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령씨의 마지막 인터뷰를 보면서 오래 전 그분의 '단박인터뷰'를 떠올려 올려봅니다.
<남대문 화재시 이어령씨와의 ‘단박인터뷰’를 보고>
그분이 숭례문 소실을 殺身成仁을 한 것이라고 하셨을 때 무릎을 쳤다. 어렴풋하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무심하고 함부로 하는 이 나라 국민들을 보다 못해 다른 문화재를 위해 마치 혼이 있는 것처럼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화면을 통해 누각이 잿더미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마치 사람이 그 숨을 다하는 것처럼 보여서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희망의 끈이 있습니다. 잔재를 정리하면서 숭례문 건축에 숨어있던 비밀도 알아내고 그 얼은 불타버리지 않았으니 오히려 온 국민의 가슴에 더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절망에 빠져 있기보다 그 잿더미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귀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네 탓이다 니 탓이다 하고 비난과 싸움을 시작한 이들에게도 한 마디 하셨다.
'哀而不傷'
이 슬플 ‘哀’에는 단순히 슬프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절제할 수 있는 지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너무 슬퍼하는 나머지 상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상할 ‘傷’에는 물론 서로 비난하여 다 같이 상처를 입는다는 의미도 있다고.
역시 대표적 지성인이며 석학, 그리고 《흙속에 저 바람속에》를 쓸 만큼 이 나라, 이 땅 그리고 우리의 정서를 너무나 잘 알고 사랑하는 분답다 싶었다. 책임을 분명히 따지긴 해야겠지만, 그리고 이런 저런 원망이 없지 않지만 이 일을 기화로 서로 독설과 비난을 퍼붓는 정계 인사들과 잘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하던 차에 속이 좀 시원해졌다.
숭례문 화재를 두고 이어령씨가 보여준 해법은 참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으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을 우리가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우리의 크나큰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제시를 해준 단어, 哀而不傷!
허연 이빨 드러내며 분기탱천하여 이리저리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쏘아대는 모습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았다.
기실 남대문은 늘 거기 있거니 하며 너 남직 할 것 없이 관심도 없었다. 그저 무슨 행사 때마다 유서 깊은 역사의 한 상징으로, 화려한 야경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거나 할 때도 그냥 아름답구나 하며 무심히 봐 넘겼을 뿐이다.
남대문을 돌며 끝도 없이 꼬리를 물며 흐르는 자동차의 물결들도 언제 남대문을 의식이나 했을까.
차가 막히는지 안 막히는지 그것만 코앞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우리 모두의 무관심이 커다란 죄책감이 되어 무너져 내리던 잔해처럼 가슴에 화상을 입히는 것이다.
이어령씨는 죄책감도 갖지 말라 했다. 그렇다고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그 말이 오히려 가슴을 찔렀다. 나의 무관심이 수많은 무관심에 하나를 더 보태어 그 부피는 점점 커졌을 것이고, 그래서 남대문은 그만 자신을 지키고 싶지 않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기에 '哀而不傷' 정말 가슴에 담고 싶었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그동안의 나의 무심함을 남몰래 미안해하고 있던 터라 며칠 동안 알 수 없이 불편하던 마음이 비로소 편해지며 위로가 스며들었다.
안타깝게도 재건축이 시작되었지만 잡음과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이루는 일도 인간, 허물고 오염을 시키는 것도 인간이었다.
첫댓글 숭례문 하면 나도 75년 전에 얽인 기막힌 추억이 묻어 있어요.
그래서 전소하는 장면을 보면서 또 한 번 가슴을 쳤지요.
반성할 수 있는 글 매우 고마워요 시삽 희꽃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