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개떡 선생』을 성원하며
강병철(소설가)
그는 8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신흥동 대동초등학교 뒷담을 벽으로 삼아 방 한 칸을 들였으니 초가삼간 둥지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을 가려서 비가 내리지 않았고 문을 달아서 바람을 막고 잠에 들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그 한 칸을 장지로 막아 두 칸이 되었고 언제부터였나, 도랑이 조금씩 사라지는 만큼의 집 공간을 시나브로 넓히기 시작했다. 살림집은 그대로인데 가겟방의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소녀는 ‘건어물 가게의 큰딸’로 변신하였다. 다섯 살이 되던 그해 겨울, 방문을 열자 방안으로 하얀 눈송이가 쏟아졌다. 그때 갓난아기였던 남동생이 눈발을 반기며 문지방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이다.
“위험해.”
안간힘으로 막다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자 갓난아기도 동시에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게 울음의 첫 기억이며 맏딸의 업이 되었다.
열여섯 섣달그믐 어느 저물녘, 고모와 이모들 대여섯이 안방 구들목으로 오그르르 모이더니 꽃띠 소녀로 몸피가 불은 그를 불러 앉혔다. 기실 고모들도 모진 아낙들이 되지 못했다. 아주 민망한 표정으로.
“고등학교에 가지 마라.”
예견된 사태였으므로 사춘기 소녀 또한 표정의 변화가 크지는 않았다. 가장 나이든 고모가 다시 조심스럽게.
“네 동생이 일곱 명이잖니?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네 남동생 두 명이 학업을 못하게 되니 네가 살림 밑천이 되어야 한단다.”
하지만 소녀의 눈빛에서는 찬바람이 불었다.
“고등학교에 갑니다. 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선생님이 될 거예요.”
어른들은 밥상 모서리만 만지작거리다가 오그르르 밖으로 나갔고 그날 밤 소녀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시울을 닦았다.
국립사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은 서슬 퍼런 5공화국 신군부정권의 음울한 사연의 점철이었다. 졸업정원제 반대 시위장에서 ‘스승의 노래’와 ‘어머니 은혜’ 그리고 양희은의 ‘아침 이슬’을 부른 죄(?)로 첫 번째 무기정학을 맞았다. 졸업 직전에 또 한 차례 징계를 받고 6년 만에 졸업을 했으나 의무발령에서 제외되었다. 공장생활을 전전하다가 87년 여름 충청지역 해직교사들이 차린 민주교육실천협의에서 서류를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다. 거기서 웬 해직교사 사내를 만나 둥지에 안착했으니 운명이다.
그들 부부 모두 도서관 안착 강박에 시달렸는데 특히 여자가 심했다. 자폐증처럼 매일 글자 수만 맞추다가 생김새까지 글자 모양을 닮아가더니 나중에는 아예 그 자리에서 증발되어 책속에 숨어버리기도 했다. 함께 간 남편과 식솔들도 당연히 찾지 않았다. 흔적이 궁금할 때마다 시립도서관 에어컨 옆 지정석을 찾으면 ‘책 보는 여자’라는 석고상을 만날 수 있었다. 식솔들 모두 도서관에서 책과 휴식을 만드는 동행의 과정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의 자식들 모두 미루나무처럼 쑥쑥 성장했으니 다행이랄까. 그리고 또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흐른 것 같다.
그가 네 번째 책을 상재한다. 장년의 어느 날까지 도서관 의자에만 등허리 붙이다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고 싶다는 결심을 했으니 기적 같은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늦깎이로 발간한 『아버지나무는 물이 흐른다(천년의 시작)』는 그해 우수문학도서가 되었고 연중행사로 출산된 『슬픔의, 힘(봉구네 책방』, 『영화를 여행이다(삶창)』 역시 그럭저럭 독자와 소통을 하게 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특히 이번에 출산되는 『안녕, 개떡 선생』은 그의 교단생활의 결산이기도 하다.
비로소 30년 교단을 명예퇴임으로 마무리했으나 퇴임식은 없었다. 현수막 하나 걸리지 않았고 마지막 회식도 당연히 없었다. 다른 날 일정과 똑같이 수업을 마칠 즈음 교정의 소녀들이 눈시울을 적셨으나 표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고 옷깃을 여몄다. 공문서를 처리하고 그해 이른 봄부터 가꾸기 시작한 텃밭을 둘러보고 표표히 떠났으니 다시 교무실에 들어갈 일을 없을 것이다. 이제 본격 글쓰기 작업에 입문하겠노라 숨은 그림의 결의만 굳히는 중이다. 『안녕, 개떡 선생』이 독자여러분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