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99808D4B5C21D1431F)
친구(親舊)에 대하여
오경옥
1. 짧은 해후, 아쉬운 이별
아들 결혼식 전날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 찍혀 있었다. 전화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요즘 보이스피싱이나 TM전화들이 많아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한 통도 아니고 세 통이나 찍혀 있어서 아무래도 나를 아는 사람 같아 전화를 해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중학교 친구였다. 그사이 전화번호가 바뀌었던 것이다. 친구가 중학교 동창 밴드에 올린 나의 아들 결혼 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1박 2일 여행 가는 길에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보고가려고 군산에 들렸다는 것이다. 시내에 도착했기 때문에 사는 곳을 알려주면 5분이나 10분 정도면 갈 것이라고 했다. 순간 몹시 반갑기도 했지만 너무 당황되었다. 33년이라는 세월동안 간간이 밴드나 카페 등을 통해 소식을 접하거나 채팅 정도만 했지 전화로 자주 소식을 전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는 친척들이 와 있어서 번잡한 집으로 오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공자는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했지만 화장을 하지 않는 민낯으로 33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친구를 만난다는 것도 그렇고 처음 본 친구남편까지 만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청바지에 티 하나 걸친 채로 줄 것도 딱히 없어서 출간된 나의 책과 아파트 앞 가게에서 음료수 한 박스를 사서 기다리려고 하니 친구가 차에서 내렸다. 친구의 얼굴을 보니 당황되고 망설여졌던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친구남편에게 인사를 한 후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흔들며 반가움을 나누었다. 동창이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서 만났더라도 곧바로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나보다. 세월의 흔적이 눈가와 입가에서 빗살 져 흐르긴 했지만 날씬하니 중학교 때 그 얼굴 그대로였다.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식사시간도 아니어서 커피숍이라도 가자고 했더니 여행길이어서 얼른 가 봐야한다며 축의금만 주고 짧은 해후 속에 우리는 다시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친구를 보내고 나서 너무도 아쉽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카톡으로 마음을 남겨놓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면서 친구들이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나는 친구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친구의 의미와 우리들 인생에 있어서 친구란 무엇이며 서로에게 어떠해야 하는지 문헌을 찾아보며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2. 문헌 속의 친구이야기
친구(親舊)는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정답게 사귀어 온 벗이나 뜻을 같이 하며 친하게 지내온 오래된 사이나 그런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친구는 가족처럼 오래도록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소중한 사람이며 존귀한 존재로서 그 우정(友情) 또한 그런 친구와 오랫동안 쌓아오며 함께 나누어 온 마음의 정을 말한다.
친구와 관련된 사자성어도 찾아보니 참 많이 있다. 어릴 때부터 대나무 말을 같이 타고 놀며 자란 소꿉친구인 ‘죽마고우(竹馬故友)’와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 나서 기쁨에 겨워서 한 말로 마치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아주 친밀한 친구인 ‘수어지교(水魚之交)’가 있고, 서로 거스르거나 배반하지 않는 친구인 ‘막역지우(莫逆之友)’가 있으며, 금이나 난초와 같이 귀한 향기로움을 풍기는 다정한 친구 사이인 ‘금란지교(金蘭之交)’도 있고, 유안진 님의 에세이로 유명해진 지초와 난초와 같은 ‘지란지교(芝蘭之交)’도 있다. 또 춘추전국 시대에 제나라 사람이었던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 같이 서로의 처지를 알아주고 신뢰해주는 허물없는 친구 사이인 ‘관포지교(管鮑之交)’와 비슷한 시대 때 백아의 거문고 연주를 진정으로 이해해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다 끊고 그 후로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한 ‘백아절현(伯牙絶絃)’,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염파가 인상여의 출세를 시기하였다가 나중에 인상여의 넓은 인격에 감동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친구로 그 친구 대신 자신의 목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친한 친구의 사귐인 ‘문경지교(刎頸之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협력하면 단단한 쇠도 끊을 수 있다는 데서 나온 ‘단금지교(斷金之交)’도 있으며,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벗인 ‘망년지교(忘年之交)’도 있다.
친구의 우정하면 '오성과 한음'이라는 일화를 남긴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신인 이항복과 이덕형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들은 막역한 우정을 나눈 평생의 벗이었지만 호가 백사인 오성 대감인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은 구전설화집에 나온 것처럼 죽마고우는 아닌 듯싶고 망년지교나 문경지교에 가까운 것 같다. 왜냐하면 이항복이 다섯 살 위로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서로 교류하며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파는 서로 달랐지만 서로가 중립을 지켰고, 임진왜란 때에도 정치적인 역량과 기지를 모아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의 처형 등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고, 관직도 서로 비슷한 벼슬을 교대로 맡아가며 평생 동안 동고동락했다. 오성은 한음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한걸음에 달려가서 손수 염을 하고 장례를 주관하며, 묘지명까지 써 주어 벗을 잃은 비통한 마음을 남겼다고 한다.
친구라고 해서 오성과 한음과 같은 친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추사 김정희가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적 있었다. 유배지에서 극도의 외로움과 어려움에 힘들어하던 추사에게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북경에서 두 번이나 귀한 책을 구해 보내주어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때 그에 대한 답례로 이상적의 인품을 칭송하며 그려준 그림이 바로‘세한도(歲寒圖)’인데 이는 논어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이상적의 사제 간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안다”라는 내용이다. 물론 이상적은 제자지만 친구나 인간관계도 좋은 직장을 다니며 잘살고 건강할 때에는 많은 친구들이 모여 들지만 상황이 안 좋아져 변변치 않는 직장을 다니게 되거나 퇴직하여 경제력도 없고 몸도 아프게 되면 자연히 친구들도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G·애시비는 순경 중에는 친구가 우리를 알고 역경 중에는 우리가 친구를 안다 라고 했으며 역경은 친구를 시험한다고 했나보다.
친구도 인간인지라 여러 종류의 친구들이 있음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 청나라 시대의 서예가였던 정판교가 친구가 무엇이며 어떤 사람인지 스승에게 물었더니 스승은 네 종류의 친구가 있다고 대답했다. 첫째는 꽃과 같은 친구로서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것을 품에 안고 좋아하지만 그 꽃이 시들면 가차 없이 내버리는 사람이며, 두 번째는 저울과 같은 친구로서 무거운 물건처럼 자신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금방 숙이지만 가벼운 물건 같이 영향력 있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빳빳이 드는 거만한 이중적인 인물이고, 세 번째는 산과 같은 친구로서 관계를 맺으면 능력을 받아 높은 곳이라도 기꺼이 오를 수 있는 멋진 인물이고, 네 번째는 땅과 같은 친구로서 어렵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며 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은 하나의 씨앗을 심으면 100배의 결실로 키워내는 인물로써 소박하지만 가슴에 원한을 품지 않는 친구라고 말했다.
부익부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팽배해지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직장과 여러 조직사회에서 학력과 재력과 권력 그리고 명예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비정규직이나 3D업종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친구들을 경시하거나 멸시하는 꽃이나 저울 같은 친구나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공자 역시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운 벗과 해로운 벗 세 종류에 대해 각각 말한 바 있다. 이로운 벗은 ‘우직(友直)’으로서 곧은 벗은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며, ‘우량(友諒)’은 신의 있는 벗으로 나를 성실하게 이끌어주고, ‘우다문(友多聞)’은 아는 것이 많은 친구로 나의 지식을 확장시켜주는 유익한 벗을 말한다. 해로운 벗도 있는데 ‘편벽우(便辟友)’로서 편한 것만 좋아하고 하기 싫은 것은 피해 나를 나쁜 길로 이끌 수 있는 벗과 ‘선유우(善柔友)’로서 아첨하여 남을 기쁘게만 하는 불성실한 벗, ‘편녕우(便佞友)’로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번드레하게 말만 잘하는 벗이다. 이런 사람을 친구로 삼으면 그들에게 이끌려서 덩달아 나쁜 일에 휘말릴 수 있고, ‘근묵자흑(近墨者黑)’처럼 자신도 모르게 옳지 못한 생활들이 몸에 배어 정의로운 생활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어 나쁜 사람이 되기 쉽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 때 문학가였던 성현도 『부휴자담론』에서 벗에 따라 이해(利害)가 있으니 벗을 가려 사귀라고 했다. 따라서 어떤 친구들과 가깝게 사귀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미래지향적인 삶으로 달라질 수 있고, 친한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인품도 유추해볼 수 있으니 벗을 고를 때에는 한 계단을 올라가서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 후기 때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예덕선생전』에서 인변을 치우는 역부의 우두머리인 엄행수를 예덕선생이라 부르며 선귤자라는 스승의 입을 빌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고,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 없이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는 도의로 사귀는 것이라고 했다. 시공을 초월한 요즘 글로벌시대와 정보화시대에 알맞은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한 조선 후기 때 명문장가인 허균은 그의 스승 이달처럼 세속적인 양반 사대부들이 기피하던 인물들인 서얼출신이나 스님 같은 신분과 처지가 전혀 다른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 깊은 우정을 나누며 그가 이루고자 한 이상세계를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으로 펼쳐냈다.
로마시대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키케로는『우정에 관하여』라는 대화형식의 글에서 친구인 아티쿠스에게 ‘우정은 미래를 향하여 밝은 빛을 투사하여 영혼의 불구가 되거나 넘어지지 않게 해준다. 진정한 친구를 보는 사람은 자신의 영상을 보는 것이다. 우정이란 선의와 호감의 완전한 감정이며 가장 아름다운 덕성이고 가장 우선 시 해야 할 덕목이다’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우정에는 상호간에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했다. 여기서 이익은 상호간에 주고받는 필요나 욕구 같은 감정인 우애를 말하며, 이것은 우정을 나누는 타자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우애는 서로 유사한 미덕을 가진 좋은 사람들 사이의 우애이고 그 우정을 지속하기 위한 힘은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우정을 위해서는 좋은 친구들(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훌륭한 우정이 형성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정의 큰 행사를 치러보니 그동안 내가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아왔고, 그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고 어떤 존재였는지 깊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2018. 청사초롱 제 29 집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A894F5C21D186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