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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권두칼럼>
시적 상징성과 합리적인 형상화의 해법(解法)
- 이은무 시인의 담백한 시격과 관조적인 삶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고문)
1. 개아(個我)의 차별화와 관조적 삶의 담론
모름지기 책의 그늘이 넓고 깊어 피폐한 영혼을 정화시킬 뿐더러 감동의 회복과 미적 주권을 확립시키는 내적 충만의 그 적합성은 경이로움마저 안겨줄 것이다. 한편 충직한 독자들의 시선과 관심사는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홍천출생인 이은무 시인은 첫 시집 『낮은 소리로』(1986) 간행 이후 『하얀 거짓말』(2007)에 이어 근간에 15번째 시집인 『흰 까마귀의 시』(태원 2022)의 출간하였다. 특히 「시적 상징성과 합리적인 형상화의 해법(解法)-이은무 시인의 담백한 시격과 관조적인 삶」의 평설에 앞서‘흰색과 검은 까마귀’의 색조대비는 고정인식을 깨뜨릴 때의 변즉생에 의한 선명한 인상, 즉 아득한 감동의 울림이다.
보편적인 문화현상에서 ‘하얀 색조는 지순하고 신성한 상징성임’은 그렇거니와 각고의 노력 끝에 모처럼 간행한 시집평설에서 일단 까마귀는 단순히 죽음 이상의 사람과 하늘을 잇는 신성한 조류로 마법과 신비의 메신저 또는 새로운 영적 여정의 징조로 기독교에서는 지혜를 뜻한다. 여기서 ‘흰색→까마귀→시’라는 특이하고 치밀한 편집구도는 그 자신의 자서격인 「건널목」에서 “그게 말이야/그 아주 쉬운 게, 왜/이렇게//하지만,//하지만 말이야/하나로 가는 건널목의/내 시는,//거기”로 그만의 응축된 시적 변명은 자의적 은폐가 아닌 화해를 위한 타협의 로고스(Logos)다. 까닭에 「1부 너(20편), 2부 나(23편), 3부 우리(24편)」의 총 67편의 시편에서 이채롭게 ‘너→나→우리’의 삼각대위는 보편적인 ‘나, 너, 우리’라는 공 개념상의 이행이다. 무엇보다 화살표(←)를 새표(↢)로 해석하는 고정인식의 틀 깨기에 철저한 화자는 진정한 예언적 존재로 따뜻한 감성의 시인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의 시적 해법은 ‘한 마리의 새와 무근목(無根木)으로의 입증’도 그렇거니와 비정한 지식·정보사회에 몸담고 있는 충직한 독자들에게 ‘매혹적인 시인의 순수성과 존재성’의 감각적인 대응일 것이다. 모처럼 21세기 문화의 지역구심주의에 몸담은 대다수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이 대중매체의 폭발시대, 문화상대주의, 탈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시간대에서 포스트모던의 세대들은 사회정의와 민족, 그리고 역사라는 거대한 담론에 짓눌려있다. 한편 “이젠 아리랑고개로/님 마중이나//쭝뿔나다 보니/허리 다리가 너무 아프구나.(또 다시 랑리아)”의 예시처럼 우리의 시적 토양이나 정신기후의 조건에서 ‘극복할 허다한 과제들이 산적해있기’에 문화․환경적으로 치열한 물질주의에 떠밀려 경시되고 피폐한 정신세계는 문제의 여지가 있다. 기실 ‘한편의 시는 이념이나 논리이기 이전에 시적 형상화는 시의 본질이기’에 우리현대시학에서 그 공적의 크기와 깊이의 차별성에 일체의 거부감은 허락되지 아니한다.
그간에 확고한 정체성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 자신의 시적 수용성에 뒤늦게나마 실험적 시각에서 평자 그 나름의 접근성은 ‘오! 놀라운지고.’라는 삶의 일상에서 불현듯 만나는 신선한 감동으로 엄숙한 생명외경임에 틀림없다. 비교적 형식상 호흡이 길고 표현상 다소 풍자와 역설(逆說)의 양상인 시집의 편집구조는 「1부 너」(2편),「2부 너」(3편),「3부 우리」(4편)의 그물망으로 시사적 변화·발전에 경이감을 일깨워준 역주로 지대한 관심은 결코 별개일 수 없다.
각론하고 에밀 슈타이거(E. Steiger)는 서정의 본질을 회감(懷感)으로 정의하면서 ‘시인은 자연을 회감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고 제시하였다. 차제에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서정성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주체의 동일자적 욕망의 산물로의 인식이기’에 동일자적 욕망으로 타자를 응시함으로써 끝내 타자를 왜곡시킬 수 있는 점과 타자중심의 사유를 관통해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겨우 물길을 잡아 흐를 만하면/또 둑을 치는 무리들 있어/흐르지 못하는 강(흐를 수 없는 강)”의 보기나 또는 “달콤한 천국의 입을 딱 벌리고 기도와/헌금을 받아먹기나 하는/무능한 그를,/맹신으로 반증하는 꼴이지(반증反證)”에서 다소 현실적 상황을 페러디(parody)로 읊었을지라도 진정한 그 자신의 내면의식은 ‘한 순간의 격정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평정을 안겨주어 감미로운 심적 현상을 유지시켜주는 역동성’을 지닌다. 그나마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 찬찬히 생산적 결과물을 음미할 수 있음은 작은 축복으로 시 읽기의 행운에 맞물려있다.
2. 시적 교감과 관조적 삶의 담론(談論)
특히 호반(湖畔)의 도시인 춘천을 삶의 공간으로 삼아 활동하며 일상의 소일거리로 슬로라이프(Slow-life)적인 ‘느림의 미학’이랄까? 비교적 낚시터의 사념(思念)에 맞물린 시적 작위(作爲)로 정신작업에 종사하여 상이하게도 빛나는 존재감으로 담백한 시격을 투명하게 입증해주고 있음은 묵언의 응시로 새삼 관망할 일이다. 또 한편 롤랑 바르트는 “스스로 문학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문학일 따름이다.”라고 독자의 수용 가치를 언급하였지만 서정시를 쓰기가 힘겨운 현실에서도 피멍든 손으로 영혼의 닻줄을 움켜잡는 그 행위에 자랑스럽게도 비장감이 묻어있다.
이 같은 개아적인 일상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적 형상화로 일깨워주는 “우리 한마음 망치로/깨는 거야, 그 꿀단지를/묘한 꿀맛에 중독된 내가 너를/네가 나를 깨는 거야(깨는 거야)”의 보기나 “아서라/제발 좀 그만/잘 사는 맛에 중독된/아가리들아(거대한 지우게)”에서 언뜻 보고 지나치면 타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피 흘리게 하는 동물적이고 금속성언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지만 지극히 인간관계성의 층위는 상대적이기에 푸른 식물성 언어의 사용은 못내 소중하다. 비교적 시집에 수록된 67편중에서 형식상 다소 호흡이 긴 <예수를 대통령으로 해봤지만>, <변이 빨갱이>, <황금호박꽃으로 활짝 웃어라>, <그래>, <아니, 아니다>, <귀무덤>, <랑리아가 부르는 아리랑>, <지금 그 소년은>, <적과 혈맹의 분석>은 구분지어 지켜볼 시편이다.
모름지기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는 대다수 기성세대는 우리의 다음세대를 위하여 최소한 언어에 대한 분별력으로 아름다운 정신유산을 남겨줄 일이다. 까닭에 “천만에/그 새우는/너들의 미끼가 아닌/한민족의 자존 평화의 위력인/핵, 핵이다(미끼)”에서나 또는 “거기분단의 가슴 녹슬은 철조망/봄눈 녹듯이 녹아내리는가./방울방울 맺히는/눈물이다.(봄눈)”에서 확장되는 시적 상상력은 자연의 순차(循次)에 거슬림 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허성, 깨끗한 투명성, 어울림의 유연성, 그리고 기름의 융합을 거역한 공명정대한 물의 생리’를 삶의 순리로 수용할 것을 못내 일깨워주고 있다. 이 같은 해법의 합리성은 그 자신이 ‘불의 현상학’의 철인(哲人) 바슐라르의 “인간은 행복스럽게 숨 쉴 수 있도록 태어난 존재”라는 발상에 결부시켜 각박한 현재성에서도 ‘꿈 너머 꿈’이라는 시적 상상력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일상성은 매우 시사적이다.
각론하고 이념의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 암울한 현상에서도 ‘느림의 시학으로 채워 나아가는 정신작업의 종사자임’을 자처한 그 자신은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이다. 까닭에 생명의 언어로 깊은 마음의 심적 외상(trauma)을 치유하되 그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지극선(至極善)의 차별성은 보다 이채롭다. 그 같은 점에 있어 “큰 눈이/한반도의 모든 경계와/모든 이념을/온통 뒤덮고 지우눈가(대설특보)”에서나 또 “남과 북의 /모든 무기를/비로소 너와 내가 하나임을/짖어대는 망국식당의 개들도 일깨워서/우리는 한민족/적이/아님을(적이 아니다)”에서 비록 불행하게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그 비극적 숙명을 떨쳐버릴 수 없을지라도 열린 우주를 향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주도한 단군(檀君)의 후예임은 결단코 외면치 말아야한다.
차제에 21세기의 화두인 공동체의식의 소중함은 복효근 시인의 시집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에서도 극명하게 입증될 것이나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는 베이컨의 지론처럼 혼돈의 시간대에서 긍정적 사고로 위기를 극복하는 엄숙한 창조적 역할은 응당 수행할 바다. 아울러 모국어의 인식이 퇴조하는 현상에서 짧은 호흡의 단음조로 처리되어 존재감이 빛나는 “모든 것은 휘어지면서/동그라미로 굴러가는, 거//기쁨 슬픔 삶 죽음도/다 그런, 거(절대수평은)”의 예시나 “국경이 아닌/부끄러운 경계를 지키는/남북의 병사들이여/거기서 돌아서라(거기서 돌아서라)”에서 한글의 우수성이나 시적 묘미의 절대적 정조에는 비장감이 묻어있다.
또 하나 『25時』의 작가 게오르규의 “어떤 고난의 역사도 결코 당신들에게서 당신들의 아름다운 시와 노래와 기도를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라는 이 같은 역설에서 차오르는 자긍심을 자아성찰의 자세로 그 자신은 미덥게도 못내 수긍하는 현재성이다. 까닭에 “어디까지인가/우리 하나로 메타버스를 타고 달리는/미래의 어린것들을 멍히 바라보는/이 땅의 뿌리 깊은 나무여(무근목無根木)”에서 비록 목련이나 연화의 담백한 색조로 대비하지 아니하여도 ‘뿌리가 없는 막대기’는 회한(悔恨)으로 가슴 저리게 하는 그 비통함 뒤의 시작행위는 지극히 감동적일뿐더러 더 큰 ‘조선의 얼굴’을 발견하는 역사인식과 상상력의 확장에 결속되어 이채롭다.
비록 우리역사의 정체성이 외면당하고 열악한 국어교육이 홀대받는 현상에서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깊은 고뇌의 시간을 보낼 일이다. 까닭에 “지금은 안계시지만 새벽마다 식구들을 위해/힘겹게 태양을 굴려오시던 내 아버지의 손//그 고된 노동의 손들이 오늘도 아침의 문을 열고 있음이다.(아침의 문門)”의 보기나 “오직 통일의 뭉클한 한 수를/오래오래 장고하고 있을 때/아리아리게 부르는 랑리아의 속삭임은...(한반도바둑판 위에서)”에서의 보기처럼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가슴이 저려와 ‘아리아리 아리게’ 가장 한국적인 민요에 담아 그 자신이 맺힌 한(恨)을 읊어내기에,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조국의 정체성을 물어온다면 당당한 존재감으로 “나의 조국은 대한민국으로 세계 최고의 철학이 담긴 천부경(天符經)을 소유한 국가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조국으로 선택할 것이다.”라는 일념으로 분단의 좌절감을 자명하게 극기하는 점이다.
3. 사유의 기표(記標), 시 인식의 분할과 통합
모름지기 한 사람의 비공인 된 입법자로서 상처 입은 맑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생명외경의 존엄성과 결부지어 수행하고 있는 그 자신의 경우, 소멸하는 등불 앞에서 번뇌의 밤을 지새우면서도 「사유의 기표(記標), 시 인식의 분할과 통합」에서 지극한 관심사로 눈앞의 즉물 현상에 “참 딱한/시정잡배들보다 못한 것들이여/제발 개헤엄이라도/좀 배워라(좀 배워라)”의 보기처럼 이 땅의 사회지도자나 정객(政客)들을 향해 반어적인 역설(逆說)이나 풍자로 경계하고 있음은 묵언으로 응시할 점이다.
이처럼 그 자신이 즐겨 다룬 시편을 통하여 쉽게 파악되는 내면의식은 흐르는 물처럼 정체가 아닌 생명의 호흡이기에 “랑리아!/이건 아니지/오천년 한민족의 거울을 다시 보는 거야(경이로운 굴종)”이나 “저쪽 어느 모퉁이에서/또 다른 그 후손들이 위령제를열고 있어/눈물 핑 도는 고마움의 머리를 숙인다.(귀무덤)”에서 7년 전쟁 그 희생자의 잔혹사인 이총(耳塚)은 자기성찰의 확립문제와 맞닿아있다. 혹여 체험적인 사실성과 해석적 상상력의 조합에 의한 문장의 수사는 모남이나 거부감이 없다. 여기서 대니엘 고들립이 자폐증을 앓고 있는 외손자『샘에게 쓴 편지』글에서 “인간은 네모나게 태어나서 둥글게 죽는다.”라는 지적처럼 기교적 처리는 주지할 바다.
그렇다. “종교의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시간이다.”라는 파스(Octavio Paz)의 지적처럼 미로의 출구로 통하는 길과 출구 바깥의 세계는 모두 시간의 직선적 개념의 산물이기에, 그 자신 또한 “모든 골짜기선 원혼들이 일어나/아리아리 아리랑을 합창할 때/뜨거운 가슴의 실핏줄을 뜯는/랑리아의 손가락은 발갛게 멍, 피멍이 드는가.(랑리아가 부르는 아리랑)”에서 ‘아리랑’의 도치적인 기교(craft)를 작동시킨 결과물로 파악하고 있기에, 스키마(schema)로 저장되어있는 체험의 총체를 ‘겹겹의 철조망도 녹아내릴’ 애한을 읊어내고 있다. 또 한편 맥뮬런(R. Mcmullen)이 주장하는 현실로부터의 일탈(一脫) 또한 “핏줄이 자꾸만 당길, 때/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설, 때/이런 시를 써도 빨갱이가 아닐, 때/그, 때(때)”의 일례처럼 개념도 불투명한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대립구도가 극명한 사회현상에서 그 자신이 능란한 화가의 붓놀림으로 ‘풍자와 반어, 그리고 은유적 수사’를 적용해 도피와 화해의 원리를 모색하는 행위는 차별화된 그만의 매혹적(魅惑的)인 멋스러운 역동성의 일체감이다.
특히 그 자신이 생명적인 기표를 도구화하여 “지고 이김보다도 한민족자멸을/그도 알고 있는 것을/우리는 믿는다.(그건 아니다)”라는 확신만큼이나 응축된 시어는 푸른 생명의 언어인 연유로 상징의 숲을 거니는 존재로서의 ‘창조와 구현’이라는 이중구조의 양면성을 지님은 응당 지켜볼 바다. 일반적으로 ‘시인으로서의 조건’은 시인으로서의 품격을 어떻게 갖추고 있으며, 시를 쓰는 환경, 즉 객관적 조건인 역사, 사회, 시대 그리고 개인적 상태의 문제를 뜻한다. 이처럼 불투명한 이념의 대립과 갈등으로 암담한 절망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흰 까마귀의 상징성’을 좌표로 제시하며 그 공감대를 일깨우려는 시작행위는 못내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양상이다.
결론적으로 일관성을 지니고 더 큰 ‘조선의 얼굴’을 발견하려는 역사인식과 시적 상상력의 확장으로 분단된 조국의 현실적 정황을 절제된 언어로 살려낸 대응은 이은무 시인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 특이성과 일맥상통한다. 모쪼록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시키듯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타자간의 연(緣)을 되살려 지극선(至極善)의 일념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여 한국현대시사에 독자적인 ‘체취, 느낌, 사유가 응축된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하리라’는 확고한 기대감을 거듭 천명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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