 자신들이 직접 써넣은 것이다. 나머지 204편 중 반이 넘는 118편의 사론을 최부(崔溥)가 썼다. 서거정도 사론을 썼으며 다른 사신(史臣)도 이를 쓴 듯하다. 찬자 자신들이 쓴 사론의 성격은 춘추대의론에 입각해 명교(名敎)를 존중하고, 절의를 숭상하며, 난신적자를 성토하고, 간유(奸諛)를 필주하고자 하는 것이 주지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사서에서도 위와 같은 취지의 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론이 전보다 한층 경직된 포폄(褒貶)이 가해지고 있다는 데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명교를 존중하는 사론으로 중국에 지성으로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홀히 한 행적은 철저히 비판되고 있다. 둘째, 강상의 윤리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다. 강상윤리를 잘 지킨 인간상으로 기자(箕子)·김보당(金甫當)·조위총(趙位寵)·박제상(朴堤上)·김흠운(金歆運)·계백(階伯)·경순왕자(敬順王子)·한유한(韓惟漢) 등이 칭송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공리를 배격하고 인의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다. 불교·도교·민간신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은 기왕에도 있었으나, 고려 태조의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별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의 팔관회(八關會) 실시, 신라의 삼보(三寶)에 대한 물음, <훈요십조 訓要十條> 등이 모두 비난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기자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그리고 신라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단군조선·고구려·백제·발해·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추고 있다. 이 책은 세조에 의해 유교적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고 낭만적인 신화적 역사 서술을 받아들여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입장에서 그 편찬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을 지키려는 유신들의 비협조로 완성되지 못하였다. ≪삼국사절요≫는 신숙주 주도하에 유교적 명분론을 깔고 수정된 ≪동국통감≫의 일부로써, 아직도 세조 때 낭만적 분위기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1484년(성종 15)에 서거정의 주도하에 찬진된 ≪동국통감≫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찬자들이 모두 훈신이었던 성향으로 보나, 찬자 자신들이 사론을 써넣지 않은 점으로 보나,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을 기저에 깔고 있던 사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지금 전해지는 1485년에 개찬된 ≪동국통감≫은 성종 자신이 적극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사림이 참여해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투영된 사서가 되었다. 따라서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해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직접적으로는 세조 및 그를 보좌했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를 가지며, 간접적으로는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병책을 비판하는 의미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지금까지 세조와 훈신을 비판해온 재야 사림세력의 처지를 강화해주는 기능을 가진다고 하겠다. 동시에 훈신의 압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종의 왕권 신장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편찬은 형식상으로는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공동 합작으로 편찬되어 지금까지 모아지지 못했던 대립적인 요소가 합일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초기 역사 서술에서 완성의 의미를 지닌 것도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