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은사이시며 국무총리를 역임하신 현승종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기사가 났습니다. 아버지 같기도 하고 큰 형님 같기도 했던 교수님의 부음을 접하며 나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우리 59학번에게 교수님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유당의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일으킨 4.19혁명의 도화선인 고려대 4.18데모 때, 교문을 박차고 나가는 학생들을 두 손으로 막으시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 대모를 하는 학생들 앞에서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으시려고 간곡하게 해산을 종용하시던 현승종 당시 학생처장님의 참 스승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너무나 인자하신 은사님 모습이 80이 넘은 제 눈앞에 지금도 눈에 선하게 아른댑니다.
헌데 나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기억으로 처장님의 따스한 손길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교수님의 서거에 애틋한 조의의 말씀을 먼저 올리고자 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은 내가 대학 신입생으로 첫 등록금을 납부할 때 사무처 납부창구에서 새로 산 가죽가방 옆구리에 찔러 넣어둔, 아버지께서 어렵게 마련해 주신 피 같은 등록금을 도난당하고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울면서 당시 학생처장직을 맡고 계시던 교수님께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 드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처장님께서는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하시며 며칠 여유를 줄 테니 걱정 말고 고향에 내려가 등록금을 다시 준비해 추가등록을 하라고 등을 두드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입학금 납부창구에 가셔서 등록금을 납부하는 신입생들에게 도난을 조심하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고 ‘도둑이 많으니 등록금 도난 주의’라는 경고문을 써 부치셨습니다.
나는 곧장 고향에 내려가 모교인 예산농고 훈육주임을 맡으셨던 윤규상 선생님께 울면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윤 선생님께서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시며 예산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시던 둘째형님께 전화를 하셔서 동생이 등록금을 도난당하고 지금 이곳에 와 있으니 본정통에 있던 빵집으로 나오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깜짝놀래서 헐레벌떡 달려오신 형님께 윤 선생님께서 입학금도난 사실을 설명하시자 형님은 나를 달래며 '걱정말아라. 내가 어떻게 준비해 보마'하고 울고만 있는 나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당시 소위 일류사립대라고 일컫는 대학이 고려대와 연대였습니다. 예산 촌 읍에 위치한 우리고등학교에서 고대 와 연대에 각각 한명씩 두 명만 무시험으로 합격했는데 농업고등학교 토목과 졸업생으로 명문 사립대에 합격한 것은 학교로서도 영예로운 일이었습니다. 내 자랑하는 거 같아 쑥스럽지만 전교수석을 했던 나는 고대 정경대 경제학과에, 차석을 한 다른 친구는 연대 공대에 합격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늘 은행원 하나 자식 중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에 경제학과를 선택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은행원의 지름길인 선린상고에 합격하시고도 학자금과 기숙할 곳이 없어 합격을 포기하신 것이 한이 되셨다고 늘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나도 은행원이 되겠다고 경제과를 지망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전액국비인 대구사범을 나오셔서 교편을 잡으시고 당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어렵게 8남매를 가르치시고 결혼까지 시킨 후 정년퇴직을 하셨습니다. 우리 과에서 서울대에 합격한 친구가 몇 있는데 대부분 문리대나 사범대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장으로 교수로 출시세한 친구도 많습니다. 당시로는 법대와 상대가 최고 인기였는데 법대는 고등고시를 위하여, 그리고 상대는 은행원이 되기 위하여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경쟁률도 심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합격한 나에게 인생일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시골사람들은 순진하여 설마 대학등록금을 대학구내에서 도둑맞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형님도 대전사범을 나오셔서 아버지처럼 교편을 잡은 초등학교 교사이시라 목돈을 가지고 계시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제자 중 잘 사는 학부모님께 급히 거금을 융통하셨습니다. 당시 선생님 월급은 형편없이 작았습니다. 물론 형님이 융통하신 급전은 후에 아버지께서 갚아주셨다고 합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등록금으로 대학을 세웠다 해서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 등록금이 농촌의 재산목록 1호인 소 한 마리와 맞먹는다고 해서 세간과 학생들 사이에 대학을 막말로 '우골탑'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만큼 시골에서 대학을 보내기가 벅찰 만큼 큰돈이었습니다. 나는 형님이 며칠 걸려 어렵게 마련해 주신 급전을 들고 상경하였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현승종 학생처장님의 배려로 뒤늦게 등록을 무사히 마치고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4년간 고학으로 고생하면서 아버지가 보내주시는 등록금으로 학비는 마련했지만 숙비와 잡비는 가정교사와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여 받은 월급으로 어렵게 충당하면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시던 은행원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어 늘 아버지와 둘째형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TV뉴스를 통하여 현승종교수님 별세소식을 접하면서 60여년 전 등록금 도난사건이 제일 먼저 떠올라 이 글을 씁니다.
현승종 학생처장님의 온화한 미소가 떠올라 눈시울을 붉히면서 은사님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은사님 편안히 영면하시옵소서. (2020.5.26.) 지산
첫댓글 인간도 안 죽었으면 좋겠어용 ㅎ
하지만 그럼 재미도 없겠지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울작가님 글 잘 읽고 갑니다~
건필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