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나 유감스럽게도 6년을 왕복 50리길을 걸어서 읍내 상급학교에 걸어 다닌 내 체력이나 천방산의 정기를 받지 못하고 태어났는지 큰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태열과 천식을 달고 살아서 3살까지는 얼굴에 태열치료제를 하얗게 바르고 이 병원 저 병원 유명하다는 피부과와 내과는 다 찾아다녔지만 통혀 효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아픈 애를 들쳐 업고 병원을 찾아다니는 것이 일과였으며 아들에게 약을 지어 먹이거나 얼굴에 하얀 물약을 치료제로 바르며 새댁으로서 호된 엄마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몸이 안 좋으니 늘 징징대는 애기를 잠자는 때를 제외하고는 등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내 친구 중에서 별난 아기로 유명했습니다. 다른 애 두 명을 키우기보다도 더 어려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병주거리 아들을 어찌 키웠는지 아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합니다. 3년간을 피부병과 천식으로 고생하는 큰 아들 때문에 장모님께서 유명한 암자를 찾아 100일 기도까지 올리셨습니다. 첫 손주라 외가에서도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퉁퉁 분 얼굴과 여기저기 태열로 짓무른 피부를 보시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몹시도 안타까워 하셨고 한편으로는 얼굴이 짓물고 쌕쌕하는 천식소리 때문에 고생하는 애기 가여워 어찌하실 줄 모르셨습니다. 온양에서 올라오신 아버지께서는 속이 상한다고 식사도 뜨시는둥마는둥 하셨고 아내는 견디다 못해 울기까지 했습니다.
불광동 기자촌에서 살 때였습니다. 한 밤중에 아이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더니 숨이 막히는 듯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금방 숨이 넘어 가는듯한 쌕쌕 소리가 심하게 나서 나는 아이를 들쳐 업고 3km도 더 떨어진 연신내에 있는 송내과(후에 적십자병원장 역임)에 달려가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숨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비실이 아이가 3살도 안되어 한글을 읽어 동네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병원에서도 숨을 못 쉬면서도 벽에 걸려 있는 의사면허증을 쳐다보더니 “학위기! 위 사람은 의사시험에 합격하였음으로 의사의 자격을 부여함”이라는 글을 숨을 쌕쌕하면서도 읽어내는 아들을 본 의사는 “이 놈 봐라 글을 다 읽네”하고 신통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습니다. 기자촌에 살 때 1살 된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밥을 해주는 누나가 봐 주었습니다. 당시는 밥만 먹여주면 집에 상주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어린 소녀들을 두는 경우가 많아 나도 17세 된 처녀아이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도 천식이 너무 심해 초등학교는 6년간 학교 간 날보다 안간 날이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5살 때는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인 고려병원에 천식이 너무 심하여 5일간 혼자서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밑으로는 세살 두 살 먹은 동생이 있어서 아내는 집을 비울 수 없었고 나는 직장에 나가야 하니 낮 동안은 혼자 놔두고 밤에만 병원에 가서 아들하고 같이 잤습니다. 낮 내내 숨쉬기가 편하도록 어떤 기계(후에 생각해 보니 가습기)밑에 머리를 넣고 수증기를 맡게 하였습니다. 가래가 묽게 나오고 숨을 쉬기 쉽게 하는 기계였던 것입니다. 퇴근해서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아이가 어찌 그리 참을성이 많으며 똑똑하고 과학에 대해서는 통달한 애라고 과학자를 시키라고 칭찬이 대단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골골하며 콜록콜록하고 지내는 큰 아들이 미워 어느 날 5살배기 애기 뺨을 후려치며 뚝 그치라고 혼냈습니다. 밑으로 여동생이 3살, 막내가 2살로 거의 연년생으로 모두 애기인데도 아이들에게 가장 해로운 담배를 겨울에는 방안에서 무심코 피웠습니다. 아내는 그런 나를 원망했지만 골초인 나는 아들보다도 내 기호를 더 챙긴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애비도 아니었습니다. 천식에 가장 해로운 담배를 방에서 문을 닫고 피웠으니까요. 지금도 큰아들은 그 때를 기억하면 아빠가 참 원망스러윘다고 말하곤 합니다. 어려서 기억이지만 전혀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나 봅니다. 나는 얼굴을 들고 아들은 쳐다보기가 미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도 53살이지만 벤토린이라는 천식약을 수시로 목에 뿌려야 숨을 쉽니다. 직업이 교수이다 보니 성대를 많이 써야 하는데 천식 때문에 강의 도중에도 기침을 하고 가래를 몰래 뱉어내곤 한답니다. 머리가 좋아서 학력고사에서 이과 상위성적을 올린 아들을 보고 서울대 의대를 가서 제 건강을 보살피며 최고 신랑감이 되기를 원했지만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고 제 취미인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지금 IT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남들이 의사 아들딸을 두거나, 의사 사위나 며느리를 보았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시샘이 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동기동창 중에서도 한 사람은 딸이 의사이고 한 친구는 아들이 치과의사이며 시인이기도 한 한 친구는 사위가 의사인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와서는 제 지병 때문에 50여년을 고생하다보니 뒤늦게 서울의대를 갈 걸하고 가끔 후회한다고 말합니다. 기침과 가래도 심하지만 너무 어렸을 적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많이 맞아 뼈가 극도로 약해져서 나이를 먹으면 골반 뼈를 인공뼈로 갈아 넣는 큰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죄지은 사람처럼 나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스토레이드는 뼈를 약하게 해서 웬만하면 주사를 잘 안놔주려 하지만 그 주사가 아니고는 당장 숨을 쉴 수가 없으니 초응급조치로 그 주사를 놓아줍니다. 가난한 애비를 만나 효과적인 치료를 제 때에 못해 준 게 아닌가 싶어 내 자신이 부끄럽고 나쁜 아버지가 아니었나 뒤돌아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제 자식보고 “예이 이 빌어먹을 놈아'”하고 욕을 하지 말고 “예이 이 잘될 놈아”하고 혼내야 한다는 말을 책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내 친구가 쓴 글을 읽으며 엿가락을 몰래 먹는 아들보고 “야! 이 판서가 될 놈아” 하고 혼냈다는 그 어머니 훈육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도 집으로 찾아오는 큰 아들을 볼 때마다 우선은 의대를 안간 아들이 밉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5살밖에 안된 애기에게 “야 임마! 기침 안 그쳐?” 하고 방안에서 담배를 피며 5살 된 어린 아들의 뺨을 때린 애비는 애비도 아니라는 미안함으로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몇 번이고 후회하곤 합니다. 내 성격이 신경질이 많아서 사회생활에도 지장을 많이 봤으며 아내에게도 심심하면 빽하고 소리를 치는 내가 한없이 밉기도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신경질 없는 아빠이자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는 성질부리기보다 참고 격려하는 애비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와서야 내가 철이 드는 거 같아 입안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손주들에게는 절대로 큰 소리를 안 지릅니다. 83살이 되어서야 늦게 철이 드나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가 된다는 성현의 말씀이 백번 옳은 교훈의 말씀인거 같습니다.(2020. 6. 1) 지산
첫댓글 인간의 마음도 세상도 모두 변해가잖아여 ㅎ
작가님 언제나 좋은 글 공감합니다~
건필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