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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선.
[2부]
멀리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마음으로 (고등학교 1학년) 시간을 게재(掲載)한다.
현재가 힘들고 어렵더라도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계획한 목표를 꼭 이루기 바란다.
(2010년 2월 후반)
2월12일
어제 늦게 들어와 자는 바람에 식사를 9시가 지나서 했다. 아침에 눈이 날리고 구정 명절을 보낸다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이 TV 화면에 비친다. 오전을 보내다가 동생 정환이와 점심을 하기로 약속하여 학원에 나갔더니 명절 선물이라고 시바스 1병을 들고 왔다. 학원을 이전한 뒤에 수강생이 늘었다고 밝은 표정을 지어 좋았고 근처 해장국 집에서 뼈다귀 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오후에 동생을 보내고 경동시장으로 가서 명절 선물로 사과와 귤 각 1박스를 샀다. 또한 시골에 계시는 영식이 어머님께 드릴 종합선물 과자세트를 도매가격 4만원을 주고 구입하여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벌써 고향에 가 있다. 일단 학원으로 들어가서 수업을 하고 집으로 오는 저녁에 영식이 형님이 살고 있는 서울역 근처 청파동에 가서 내일 고향에 내려갈 때 가져가서 어머님 드리라고 낮에 산 과자세트를 전하여 주었다. 집으로 와서는 아내와 함께 아들이 다니는 학원에 찾아가 상담을 하고 선물도 전했는데 이번 2월은 졸업과 명절 등으로 지출이 꽤나 많은 달이다. 집에서 삼겹살로 저녁을 먹다가 9시 뉴스를 접하니 연휴라고 고속도로는 귀향하는 차량들로 벌써 전쟁터가 되어 있다. 내일은 북한산 산행을 해야 하는데 늦은 밤까지 눈이 내리고 잠을 이루지 못한 채 12시를 넘겼다.
13일
오늘이 음력으로 12월 31일 일요일이다. 내일은 1월1일 설날인데 어제부터 내리는 눈은 새벽까지 계속 되고 있다. 다행히 기온이 높아 도로에 닿으면서 녹아 버렸고 식사를 마친 아침에 북한산에 가려고 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으로 향했다. 명절 전이고 이른 아침이라 등산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아 길가에 차를 두고 출발하는데 눈은 다시 산등성이를 휘감아 내린다. 작년에도 섣달 그믐날 북한산에 왔었는데 그때도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렸고 정상에서 바라본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기억이 벌써 365일 전이다. 40분을 걸어 북한산 중문을 통과했고 노적사 방향을 거쳐 왼쪽으로 노적봉에 오르니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어 완전 설국을 연상하게 하였다. 무릎까지 눈이 쌓여 걷는 것은커녕 길도 찾을 수 없었고 앉는 것조차 불가능하여 뜨거운 물과 누룽지탕을 선 채로 먹었다. 살면서 이런 상황도 처음인데 북한산의 북쪽이라 눈이 녹지 않았고 인적도 없는 외진 곳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내일이 명절이라 미리 큰 형님 납골함에 가려고 노적봉에서 내려와 1시간을 달려 고양시 용미리에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교통이 원할했다. 이 곳은 형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경황이 없는 가운데 화장장에서 지정해 준 곳으로 주차장에서 가까운 4구역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 영구차에서 내릴 때 납골함을 내가 들고 올랐는데 화장장에서 나온 직후의 열기와 형의 체온까지 뜨거웠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며칠 전에 형수와 치오를 만나서 그런지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웠고 추모의 마음과 함께 그리움을 남기고 다시 내려왔다. 내일이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날인데 이제는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초라한 생각도 들고 흥성했던 어린 시절이 더욱 그립기만 하다. 저녁에 친구와 동태탕으로 식사를 하고 6시경 집에 왔더니 아무도 없고 전화를 하니 불광동 킴스클럽에 모두 가서 쇼핑을 하고 있다.
14일
오늘은 음력 1월1일 구정 명절이고 고향에 가는 행렬로 고속도로는 극도의 정체를 이루고 있는데 가깝든 멀든 고향이라고 또한 찾아볼 사람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행복한 일이다. 지난날 나도 명절에는 고향에 가서 어머님을 뵈었고 저녁이 되면 형님네 가족까지 모두 내려와 시끌벅적한 시간이 있었다. 밤에는 잠자리가 부족하여 거실에서까지 누웠고 아침이 되면 화장실 앞에 줄을 서는 평소에 볼 수 없는 장면도 있었다. 생각하니 잠깐의 꿈같은 순간이었지만 이제는 갈 곳도 볼 사람도 없으니 사는 것이 허망하고 우습기만 하다. 아침에 평소처럼 식사를 마치고 청주에 가려고 나서는데 아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동행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 세배도 하고 음식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으련만 정초부터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4명이 승용차로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터미널에 나가 1시간40분을 달려 청주에 도착하니 12시가 지났다. 집으로 들어가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하고 재규와 동렬이네까지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부모와 형제를 만난 아내는 마음이 좋은지 연신 싱글 벙글한 모습이다. 오후 3시에 제천에 간다는 재규네를 보냈고 저녁에는 동렬이 처남이 시장에 나가서 광어회를 사 가지고 왔는데 매형이라고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고마웠다. 정체가 심할 것이라 예상하고 밤에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왔는데 막힘이 없어 11시20분 도착하여 지하철로 집에 왔다. 늦은 시간 라면을 끓였더니 아들이 거실로 나왔고 세배는커녕 수련회 다녀왔다는 인사도 없이 먹기만 한다.
15일
월요일 연휴 3일째 무악재 고개의 차량들이 뜸하다. 오늘 산행을 하려고 어제 늦게 청주에서 온 것이지만 아름다운 도봉산이 아른거리며 마음은 아침부터 정상에 가 있다. 식사를 마친 뒤에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을 뒤로 하고 10시에 집을 나서 광화문에서 시청으로 걸어가 친구를 만나 출발했다. 11시30분 도봉산역에 입구로 들어서니 구정의 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연휴 마지막이라고 이곳으로 몰려들어 산길을 가득 메웠다. 엊그제 내린 눈이 그대로라 길은 미끄러웠고 도봉산 우이암 코스로 시작하여 중간에 구봉암 천진암을 경유했더니 점심시간에 중턱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는 아이젠을 하고 정상에 올랐고 아름다운 설경이 보이는 장소에서 컵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경관은 좋아도 가는 곳마다 눈이 쌓여 식사를 하기에는 불편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산바람으로 추위까지 찾아와 3시경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도봉산역 근처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한데 입구에서 환대하는 주인장의 유혹에 포차에 들어갔고 해물파전에 술을 마시며 겨울인지 봄인지 모를 연휴 마지막을 보냈다. 도봉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들어와 다시 따뜻한 우동으로 요기를 하고 집으로 향했는데 배낭을 메고 걷는 시간은 언제나 마음이 한가하다. 동해안 고향에서 보내다가 지금 서울로 출발한다는 영식이가 어머니 선물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여 영덕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를 조심히 오라고 대답했다. 집에 들어와 오늘은 무엇을 하고 보냈는지 말도 안 하는 아들과 9시에 저녁을 함께 먹었고 TV를 보면서 내일을 준비하는데 금방 12시가 지났다.
16일
연휴가 끝났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했을지라도 나로서는 풍성함 속에 빈곤한 휴일을 보낸 것 같고 오히려 시간을 외면했던 3일이 아니었나 싶다. 새벽에 뉴스를 보니 서울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내려가 오늘은 춥고 밤부터는 눈이 많이 내린다는 뉴스가 나온다. 입춘도 지났는데 아직도 추위가 맹위를 떨치다니 겨울의 심사로 화려하게 준비한 봄은 아직 저만치서 멈추어 있다. 아침 9시가 되어 청국장으로 식사를 마쳤는데 새벽 2시까지 TV를 본 아들이 늦게까지 잠을 자고 있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10시에 곧장 체육관으로 갔다가 런링과 기구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돌아왔더니 연일 술을 마셔 정신이 멍했던 내가 다시 맑음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하고 보충수업으로 학교에 가려는 아들을 태워주려고 했는데 친구와 함께 간다고 사양을 하여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자지간은 거리가 있어 보이면서도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오후 2시에 학원에 간다는 딸을 아파트 입구에서 배웅하고 성북동 학원에 도착하여 밀린 서류와 수업일정 등을 정리했다. 영하의 날씨로 밖은 쌀쌀하지만 교무실 유리창을 통하여 바라본 도심의 모습은 분명 하늘거리는 아지랑이의 손짓이 멀리서 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오후에 남영동에서 영식이를 만나 생태탕으로 저녁을 먹는 중에 어머니 때문에 심난하다는 형준이 전화가 와서 화곡동으로 출발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담낭암으로 이대 목동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신다.
17일
연일 술을 마신 관계로 속이 아파 잠이 오지 않으니 은근히 걱정이 생겼고 학원에 간 아들은 새벽 2시가 지난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밤새 뒤척이다가 8시에 눈을 뜨니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가 과일즙을 만들어 왔는데 평소 무덤덤한 사람이 어인 일인가 궁금했고 어제 민정맘 만났다더니 무슨 조언을 들었지 싶다. 9시에 논술교실에 올라가 예비고1 수업을 했는데 술도 깨지 않은 상태에서 하려니 힘이 들었고 수강생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바로 돌아왔지만 속이 거북하여 고생을 했고 산이라도 올라가 땀을 흘릴까 했는데 빈둥거리다가 기회를 놓쳐버렸다. 금방 눈이 내릴 것처럼 흐린 날에 화장실만 들락거리며 보내다 오후 3시를 맞이했고 나와 반대로 오늘 고등학교 보충 수업이 없다는 아들은 친구까지 놀러와 집에서 컴퓨터를 하며 보낸다. 학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서 평소에 먹지도 않는 약을 복용하고 있으니 아들이 걱정스런 모습으로 바라보고 학원에서는 수강생들이 주말에 수업을 하자고 하여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아침과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고파서 저녁에는 매운탕으로 식사를 조금 했는데 밤중에 복통이 시작되어 뒹굴다시피 했다.
18일
새벽까지 배가 아프고 땀이 나고 토사곽란으로 고생을 하는데 일찍 깨어난 아내가 바늘로 손가락에 피를 내어 그나마 조금 진정이 되었고 8시까지 잠을 잘 수 있었다. 나도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니 음식 먹는 것도 조심하고 평상시에 건강에 신경을 써서 아파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이다. 이대부고 1학년 반 편성을 하는 아들을 태우고 학교에 가는 도로에는 밤새 5센티 가량의 눈이 내려 주변이 온통 하얗다. 교문 앞에 내려주면서 평소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무국으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오전에 누워서 12시까지 보냈는데 그 사이에 아내는 신사임당 모임으로 시내로 외출을 했고 학교에서 아들이 돌아왔다. 아프다면서 산에 간다고 걱정을 하는 아들을 뒤로 하고 점심시간이 지나 눈이 쌓인 안산에 올랐는데 바람만 차갑게 불어서 매우 추웠다. 하지만 하얀 산이 아름다워 추위를 잊고 중턱을 돌아 1시간 이상을 걷다가 집으로 내려오니 2시가 지났다. 점심을 먹는 중에 아들이 외출을 하기에 오후 6시부터 수학학원 수업이니 늦지 않도록 하고 열심히 잘 배우라 일렀다. 4시에 학원에 나가려다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아서 집에서 책을 보며 보냈는데 여기서도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7시경에 딸이 들어왔고 학원을 마치고 홍제문구에 갔다가 삼겹살을 사 가지고 돌아온 아내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어제 급체를 해서 오늘은 조심했고 밤에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들이 새벽 2시에 돌아왔다.
19일
옆에서 자던 아내가 보이지 않아 거실에 나갔더니 코까지 골며 만세를 부르는 모습으로 혼곤한 잠에 취해 있다. 오늘 반 배치고사 실시와 교재를 수령한다는 딸을 동명여중까지 태워준다고 하니 친구와 함께 가겠다고 하여 8시30분에 아들과만 이대부고에 갔다. 9시경 딸 치과 예약으로 서울대 병원에 갔더니 실시간 접수라서 오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가까이에 있는 학원으로 들어갔다. 마라톤 출사표나 어머니 투병기 등을 제출한 인연으로 조선일보와 관련된 원고와 논술교실 3월 수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이발을 하러 간다기에 턱관절 치료로 서울대 병원으로 가는 아내와 딸까지 모두 태우고 집을 나섰다. 독립문을 지나 중학교 때부터 다니던 인창중학교 근처 이발관에 내려주려던 참인데 아들이 오늘 교복을 찾으러 가자고 한다. 지금은 병원에도 가야하고 학원 수업도 있으니 내일 교회에 다녀오면서 가져오겠다고 하니 자기 돈으로 오늘 찾겠다고 우기며 말도 없이 차에서 내린다. 교복을 빨리 입어보겠다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막무가내인 아들이라 당황했고 시내를 가면서 차까지 정체되어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다. 서울대병원에 아내와 딸을 내려주고 학원으로 들어가 수업을 마친 뒤에 저녁에는 신설동으로 나가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오늘 컨디션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내가 소리를 높여 고성을 지르니 가게주인 세입자나 손님들이 모두가 당황한 모습이었다.
20일
어제 아내와 아들이 다투어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을 보내다가 산에 가려고 영식이에게 전화하니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한다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서 안산에 올라 아직도 눈에 덮여 있는 산길을 걸어 정상을 올랐다가 산악회 운동장으로 내려와 기구운동을 하고 돌아왔다. 집에 2시경 도착하니 아내는 벌써 논술교실에 올라갔고 아들만 신나게 컴퓨터를 하고 있어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일요일 수업을 위하여 교재를 정리하고 3시30분에 사당동으로 나가서 관악산에서 내려온 영식이와 친구들을 만났다. 막걸리를 마시며 보냈는데 어제처럼 집에서 다투거나 기분이 나쁠 때면 밖에서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커져 고압적으로 변하는데 오늘도 목소리를 높이고 허세를 부렸더니 시간이 빨리 지났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데 살아온 환경이나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혹 소통이 잘 되는 경우에는 즐거움이 배가 될 수 있는데 오늘은 영식이가 다른 친구와 의견이 달라 옥신각신 했고 결국 방배동으로 10시에 이동하여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막차가 달리는 시간에 이수역을 통과하는 752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늦은 시간이라 승객이라곤 나 혼자뿐이다.
21일
어제 밤 12시 전에 오긴 했어도 긴 시간 술을 마셨더니 아침까지 정신이 어질하다. 요즘 내가 살아가는 과정 중에서 아들로 인하여 피곤함이 많이 생기고 어제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식사도 거르고 홍대 입구와 양화대교를 달려 교회에 도착하여 커피 한 잔을 마신 뒤에 3층 예배실로 들어갔다. 신자도 아니고 아는 것도 없는 내가 성전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한데 오늘은 사순절 시작이고 목사님은 겸허와 절제로 주님 안에서의 생활을 말씀하신다. 개인적인 일이 있는지 성가대 자리에 우현이가 보이지 않아 궁금했고 예배를 마친 후에는 바로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 2시에 논술교실에 올라가 고1 국어수업을 하는데 아들이 결석하여 또 스트레스가 생겼고 가까스로 마친 뒤에는 집으로 내려가 쉬었다가 B반 수업을 하러 올라갔다. 초심을 잃지 않고 강의를 잘하리라 다짐하며 오늘은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고등부 강의안내서와 시간표를 수강생들에게 배부했다. 수업을 마친 6시30분에 다음 강의를 한다고 아내가 논술교실에 들어와서 집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고 수학학원이라도 간다면 또 새벽에 올 것인데 이래저래 자식을 지도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무관심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간섭을 지나치게 하면 반항심만 유발시켜 갈등의 시간을 더 키우는 꼴이다.
22일
새벽 3시에 아들이 돌아왔고 거실에서 자는 아내의 콧소리로 인하여 잠을 설치다가 7시에 일어났다. 아침에 아들이 수련회를 간다고 바쁘게 준비물을 챙기는데 서로간 대화도 없는 사이라 마지못해 도와주는 아내의 표정이 굳어 있다.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메고 나가는 아들을 태워 주려고 일어섰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없이 먼저 나가 버려 거실에 서 있기만 했다. 이번 이대부고 수련회는 2박3일 일정으로 강원도 평창으로 가는 것인데 입학 전에 무슨 목적인지 알 수는 없고 여행비는 개인당 9만8천 원이다. 9시에 수업을 하러 논술교실에 올라갔다가 11시에 마친 후 체육관으로 나가서 운동을 하고 1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딸과 함께 닭국물로 점심을 함께 먹었고 오후에는 종각역 영풍문고에 들러 3월부터 수업할 참고서를 점검했다. 서점을 나와 성북동 학원으로 달려가니 3시30분이 되었고 수업을 하는 중에 다리가 골절되어 구로동 성심병원에 한 달째 입원 중이라는 남석이의 전화가 왔다. 젊은 시절에 위암으로 고생하며 이승과 저승을 오간 친구인데 살아가는 동안 시련을 많이 격는 친구다. 병문안은 내일 가기로 하고 수업을 마친 뒤에 집에 돌아왔더니 청주에 사는 동렬이 처남이 와 있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직장을 다니는데 오늘은 자신이 개발한 CCTV 부품 홍보를 위해 왔다면서 아는 바가 없는 나에게 열심히 설명을 한다.
23일
새벽 5시에 눈을 뜨고 7시까지 보내다가 뉴스를 시청하니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이 더 오른다고 한다. 이제 완연한 봄이 올 것이지만 3월 중순이 되면 해마다 그렇듯이 장애물처럼 눈도 내리고 꽃샘추위가 한 두 번 기승을 부릴 것이다. 8시에 동렬이 처남과 청국장에 생선구이 어묵과 김까지 다른 날에 비하여 많은 음식으로 식사를 했는데 남동생을 생각하는 누나로서의 마음이 부모 못지않게 각별하기만 하다. 10시경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집으로 들어오니 아내와 딸이 잠을 자고 있어 소리 죽이며 혼자 점심을 하고 신설동에 나가서 2층 계약서를 작성했다. 2층은 오래 전부터 호프 광장으로 손님들이 제법 많은 곳인데 이번에는 열심히 할 것 같은 젊은 부부가 세입자로 들어왔고 보증금 1500만/ 월110만원의 다소 저렴한 금액으로 계약을 마쳤다. 오후에 보험을 한다는 영식이의 중학교 동창 최형규가 찾아와 대구탕으로 점심을 먹었고 4시에 학원으로 들어갔다. 저녁에는 일찍 수업을 마치고 내부순환도로를 달려 서해안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고척동 방향으로 나가서 남석이가 입원해 있는 성심병원에 도착했다. 친구 병문안을 간 것인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였는데 앞으로도 한 달 이상 병원에 있어야 한다니 일도 못하고 답답할 것 같았다. 친구와 한 시간 이상을 보내고 화곡동을 거쳐 염창동 인공폭포 근처로 이동하여 고향 후배와 설렁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음식에 문제가 있는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속이 거북하여 힘이 들었고 밤에 집에서 조차 편하지 않았다.
24일
포근한 아침 날씨다. 식사를 마친 뒤에 동계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다가 10시에 마라톤을 하려고 간편한 복장으로 나섰다. 기온은 올랐어도 아직도 겨울의 여운이 남은 홍제천을 달려 월드컵 경기장과 성산대교까지 1시간20분 12킬로를 달리고 왔더니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시원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올림픽 피겨를 핸드폰으로 보는데 한국의 김연아 선수가 1위를 하여 국민들에게 감격을 안기는 장면이 나온다. 김선수는 오늘이 있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인데 누구라도 무엇이든 자신이 하는 일에 혼을 다하여 집중하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집에 도착하여 라면으로 점심을 먹었고 일을 보기 위해 시내에 나갔는데 광화문 일대 정체가 심하여 가까스로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 세무서로 향했다. 신설동 부가세 때문인데 세금은 매년 신고할 때마다 다르게 산출되어 이번에는 다운계약서를 작성하여 줄이는 방식을 선택했다. 4시경 학원으로 들어가 맨 먼저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아들의 담임이었던 이세복 선생을 한성대 근처 장어집에서 만나 식사와 술을 했다. 칭찬과 함께 직접 아들에게 통화까지 하는데 이미 졸업을 했어도 중학교 담임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을 듯하다. 10시경 집으로 들어가니 수련회를 마친 아들이 돌아와 있었지만 잘 다녀왔는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엊그제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이 없다.
25일
새벽에 비가 내리고 오늘 하루 종일 온다고 하니 봄비로는 많은 양이 될 것 같다. 수업을 하려고 식사를 마친 8시30분에 논술교실에 올랐더니 지각생이 많았고 결국 늦게 시작하여 11시에 마쳤다. 그 사이 빗방울이 굵어져 멀리서 다니는 아내 친구의 딸 하은이를 집 주변까지 태워 주고 왔는데 성적이 좋지 않아 안타까운 면이 있다. 차를 돌려 바로 체육관으로 이동하여 운동을 하고 은행에 들어가서 2009년 하반기 신설동 부가세 40만원을 납부했다. 세금은 고무줄 같은 것이라 신고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납부액이 정해지는데 대기업들도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아 불법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과 딸은 학원에 갔고 점심을 먹은 오후에는 지하철을 이용하여 학원으로 가는데 대치동학원에서 투자액 원금 일부를 보내왔다. 오늘은 국어수업이 없어 한가하게 보냈고 대신에 신설동 수도세와 학원 전기세 및 전화세 등을 처리했다. 초저녁에는 저녁을 하자는 영식이 전화가 왔는데 내일 수업이 많아 다음으로 미루고 집으로 곧장 들어왔다.
26일
화창한 금요일의 날씨다. 보름 전 중학교 졸업에 이어 오늘은 환경이나 체제가 완전히 바뀌어 새롭게 출발하는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다. 오늘 오후에 거행하는 입학식에는 아내가 참석하기로 하고 나는 식사를 마친 뒤에 논술교실에 올라가 보충수업을 시작했다. 몇 명이 결석을 했는데 특히 아들은 입학식이 오후에 있기 때문에 수업할 충분한 시간이 있음에도 결석을 하여 스트레스와 함께 진도를 나가는데 애를 먹었다. 논술교실에서의 수업은 처음에 아들을 위해서 시작했는데 정작 아들 때문에 갈등이 많다니 내 무덤을 내가 만든 꼴로 삶이 아이러니하다. 수업을 마친 12시에 집으로 내려와 마라톤 복장으로 갈아 입고 홍제천으로 나가서 월드컵경기장까지 10킬로를 달리고 돌아왔다. 답답한 마음이나 잡념이 생길 때는 어김없이 달리는 곳이라 긴 거리든 짧은 거리든 오늘도 완주를 하며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를 날렸다. 집으로 돌아와 금메달을 따는 한국 선수의 동계올림픽 경기를 관전하는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라서 탄성과 환호를 연신 질렀다. 오후에 구기터널 근처에서 친구를 만났고 저녁에는 얼마 전 필리핀 사업을 하는 이정렬을 윽박질렀더니 영식이에게 빌려간 1천만 원을 입금해 왔다. 물론 어려운 영식이에게 바로 송금을 해 주었지만 필리핀이나 선박에 투자한 10억원 규모의 친구를 생각하면 아직도 난감한 상태다. 11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니 컴퓨터를 하던 아들이 다가와 팔을 붙들고 얼렁뚱땅 악수를 청하며 반기는데 입학식을 잘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오전에 결석을 하여 미안함인지 알 수가 없다.
27일
새벽 일찍 일어나 안방에서 나오니 아내가 거실에서 잠을 자고 있다. 토요일 아침을 보내며 산에 가려고 준비를 하고 무국으로 식사를 했는데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가지 못했고 곧장 논술교실에 올라갔다. 현재 가르치는 예비고 학생들은 12월부터 시작하여 2월말까지 수업을 약속하여 일요일인 내일이 마지막이 된다. 물론 3월부터는 본격적인 심화수업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학교마다 일정이 달라 새로운 수업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도 각 방송에서는 동계올림픽 중계가 계속되어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는 기쁨을 누리는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져 메달을 놓친 안타까운 선수도 있다. 기쁨과 슬픔이 그리고 성공과 좌절이 공존하는 우리의 살아가는 일상과 다르지 않기에 다시 시작하는 뼈를 깍는 노력과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백숙으로 점심을 하는 중에 일찍 학원에 간 아들이 돌아왔고 식사도 거른 채 축구를 한다며 다시 나서는데 늦잠만 자던 방학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오후에 3월부터 수업할 교재를 정가의 70% 가격으로 인수를 받고 이후 성북동 학원에 나가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가 쉽지 않았다. 50대쯤 되고 보니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저 마다의 주관이 자리하고 있어 소통이 되는 경우는 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저녁에 학원을 마치고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신촌에 나가서 친구와 맥주를 마셨고 휘황찬란한 야경을 동무삼아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28일
아내는 오늘도 거실에서 자고 있고 나로서는 새벽에 시간 활용을 위하여 논술교실에 올라가고 싶었는데 한양상가 개방이 늦어 집에서 아침을 보냈다. 식사를 마친 뒤에 교회에 가면서 생각하니 요즘은 기도가 효험이 있는지 마음이 많이 편해졌고 오늘은 길까지 한산하여 휘파람이 저절로 나왔다. 교회에 도착한 9시에 예배는 시작되었고 단상 가운데는 변함없이 고일호 담임목사가 경건한 자세로 설교 준비를 하고 있다. 목사는 나와 동갑으로 젊은 날 신학을 전공하여 저기에 서 있고 국문학을 전공한 나는 잠시 후 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목사와 나를 비교하면 누구의 삶이 성공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인격이나 인간성 면에서는 날마다 참회하고 기도하는 그가 나을 듯싶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동일한 개체이기에 다만 절제하는 힘이 나보다는 더 크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 정도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엄숙하게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화여대 목동병원으로 형준이 어머님 병문안을 갔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간 것인데 뜻밖에도 중환자실에 계시어 병문안 시기를 놓친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잠시 후 달려온 친구가 역시나 임종 직전의 위급한 상황을 알렸고 뵙지도 못한 채 황망한 심정으로 병원을 나왔다. 12시경 집에 들렀다가 논술교실에 올라가 2시30분까지 일요일 수업을 하고 이어서 4시30분부터 B반을 진행했다. 12월부터 오늘까지 3개월 동안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을 최선으로 지도한 겨울 특강이었는데 지각과 결석이 많은 아들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생겼다. 3월이 오는 다음 주에 심화과정으로 고등학교 수업을 다시 하기로 결정을 했으니 깊이 있는 내용으로 정확하게 지도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집에 7시경 들어와 저녁을 먹고 TV를 보는 중에 긴장된 목소리로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는 친구 전화가 와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큰 일이 생기거나 급하고 긴장된 순간에는 주변에 가까운 사람을 찾는 법인데 친구도 어머니와의 이별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대 목동병원으로 들어서니 그의 가족들이 모여 이후의 일을 상의하고 있는데 아마 임종을 준비하라는 전달이 있었을 것이다. 황망해 하는 친구를 위로하며 늦은 밤을 병원에서 보냈고 3월이 먼저 와 있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