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창세기 2장 19-20a)
어느날 감자가 엄마에게 심각하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감자 맞아요? 당근이지! 그랬더니 감자가 가출을 했더랍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서요. 자기가 감자인지 당근인지... 한참을 지내다가 다시 집엘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할머니에게 물었데요. 할머니 저 감자 맞아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오이야? 그러더라는 겁니다. 이번에는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자기는 오이인데 자기가 왜 감자네 집에 있어야 하는지 몰라서요. 이름이나 호칭은 존재를 규정합니다.
저희 집에서 국사봉 가는 길로 가다보면 한정식 집이 있고 그 뒤로 가면 잣나무 숲이 나옵니다. 그쪽으로 산책을 하다보면 나무에 이름표가 달려져 있는 나무들이 있고 게중에는 자기 나무라고 예쁘게 나무 밑에 화단을 만들어 놓은 나무들도 있습니다. 누군가 돌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양시에서 새천년둥이라고 해서 2000년에 태어난 아이들 신청을 받아서 나무를 한그루씩 심었던 모양입니다. 나무에 이름표가 있으니 누군가에게는 의미있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나무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나무들은 누군가의 돌봄에 의해 키워지고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붙여진다는 것이 존재를 인식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생각하게 했습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아담이 동물들 하나 하나의 이름을 손수 지었다고 창세기 기자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는 기린이고 너는 코끼리고 너는 하마고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죠. 김춘수 시인이 이이야기했던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과 같이 뭔가 의미있는 존재로 인식했다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동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짓게 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은 단순한 존재가 아닌 특별한 존재입니다. 여기있는 화분 하나 하나 제가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지만 집에서 가만히 눈감고 상상을 그려보면 어떤 놈이 크기가 어떻게 상태가 어떻게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저에게는 거의 다 그려져요.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보십시오. 아기 코끼리입니다. 이 코끼리가 이 길 주변을 몇날 몇일을 일정한 시간동안 돌다가 가고 돌다가 가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확인을 해보니 이곳이 엄마가 돌아가신 곳이었다는 겁니다. 아기 코끼리는 자기 방식으로 슬픔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추모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인간의 관점에서만 자연을 바라보다보니 대상화되고 단순한 기계처럼 인식하며 살아가는데 예네도 존재 방식이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은 생명이며 부모가 돌아가시면 마음이 찢어지고 보고 싶고 그립고 때리면 아프고 힘들면 죽고 싶고 그런 가녀린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코로나 시대 이후 우리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나의 일방성을 내려놓고 비우고 자연을 환대하고 초대하면서 그 존재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하나하나 이름지어 그 존재를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본문의 하나님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하느님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