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묻고 남편이 답하다(15) 만남 1 -5차 이산가족 상봉 전날의 남편 홍 오 선 꿈은 아니었구나 정녕 꿈은 아니었구나 아아, 세월이 가니 이런 기쁜 날도 있구나 반백년 오매불망 그리던 형님을 만나다니 가슴앓이 오십 년에 어머님은 잿빛 가슴 1년만 더 사셨으면....1년만 일찍 소식이 왔더라면... 어먼님 이젠 눈감으세요 큰 형님을 만난대요.. 어디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으라고 어딘가에 꼭 살아있다고 굳게 믿으신 어머니 어머니, 당신이 옳았습니다, 큰 형은 살아있대요 잃었던 오십 년 저쪽의 세월 돌려놓고 우리 모두 그때처럼 둘러앉을 한 울타리 어머님, 지켜봐 주세요 가슴의 한 풀어내세요. 아내가 묻고 남편이 답하다 52년간 큰아들을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가슴은 새카맣게 탄 채 94세를 일기로 한 많은 모정의 품을 닫으셨다. 몽매에도 못 잊으시던 장남이 1950년 6.25 전쟁 당시 22세로 홍익대 국문과에 재학 중 행방불명되셨다. 내 나이 14살 때다. 그로부터 52년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고향에서는 우리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누구도 큰 형님이 살아계시리라고는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이미 돌아가신 걸로 모든 가족과 친척도 믿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남편의 고향에 한번 가보았으면 좋겠다는 서울토박이 아내를 내 차에 동승하여 방산리 149번지의 폐가를 방문하였다. 오랫동안 비워 논 폐가가 된 집 뒤란은 잡초만 무성한 채 김장을 담가 놓았던 거대한 김칫독이 깨진 채로 그대로 묻혀 있고 장독을 받치고 있는 장독대에는 어머니께서 그 옛날 6.25때 행방불명되신 큰 형님의 무사를 칠성님께 빌던 귀 빠진 대접이 빗물을 담은 채 쓸쓸히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칠성님께 닿았는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남북화해 무드가 무르익고 남북이산가족상봉이 4번에 걸쳐 서울과 평양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던 2002년 7월 어느 날 나는 내 귀를 의심케 하는 넷째형의 전화 한통을 받고 펄썩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원아! 큰 형님이 사셨대~ 부모님과 형제를 찾는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나왔대~”하며 울음과 흥분이 섞인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텔레비전을 트니 진짜로 뉴스 속보가 계속 떴고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 149번지에 사는 아버지 어머니와 7남매를 찾는다는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찾는 7남매의 이름이 자막으로 생생하게 중계되고 있었다. 제 5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알리는 뉴스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흥분을 가라앉혔을 때에 퍼뜩 떠오르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큰 누님, 둘째형님, 이 네 분은 이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어 이 기쁜 소식을 들으실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큰 형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 기쁜 소식을 듣기 한 해 전에 큰 형님에 대한 그리움을 한으로 안고 9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나는 즉시 남산에 있는 적십자사를 찾아 이산가족상봉 가족임을 신고했다. 그리고 대전에 계신 셋째형에게 큰 형님 가족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도록 상의를 하고 북한 방문가족으로 셋째작은 아버지 내외분과 우리 3형제의 인적사항 등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미화 700불을 준비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딸라가 최고 인기라며 모든 남측 가족들이 제일 먼저 챙긴 것이 딸라다. 준비 품목으로 형님 가족이 입을 겨울 외투인 돕바와 일제시계, 내복, 양말 등 생필품과 함께 가족별 앨범 등을 챙겼다. 앨범에는 큰 형님이 공주고보 다니실 때 찍었던 추억의 사진도 챙겨 갔다. 큰 형님은 김종필 전 총리의 공주고보 1년 후배셨고 정석모 전 내무부장관과 동기이셨다. 공주고보 재학 시 나팔수와 기마도 하신 다재다능한 재원이셨다. 그리고 교장으로 계신 아버지의 권유로 잠시 대술초등학교 선생을 하시다가 서울에서 의료기 사업을 하시던 막내작은아버지의 권유로 홍익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 6.25를 맞으셨고 9.28 직후 후퇴하셨다는 소식을 끝으로 52년간 소식이 두절되었다. 그 때 형님은 22살이셨다. 모두가 전쟁 통에 이산가족이 된 아수라장속에서 돌아가신 줄 믿고 있던 가족들에게 큰 형님이 북한에 생존하시어 이산가족상봉을 신청하셨으니 형제들과 가족들이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9월13일, 남측 가족 455명은 관광선 설봉호를 타고 북한의 친지 100명을 만나기 위해 금강산에 도착하였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첫날 단체상봉, 환영만찬 등을 시작으로 4시간 동안 꿈에도 그리던 가족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우리 가족이 지정된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꼭 아버지를 닮은 키 큰 노인이 우리가 앉은 좌석을 지나쳐 뒤쪽으로 가고 있었다. 한 눈에 큰 형님을 알아 본 우리들은 “큰 형!”하고 소리를 질렀고 되돌아오던 큰 형님은 우리를 알아보고 성큼성큼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4형제는 서로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내가 선창한 ‘고향의 봄’을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고 52년 전 고향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너무 기쁘니 눈물도 나지 않았다. 22살에 행방불명되셨던 큰형님이 74살의 노인이 되어 52년 만에 만나는 순간이었다. 꿈을 꾸는 게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이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별로 기뻐하시는 표정도 아니고 퇴장할 때는 난데없이 '김일성장군 만세'를 부르셨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후에 생각해 보니 남한에서 월북하신 분이시니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으셔서 이를 캄프라치하기 위하여 일부러 더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척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맞을거라고 확신한다. ‘꿈은 아니었구나/정녕 꿈은 아니었구나/ 아아 세월이 가니/이런 기쁜 날도 있구나.’ 52년만의 돌아가신 줄 알았던 큰형님을 마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런 기쁨을 누리기에는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어머님 아버님의 주름진 얼굴이 자꾸만 눈물 속으로 오버랩 되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특히 1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1년만 더 사사셨으면..../1년만 일찍 소식이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통곡처럼 귓전을 울렸다. ‘어디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으라고/어딘가에 꼭 살아있다고/굳게 믿으신 어머니’. 문득 고향 장독대에서 본 귀빠진 대접이 눈물 속에 떠올랐다. 어머니는 형님이 살아계실 거라는 마지막 끈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한시도 놓지 않으셨다. ‘어머니 당신이 옳았습니다/ 큰 형은 살아있대요.’ 이제는 눈 꼭 감으시고 이승에서의 방황을 거두시라고 하늘을 향해 백 번 천 번 소리치고 싶었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우애심 많고 효자였던 우리 가정의 희망이자 대들보였던 장남. 마지막 눈을 감으실 때 주르르 흘러내리던 그 눈물이 큰 형님을 향한 간절한 소원이자, 애정이며 남은 자손들의 행복을 염원하는 한 줄기 열망이셨으니 이제는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으시고 먼저 가신 아버님의 영혼을 달래시는 간절한 기도가 돼 주시기를 바라는 막내며느리의 처연한 고천문(告天文)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금강산여관에서 개별 가족 상봉을 가지면서 가지고 간 선물보따리를 드린 후 장남으로서 제사를 올릴 때 필요한 아버지 어머니 영정사진을 넘겨드렸다. 그러나 아무 말씀이 없으시고 영정사진에 절을 올릴 생각을 안 하시기에 “형님, 절을 올리셔야지요” 하고 재촉하니 그제서야 마지못해 큰 절을 올리셨다. 지금까지도 왜 부모님 영정을 뵈우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는지, 그리고 왜 냉큼 절을 올리지 않으셨는지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어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 그 어수선한 피난길에서 북한까지 살아서 넘어가셨는지 제일 궁금하다는 넷째형의 질문에 큰 형님은 너털웃음을 웃으시며 “왜 내가 죽은 줄 알았니?” 이렇게 말씀하시곤 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 맏형으로서 줄줄이 아래인 동생들에게 이렇게라도 안심을 주고 싶으셨나 보다. 대학에를 보내주신 막내 작은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께도 고마움을 담아 순정한 눈길을 보내셨다. 형님이 주신 선물 보따리를 펴 보니 우리나라 1970년대나 만들었을법한 도자기와 책상보가 북한의 생활실정을 잘 설명해주었다. 생활수준이 짐작될 만큼 너무나 조잡한 물건들이었다. 가족 면회에서 제일 궁금한 것은 여관 어디엔 가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형님은 월북한 남한출신 최고급 인텔리였고 셋째형과 나는 고위 공무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날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이며 아름다운 호수인 삼일포에서 가족상봉행사를 가졌다. 똑같은 옷차림에 중절모를 쓴 남자와 반짝이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버스에서 내렸다. 점심식사 중 마침 YTN방송기자가 눈에 띄어 “이 환희의 장면을 기다리는 고향친지를 위해 한 장면 찍어 달라”고 보채자 카메라가 우리를 향했고 후일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이 감격적인 장면을 잘 보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오후에는 여흥의 시간을 가졌는데 기차놀이 같은 오락을 즐겼는데 보위부 직원으로 보이는 개똥 모자를 쓴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 쪽을 쳐다보아 작은아버지께서 입 조심하라는 눈짓을 주시어 가급적 말을 하지 않고 놀이에만 몰두하였다. 어디를 봐도 눈을 번득이는 북한 안내원들의 모습만 보였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15일에는 작별상봉이 있었는데 버스를 타고 떠나는 북한 가족들을 보며 남측 가족들은 한번이라도 얼굴을 더 보기 위해 버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이별의 슬픔을 나누느라고 서로 손목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너무나 애련했다. 어느 남측 가족은 떠나는 버스를 따라가며 엎디어 절을 하고 어떤 가족은 버스 창문으로 손을 잡고 같이 뛰다가 손을 놓지 자 그 자리에서 울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통곡의 이별현장이었다. 나도 버스창문으로 혹시나 형님이 보이려나 하고 기웃거렸더니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형님께서 버스가 출발하자 다른 사람을 밀치고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미셨다. 나는 버스가 출발하자 형님 손목을 부여잡고 “형님 건강하세요”하고 마지막 작별을 했다. 형님의 손이 내 손을 꼭 쥐고 잘 가라는 눈짓을 보내셨다. 왈칵 울음이 터졌다. 그게 형님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2박3일간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15일 금강산을 출발한 상봉단은 속초항을 거쳐 귀항했고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형님이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살아 계시다면 금년에 93세이시다. 의술이 좋은 남한 같으면 당연히 살아계실 나이시다. 큰 형님 소식이 궁금한 코로나19 펜더믹 속의 따뜻한 봄날이다.(2021. 4. 30) 시조시인 지산 <사진. 앞줄 왼쪽 방향으로 막내 숙부님 큰 형님, 필자, 뒷줄 오른쪽부터 막내 숙모님 네째형님, 세째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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