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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애지초대석 유안진의 시
남의 이름처럼 불러본다
유안진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어지는 때마다
친구를 부르듯 내 이름을 부르면
산마루의 풀 이파리들이 파르르 대답한다
가까운 곳 찌르레기가 멀게 대답한다
풀 여치가 폴짝 나타나기도 한다
저녁 하늘 기러기 때를 보고 같이 가, 같이 가 하면
나중에, 나중에, 한다
여울물한테 나도 가, 나도 가, 하면
오지 마, 오지 마, 한다
한밤중에 일어 앉아 내 이름을 부르면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 음성으로 대답한다
다시 부르면 또 다른 목소리로 대답한다
세포 분열하듯 여러 목소리로 떠들어대다가
시끄러워 입 다물면 나 혼자가 된다
이렇게 나는 나랑 친구하고 논다
이렇게 나는 나랑 술 마시며 푸념한다
이렇게 나는 나랑 베갯머리 맞대고 누워 잔다
꿈에서도 나는 나를 제일 자주 만난다
---―유안진, {걸어서 에덴까지}({문예중앙}, 2012년)에서
좀 더 검어질 때까지
―유안진, 걸어서 에덴까지(문예중앙, 2012)
김나영
누군가는 홀로움이라고 표현했던 상태가 있다. 외로움과 홀가분함의 기분을 동시에 간직하는 이 단어는 유안진 시의 화자들에게도 제법 어울린다.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거의 자신의 자의식을 끝까지 밀고 간 개인의 고독한 자기 진술처럼 읽힌다. 그 고독은 너무나 지독해서 모든 색이 뒤섞여 소멸해버린 검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의 화자들은 그 검정의 상태, 한치 앞도 조망하거나 단언할 수 없이 그저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어둠의 상태를 노린 듯하다. 미리 말하면 그 상태에서만이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나의’ 삶이나 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안진 시의 화자에게 검음은 모든 것이 소멸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발산하는 지점, “백색 어둠”(「백색 어둠」)처럼 환하게 밝혀진 어떤 깊은 자리이다. 비록 그 지점까지의 행보가 고단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이 시집의 화자들은 기꺼이 그 발걸음을 스스로 재촉한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어지는 때마다
친구를 부르듯 내 이름을 부르면
산마루의 풀 이파리들이 파르르 대답한다
가까운 곳 찌르레기가 멀게 대답한다
풀 여치가 폴짝 나타나기도 한다
저녁 하늘 기러기 때를 보고 같이 가, 같이 가 하면
나중에, 나중에, 한다
여울물한테 나도 가, 나도 가, 하면
오지 마, 오지 마, 한다
한밤중에 일어 앉아 내 이름을 부르면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 음성으로 대답한다
다시 부르면 또 다른 목소리로 대답한다
세포 분열하듯 여러 목소리로 떠들어대다가
시끄러워 입 다물면 나 혼자가 된다
이렇게 나는 나랑 친구하고 논다
이렇게 나는 나랑 술 마시며 푸념한다
이렇게 나는 나랑 베갯머리 맞대고 누워 잔다
꿈에서도 나는 나를 제일 자주 만난다
―「남의 이름처럼 불러본다」 전문
자기를 스스로 호명하는 행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일단 자기를 스스로 지목하는 데에는 자신을 자각하는 일과 그 일의 결과가 함께 들어있다. 내가 ‘나’임을 확인하는 일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시작된다. 물론 사회를 구성하고 그 일원으로 살아가는 한 인간을 굳이 증명하자면, 그가 한 사회에 접하는 방식만큼이나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경험하듯이 객관적인 지표들로 증명되는 개인은 그만큼 표면적인 개인을 지시할 뿐이다. 사회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변모하면 할수록 개인이 속하게 되는 소집단이 많아지고, 개인의 정체성까지도 미분화됨으로써 개인을 호명하는 방식 또한 많아진다. 그리하여 개인은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먼지처럼 작아진, 소멸하고 있을 뿐인 자신 앞에서 자괴감이나 소외감과 같은 자기 부정의 기분을 느끼게 되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존감을 회복하려 애를 쓰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유안진의 시는 이렇게 질문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의 화자는 살아가는 일이 고단할 때마다 스스로 자기를 불러본다. “친구를 부르듯”이 다정하게, 혹은 간절하게 자신을 호명하는 일이 아마도 화자에게는 휴식과 위로의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풀잎이 흔들리고 풀벌레가 우는 일이 마치 자신의 부름에 응답하는 듯이 느껴질 때, 그 배음은 얼마나 고요하고도 고요해야 할 것인가. 풀잎과 풀벌레의 기척을 일종의 응답으로 여기는 마음도 그러하거니와, 그 기척들에만 둘러싸인 화자의 처지는 어떤 외부의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극도의 고독인 것만 같아서 그렇다. 하물며 기러기와 여울물에도 말을 섞는 화자의 의지는 어떤가. 그 의지는 철따라 떠나가는 허공의 새와, 하염없이 흘러가는 여울물을 대하는 그의 심정에서 더불어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고독함은 일면 현실에 대한 부정이나 부적응의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거듭 주목해야 할 것은 기러기나 여울물이 이 화자의 객관적 상관물로만 기능한다고 할 수만은 없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세포 분열하듯 여러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중인데, 따라서 그는 기러기나 여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분리되려는 태도까지도 함께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화자는 단순히 기러기나 여울물처럼 지금 여기를 떠나가는 것을 동경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같이 지금 여기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으로부터도 일종의 거리감을 유지한다. 정처없이 떠나가는 것들에게 동행을 요구하는 자와, 그 요구를 단번에 거절하거나 들어주기를 유보하는 자가 이렇게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나랑 친구하고 논다”는 저 화자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감추고 다시 찾아내는 놀이를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이것이 ‘놀이’일 수 있는 것은 그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저 화자는 몰두할 만한 무엇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몰두의 대상은 오로지 몰두하는 ‘나’에게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일종의 새로운 ‘나’, 놀이하는 주체를 존재하게 한다. 이른바 자신을 잃고 되찾는 그 일은 대개의 놀이가 그러하듯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될 뿐이지만, 바로 그 반복에서 고독한 개인은 한 순간이나마 하나의 의미 있는 주체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개인의 삶이 다만 하나의 놀이와 같다면, 혹은 놀이와 같다고 여겨진다면 어느 누가 그 삶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범박하게나마 삶의 진실 내지는 근원적인 의미라고 할 만한 그것을 한 순간이나마 노려볼 줄 아는 자만이 그 생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가령 자기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그럴 때마다 여럿의 다른 목소리로 자답하는 놀이가 고독을 심화하는 동시에 해소하려는 듯 반복되다가, 한 순간 스스로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정적이 감돌 때를 떠올려 보자. 자신의 목소리를 “시끄러워”하는 자는 반성하는 ‘나’이고 그때의 ‘나’가 맞이하는 고요는 태초의 그것과 같이 순정한 허무(虛無)의 순간과 같지 않겠는가.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그러한 기묘한 순간을 이 시의 화자에게 되돌려 준다. “이렇게”라는 말로써 화자의 것으로 보이는 한 개인의 행위와 반성의 과정을 반추하면서 ‘나’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해내는 동시에, 시야말로 순정한 허무의 순간을 통해서만 감지되었다 사라지는 어떤 것임을 암시하게 한다. 그리하여 저 “꿈에서” 만나는 ‘나’는 현실의 ‘나’가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는 형상으로서의 ‘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나’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로서의 그 ‘나’가 꿈속에는 있다. 꿈속의 ‘나’는 곧 현실의 ‘나’의 깊숙한 곳에 있는 존재일 텐데, 그 심연의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있는 그 ‘나’는 현실의 언어로서는, 이름을 불러서는 불러낼 수 없는 무명의, 기록될 수 없는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딴 나라 같고 옛 친구는 딴 세상만 얘기한다
내 집도 딴 집같이 서먹해서
남의 식구 같은 내 식구들이 손님처럼 드나든다
내 얘기를 내가 하면
남 얘기하는 줄로 알았다고들 한다
나도 자주 내가 남 같다
남이 한 말을 내가 한 말이라고 우기면
귀찮아서 그렇다고 해버린다
거울을 볼 때마다 늘 낯설고
내 목소리도 멀리 귀설게 들리곤 한다
남의 모습 같아서 대충 입고 대충 먹고 마신다
내 하루는 누군가의 일상이곤 한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을 남이 할 때도 많다
이 세상에 내가 굳이 필요한가
내가 꼭 나여야만 할 까닭도 없는 것 같고
버스에서도 앉아 있어도 서 있는 누구 같아서
다리가 뻣뻣 통증이 온다
―「나도 이상해진다」 전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나 제 귀에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은 흔치는 않지만 누구나 해봄직한 일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타인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때는 대부분 어떤 우울을 동반한다. 일상에서 반복되는 문제나 혹은 바람이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일 때 우울은 그 개인을 장악한다. 우울에 잠식된 개인이 보이는 특징 중 주요한 것은 아마도 무기력증이 아닐까. 무기력증이라는 전문 용어를 굳이 빌려 쓰지 않더라도, 그 증상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기가 싫은 상태, 모든 것을 지연하려는 상태, 그리하여 그런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어떤 시도도 미뤄두는 상태에 있는 자를 무기력하다고 흔히 말하지 않던가. 중요한 것은 그런 무력함이 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의 무기력함은 대개의 경우 사회적인 문제와 연관한다. 어느 개인에게든 이 문제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만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현실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그러니까 우울증은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하려는 심리로부터 발생한다고도 하겠다.
그런데 이 시를 읽어 보자. 이 시에서의 ‘나’는 지독하게 “뻣뻣”해 보인다. 이 화자는 타인과의 유연한 관계 맺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타인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할 주체를 망실한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라고 스스로 말할 때 획득되는 그 주체로서의 위치는 무엇보다도 ‘나’ 아닌 것들, 즉 타자를 대면하고 그와 관계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자리일 것이다. 그 자리에서야말로 반성과 같이, 자신을 대상화 하여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다. 같은 의미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획득한 주체는 ‘나’라는 자기 호명을 어색하게 여긴다. 자신과의 거리를 좀더 구체적으로 확보한 주체는 ‘나’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나’가 지시하는 존재 자체에 이물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말하듯 자신을 일컬을 수 있다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나타나는 화자의 관점이나 태도로써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당겨 말하면, 이 주체는 타자와의 일체감을 통해서 자신을 감각한다. 이 일체감, 즉 타자의 입과 다리가 마치 ‘나’의 그것들인 양 여겨지는 감각은 주체가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타자에 동화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이 시의 ‘나’는 ‘나’라는 의식에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로잡힌 나머지 그 견고한 의식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힘을 쓰다보면 다른 자세로의 변형이나 원래 자세로의 회복이 부자유스럽고도 불편해지듯이, 이 시의 화자는 ‘나’라는 의식에 지극히 몰두한 나머지 ‘나’ 바깥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당연한 일에서조차 유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 시의 ‘나’에게 타자와 세계는 모두 ‘나’로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 반대로도 가능할 것이라는 의심이 화자를 더욱 더 고립되게 한다. “이 세상에 내가 굳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은 아마도 그러한 개인으로서의 고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생겨나고 발설되지 않을까. 저 자문(自問)은 자신이 아무 데도 쓸모없을 것이라는 자책을 스스로에게 되돌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이 세상’과 견주는 자의 심연을 엿보게 한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를 누군가와 동일하게 여기기도 하는 이 시의 화자는 나를 제외한 모든 타자들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세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그곳에서의 철저한 분리를 통해서 ‘나’를 경험한다. 더불어 이 경험은 그 세계로의 애착이나 그로 인한 그리움 내지는 소외감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는 또 다른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일로 발휘된다. 이러한 특수한 경험이야말로 한 편의 시로써만 그려질 수 있는 삶의 비의 같은 것이 아닐까.
동물인 내가 동물인 나를 바라볼 때를
동물인 내가 인간인 나를 바라볼 때를
인간인 내가 인간인 나를 바라볼 때를
인간인 내가 동물인 나를 바라볼 때를
고양이가 동물인 나를 바라볼 때를.
―「나를 추상(抽象)할 때」 전문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에서 쓴 수기는 소위 ‘의식 있는 자’는 스스로를 매 순간 끊임없이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조차 존중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물론 그 이야기는 그 소설의 일면만을 담당하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소설이 오래도록 다시 읽히고 거듭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바로 그것이 자의식에 관한 이야기라는 간단한 사실에 있을 것이다. ‘지하’라는 어둡고 축축한, 감춰지고 억눌린, 때로는 그저 버려져 잊힐 뿐인 그 공간을 흰 종이 위로 끌어올려서 ‘의식’이나, 혹은 자연법칙처럼 다뤄지는 현실 사회의 상식과 맞서게 하는 이 소설의 심리적인 기술은 유안진이 시에서도 흡사하게 발견된다. ‘나’라는 명백한 존재를 스스로 대상화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라는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은 또한 ‘나’일 수밖에 없다는 그 불가피한 사실이 유안진 시의 화자들을 자발적인 고립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가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런 유안진 시의 화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을 대상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태도는 이 시집 속에 가득하다. 특히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그 특유의 태도가 가장 추상화되어 나타난 시가 바로 이 시가 아닐까 한다. 동물과 인간을 양분하고, 그 양쪽에 ‘나’를 위치시키면서 입장을 이동해 보기를 시험하는 이 시의 화자는 결국 인간도 동물도 아니고, 인간의 눈에 비치는 동물이나 동물의 눈에 비치는 인간도 아니다. 동물과 동물의 관점, 인간과 인간의 관점을 각각의 항으로 놓고 함수식으로 계산된 저 단순한 입장은 화자의 의식이 마련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물론 그 모두에 화자의 관점이 개입되어 있다고, 즉 그 입장마다에 화자가 위치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을 극도로 단순한 도식으로 드러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의 화자가 그 모든 관점에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의 ‘나’는 동물과 인간 모두로부터 벗어난 자리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이 특수한 자리를 상상하는 일는 마지막 행인 “고양이가 동물인 나를 바라볼 때”에서 짐작되듯, 고양이도 동물도 나도 아닌 다른 존재가 위치하는 방식을 헤아리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고양이와 마주보고 있는 화자를 떠올려 보자. 인간인 나는 동물인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입장을 바꿔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고양이가 되어서 혹은 동물이 되어서 자신을 혹은 인간을 바라볼 때를 떠올려 보는 일이 곧 ‘나’ 자신을 가장 추상화하여 바라보는 방식이다. ‘고양이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일’ 양쪽 모두 실상은 ‘나’라는 존재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서로 다른 입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시의 모든 “때”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나’의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는 관점으로 ‘나’를 관조하는 듯한 저 태도야말로 이 시가 그려내고자 하는 ‘나’라는 추상의 기이함일 것이다.
유안진의 많은 시들에서 드러나듯이, 시의 화자들은 본연의 ‘나’ 혹은 ‘나’의 정수(精髓)를 만나고, 오로지 그 자체로서 세계와 대면하기 위해 어둠에 가까운 고독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것은 이처럼 자신을 “추상”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추상이란 궁극에 이르러 ‘나’를 없애는 무아(無我)의 지경일지도 모른다. ‘나’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야말로 ‘나’를 바로 보고 만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유안진의 시를 관통한다. 더불어 그의 시에서 그 ‘때’들은 이렇게 연속된다.
보아도 못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할 때까지
아픈 마음 아프지 않을 때까지
마음이 없어져버릴 때까지
몸도 없어져 발만 남을 때까지
발이 발인 줄도 모를 때까지
걸으면서 걷는 줄도 모를 때까지
걸어서 에덴까지
낡은 지팡이 하나로 우뚝 서버릴 때까지
지팡이에 싹 돋아, 금단의 사과 꽃필 때까지.
―「발에게 맡긴다」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모든 것을 “발에게 맡긴다”고 말한다. 인용하지 않은 부분에서 화자는 “나는 살기 위해 길을 간다”고 말하는데, 길을 가는 데 소용되는 모든 의지와 감각을 발에게 맡긴다는 것은 삶의 조건과 목적을 모두 발이 가는 대로 하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 시집에 실린 유안진의 시를 모두 읽어본 자라면 그의 화자들에게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아마도 ‘시’를 짓는 일일 것이다. 유안진 시의 어떤 화자는 너무나도 직설적으로 이를 표명하고 있어서, 살아가는 일이 곧 시를 짓는 일과 같다는 말은 그의 시에서라면 더 이상 은유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나’는 머리와 가슴이 하는 일들에, 즉 이성적인 판단과 감성적인 직관에서 ‘나’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고독하게 방황하는 존재이다. 유안진의 많은 시편들에서 그려지는 그와 같은 ‘나’를 찾는 일, 혹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갈급함은 이제 ‘발’에게 맡겨진다.
발은 길을 먹는 존재일 뿐이라서 무언가를 자꾸만 깨닫는 머리나 자주 병나는 마음과는 다르다. 이러한 발에게 자신의 길을 맡기겠다는 말을 곧 몸이 가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몸이 가는대로 살겠다는 것은 단순한 욕구에 따라 살겠다는 말과는 다르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유안진의 화자들이 궁극에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진실된 ‘나’일 텐데, 몸이 가는대로 사는 일은 무엇보다도 그 ‘나’로서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수하게 분열하고 다양하게 변모하는 ‘나’의 의식과 감각 속에 감춰진 그 특별한 ‘나’의 상태로만이 발이 가는 대로 삶을 살 수가, 혹은 시를 쓸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몸도 없어져 발만 남을 때까지/ 발이 발인 줄도 모를 때까지/ 걸으면서 걷는 줄도 모를 때까지”에서 보듯 이 발은 몸에서도 분리되어 이 시의 화자를 이끄는 동력원이 된다. 앞의 시에서도 나타난 그 무아의 지경이 바로 이 몸 없는 발의 상태이다. 즉 유안진 시의 화자는 무아의 지경을 만나고자 하고, 그런 상태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희망하는 자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어떤 외로움에도 더 외로운 외로움이 있”다는, “죽음보다 더 죽음 되는 것이 살아내는 것”(「피뢰침, 죽을 힘으로 산다」)이라는 화자의 진술은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지독한 애착의 역설이다. 이 시집에서 유독 “검은” 것에 대한 화자의 집착이 드러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화자들에게 일관되는 관점은 “한 순간에 세상을 제압해버린 검은 힘/ 시끄러운 것들에 고요와 침묵을 가르쳐주는”(「정전사고」) 것이 곧 유일무이한 ‘나’로서 무아지경의 한 순간으로 통하는 빛이라는 데 있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기습당하는 일과 같은, 어떤 사고처럼 공포를 동반하여 엄습하는 자각이야말로 유안진의 이 시집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다. 유안진의 시는 스스로 점점 더 검어지기 위해서 거듭해서 쓰이고 있다. ◇
김나영
-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당선 등단.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