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고 가장 위대한 진실을 찾고 있는가? 식물에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발도르프 학교의 미술수업, 2016, 190)."
슈타이너의 책은 일반적인 다른 책들하고는 많이 다르다. 한 두번 읽어서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읽는 사람의 정신의 수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인 듯하다. 다음 문장도 그렇다.
"가장 높고 가장 위대한 진실을 찾고 있는가? 식물에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 식물이 전혀 자신의 의지없이 하고 있는 것을, 그대는 그대의 의지로 하여라. 바로 그것이다(발도르프 학교의 미술수업, 2016, 190)."
식물은 에테르체만 가지고 생명활동만 한다. 그런 식물에게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처음에는그렇게 생각되었다. 식물이 자연에 순응하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바라본 수준이다. 위 문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위 문장은 '정신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이해가 가능하다.
인간과 식물의 공통점은 에테르체를 가지고 생명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 에테르체는 우리에게 말도 걸지 않고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식물에게 하는 것처럼 인간의 생명도 영위한다. 이런 에테르체에게 배울 것이 무엇이 있을까? 위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는 의지이다. 식물은 의지가 없고 인간에게는 의지가 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에테르체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가장 위대한 진실, 또는 그런 진실을 안다는 의미이다.
조금 더 풀이하면 만약 인간이 자신의 에테르체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면,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 가장 위대한 진실이 무엇인가도 궁금하지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에테르체를 자신의 의지로 움직여야 한다. 통상 정신은 자신이 그 수준에 갔을때에 비로소 이해하게 되지만, 이와 같은 글을 읽어도 이해할 수가 있다. 정신이 우주 에테르의 사고내용이고, 이와 같은 사고작업을 통해서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슈타이너의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도 같다.
이 사고작업이 에테르체의 작업이다. 에테르체는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생명작업만 여여하게 할 뿐인데 어떻게 사고작업을 하는걸까? 인간 에테르체는 인간이 탄생할때 우주에테르에서 편취해 온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때 편취해 온 에테르체로 생명을 유지한다. 생명이 끝나면 이 에테르체는 다시 우주로 돌아간다. 탄생과 죽음 사이 인간은 우주 에테르에 절대 접근하지 못한다. 만약 이때 편취해 온 에테르체에 문제가 생기면 여러가지 장애로 드러난다. 이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인데, 하지만 지구에 사는 인간이 이를 이해하기는 쉽지않다. 아마도 인간이 물리적인 몸에 갖히기 때문인 듯하다. 필자는 물리적인 몸에서 벗어나 우주에테르에 닿는 것이 정신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을 인간이 가진 에테르체에 의지를 부여해서 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식물처럼 우주법칙에 의해서 식물에테르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인간의 에테르체가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점, 첫째,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우주 에테르의 법칙이다. 이와 같이 인간도 움직여야 한다. 둘째, 인간의 에테르체도 이와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해야 한다. 즉 인간이 의지를 내되 우주법칙에 맞게 의지를 내라는 의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위대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나의 에테르체를 움직였을 때만 위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나의 에테르체가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므로 우주에테르가 인간의 사고내용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부를 할때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경험은 누구라도 하였을 것이다. 이 생각이 우주에테르에서 왔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공부가 어려운 이유도 우주에테르에서 사고내용을 가지고 와야하기 때문이다. 조금 위 문장에서는 인간이 탠생과 죽음 사이에는 우주에테르에 접근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또 우주에테르에서 생각을 가져왔다고 하니 조금은 의아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럴 수가 없는데 만약 우주에테르에서 가져올수만 있다면, 그것이 위대한 진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진실이란 우주에테르에 있는 사고내용이고, 그 진실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 즉 우주에테르에 닿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에테르체를 움직일 때에 그것을 안다는 의미이다.
어려우므로 필자의 경험을 여담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일을 하던지 그 일을 잘할려면 먼저 몸에 힘을 빼야 한다고 말한다. 통상 몸에 힘을 빼는데 삼년이 걸린다고 하기도 한다. 예컨대 운동선수(거의 전 분야)들도 몸에서 힘이 빠져야 비로소 운동 실력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 바로 말하면 본질자아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몸에 힘이 빠져야 한다는 말이다.
즉 몸의 힘이 빠져야 본질자아가 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에테르체의 힘은 나의 생명작용이 일어나는 모든 부분에 작동한다. 예를 들어 두뇌, 생명체계이다. 호흡을 하고 맥박이 뛰는 힘은 모두 에테르체에서 나온다. 이 에테르체는 나의 본질자아에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에테르체를 움직이면 본질자아를 움직이는 것이다. 식물이 생명작용을 유지하는 것처럼, 바로 그렇게 나의 생명작용을 유지할 때가, 에테르체가 가장 좋은 상황이다. 생각해 봤을때, 내가 무엇을 한다고 힘을 주면 에테르체는 온전하지 못하다. 에테르체는 우주법칙대로 움직여야 하고, 그런 에테르체에 본질자아가 연결되어있으므로 그렇다. 또 이 본질자아는 우주에테르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의지로 우주에테르에 닿아야 한다.
에테르체는 빛과 같이 반짝인다. 이 빛은 나의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다. 인간이 잠에서 깨는 순간이란 본질자아가 인간의 내부에 들어갔다가 다시 외부로 나오는 순간이다. 즉 본질자아는 -인간이 활동을 할 때는- 외부에 있다. (아스트랄체도 함께) 따라서 만약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면 외부에 있는 본질자아가 해야 한다. 에테르체는 빛처럼 반짝이면서 움직이고, 외부에 있는 본질자아도 이 에테르체와 같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본질자아가 할려면, 몸에 힘이 들어가면 움직이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힘을 빼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글 속의 문장에서 감동을 받는 것도 이와 같은 에테르체의 속성에 연결된 본질자아의 속성에 있다.
"공기처럼 가벼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기 시작한다(프란시스 파르, 1998, 청소년을 위한 발도르프 학교의 문학수업, 2016, 104)." 자신의 자아를 설명한 발도르프 학교의 10학년 여학생이 쓴 글이다. 공기에서 에테르체는 빛처럼 반짝이는 것을 받아들인다. 즉 공기에서 빛처럼 반짝이는 존재가 에테르체이다. 그러므로 에테르체는 공기처럼 가볍다. 이 에테르체에 본질자아가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나의 자아가 에테르체의 속성을 받아들이므로, 내가 감동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나의 에테르체를 감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에테르체를 감지해야 에테르체에 연결된 본질자아가 감동하는 것을 느낄수가 있는 것이다.
"양쪽 응원단이 함성을 지르고 야유를 퍼붓고 발을 구를 때마다 패스한 공을 상대에세 빼앗길 때마다 체육관 건물전체가 파르르 떨린다. 열정과 흥분으로 공기마저 짜릿하다(청소년을 위한 발도르프 학교의 연극수업, 2019, 109)." 즉 공기가 빛이고, 에테르체가 이 빛에 자극을 받는다. 빛에 에테르체가 반응을 하고, 본질자아에 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된다. 이것이 감동인 것이다.
덧붙이면 글을 읽고 특별히 감동을 받는 것은 나의 본질자아가 감동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놓치지 말고 -왜 감동을 받는지- 질문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본질자아로부터 답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렇게 답을 받았다. 이때 질문은 진실하고 어떤 이해관계가 있지 않은 순순한 물음이어야 한다. 즉 우주법칙에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식물의 에테르체와 같은 나의 에테르체를 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식물의 에테르체를 이해하고 느껴야 그렇게 할 수가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식물을 사랑하는 것이다. 정신은 사랑하는 순간 그 대상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슈타이너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물주위에 있는 것,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있는 것, 에테르적 과정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발도르프 학교의 미술수업, 2016, 137)." 식물을 가만히 자신의 생명의 힘에 연결하면, 즉 식물을 사랑하면 저절로 식물의 생명의 힘과 하나가 된다. 식물의 에테르체와 나의 에테르체가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사실은 원래 같이 움직이는데, 인간이 물리적 몸을 의식하므로 이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을 이해해야 사물의 본질을 이해한다. 그 작업이 사고작업이고, 우리가 하는 사고를 통해서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정신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본질에 다가갈 수가 있다.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그것을 나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한다. 달리 말하면 나의 본질자아를 내가 움직인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