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가 쓴 상형문자를 해독하다
김태헌
갈꽃이 소슬바람에 나부낀다. 설핏 기운 하현달이 파리한 달빛을 무량으로 풀어내고 차가운 이슬이 대지를 적신다는 한로(寒露). 어두운 밤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목쉰 소리가 애처롭다. 고개 들어 쳐다본 하늘에는 별들이 말긋말긋하고, 무리 지어 나는 기러기 떼가 상형문자로 수묵화를 그리고 있었다. 철부지의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그해 겨울, 기러기에게 미안했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유년의 기억 저편에서 기러기가 놀라 아우성치던 소리가 아직도 마음 언저리를 불편하게 서성인다.
주황색 노을이 곱게 물든 하늘에 기러기 떼가 펼치는 군무는 장관이었다. 기러기의 모습은 어린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ㄱ자 대형으로 줄지어 나는 모습이 신비로웠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날 때도 반드시 무리 지어 함께 행동하였다. 들판으로 내려와 떨어진 곡식의 이삭을 먹거나 보리싹과 풀을 뜯어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석양 무렵이면 안전한 잠자리를 찾아 선회비행을 했다. 땅거미가 검실검실 몰려오는 개와 늑대의 시간, 수백 마리의 기러기가 들판의 이곳저곳에 내려앉아 고단한 날개를 쉬고 선잠을 잤다.
석양 무렵에 나는 기러기 모습을 보면 아련한 추억이 그리움처럼 스친다. 겨울이면 사냥꾼들이 엽총이나 공기총으로 꿩과 멧비둘기와 새를 사냥하였다. 땅 위에 사는 동물보다 날짐승의 고기가 훨씬 맛있다는 풍문이 널리 퍼졌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다. 친구의 형이 대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로 상수리나무에 앉은 야생에서 사는 꿩을 잡았다. 다음 날 친구와 기러기를 사냥하자면서 여러 방법을 궁리했다. 잠을 잘 때 살금살금 기어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많은 기러기 중에서 한두 마리 잡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어린 호기심을 자극했다.
겨울은 빨리 어두워졌다. 추수 끝낸 논바닥에는 탈곡한 볏짚을 군데군데 낟가리로 쌓아놓았다. 친구와 기러기를 잡으러 간 날, 땅거미가 서서히 밀려들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때, 기러기 두세 마리가 잠잘 곳을 찾으며 들판을 둘러보고 날아갔다. 잠시 뒤, 한 무리가 떼를 지어 날아오고 이어 다른 무리가 날아드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너른 들판에 가득한 기러기 소리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논 가운데의 볏짚 무더기에서 볏단을 몇 개 꺼낸 뒤, 빈 곳에 몸을 숨기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하늘에 초승달이 뜨고 개밥바라기별도 얼굴을 내밀었다.
저녁이 깊어져 가고 눈 내린 들판에 녹지 않은 잔설이 있어 어슴푸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추워져 오들오들 떨렸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 어림잡아 여덟 시쯤으로 짐작하였다. 기러기들도 잠이 들었는지 사위가 조용했다. 친구와 납작 엎드려 몸을 최대한 낮추고, 소리 나지 않게 포복하듯 조금씩 기어갔다. 기러기에게 들키지 않으려 살금살금 기어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논바닥은 차가웠고 맵찬 바람결에 귀가 에이듯 추웠다. 숨죽이며 10미터 정도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갑자기 “끼룩끼룩”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팽팽한 밤공기를 갈랐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기러기들이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고요하던 들판에 수백 마리의 아우성이 밤공기를 휘저었다. 파닥거리는 날갯짓과 놀라서 내지르는 소리가 난장처럼 어지러웠다. 혼비백산한 기러기 떼가 떠나고 달무리 진 밤하늘에 먹구름이 점점 밀려오더니 이내 눈발이 날렸다. 기러기를 잡지 못하고 허탕 쳤다는 생각에 찜부럭이 났다.
춥디추운 곳에 오래 있어서인지 온몸이 꽁꽁 얼고 손가락과 발가락에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곱은 두 손을 빠르게 비비며 마찰시켜도 소용없었다. 사시나무 떨듯 윗니와 아랫니가 장단 맞춰 딱딱 부딪쳤고,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온몸이 달달 떨렸다. 벌게진 볼을 비비고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어도 온기 잃은 몸이 더워지지 않았다. 분분하던 눈발도 잠에서 깨어난 바람결에 어지러운 춤사위로 흩날렸다. 넋이 나간 듯 시르죽은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걸었다.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고추바람에 전깃줄이 윙윙 우는 소리도 처량하게 들렸다. 못내 아쉽고 허탈함에 지드레기가 나고 기운이 빠졌다. 지청구가 걱정되어 발걸음도 주춤거렸다.
집에 난리가 났다. 동생들에게 행방을 물어도 모른다고 하고, 저녁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가 남포등을 켜서 사립문에 걸어놓으셨다. 방안의 따뜻한 불빛이 창호지 바른 장지문 밖으로 여리게 흘렀다. 인기척에 방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흙으로 범벅된 옷과 추레한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께서 웃으시더니 “강시(僵屍) 나게 추웠는데 살아서 다행이다. 냇물이 얼면 기러기와 물오리 다리도 꽁꽁 얼어 날지 못한단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낫을 들고 가서 베어오면 기러기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오늘은 푹 자거라.”면서 혀를 끌끌 차셨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 효도하려다 얼어 죽을 뻔했네, 기러기는 잠잘 때 보초를 세운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금방 알아차리고 소리 내어 무리를 깨우기에 잡을 수 없단다.”라고 알려주셨다. 진즉 알았더라면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헛심만 썼던 어리석음에 풀이 죽었다. 그날 밤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 주섬주섬 옷 입는 것을 보고 어머니께서 “이른 시간인데 어딜 가려고 옷을 챙겨 입냐?”고 물으셨다. “낫으로 오리 베러 가려고요.”라고 대답했다. “오매, 큰일 났네.”라고 놀라시더니 손뼉을 치면서 한바탕 크게 웃으셨다. 영문 몰라 쳐다보자 “기러기 다리가 얼어붙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구나.”라고 하셨다. 해맑은 호기심만 가득 품었던 동심의 짧은 생각이 아팠다.
달무리 지고 눈 날리던 겨울밤, 단잠을 깨운 철부지의 행동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머나먼 여행길에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 고단한 날개를 접고 풋잠조차 편히 잘 수 없는 야생의 삶. 그해 겨울처럼 창밖에 퍼르퍼르 눈발이 날리고, "끼룩끼룩” 기러기의 힘겨운 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기러기가 쓴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문장을 이해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기러기를 볼 때마다 반성문을 쓴다. “그해 겨울, 놀라서 소리 지르던 기러기야, 미안하구나. 너무도 미안하구나.”
겨울이면 아스라한 추억의 뒤안길에 서성이는 기러기의 모습. 저토록 아름다운 석양에 쉴 곳을 찾아 힘겹게 나는 기러기가 애처롭다. 작은 동물이지만, 번갈아 리더를 맡아가며 협동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가 놀랍다. 삶의 터전을 찾아 지치고 험난한 여행길을 오가며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기러기가 쓴 상형문자는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되어주는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나는 기러기 소리를 들으면 마음조차 숙연해지는 이유다. 삶이란 이토록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애틋한 아픔이었던가. 오늘 밤도 고단한 순례자가 여행길에 수묵화를 그리는가 보다. 초승달이 진 밤하늘에 깜박 졸던 별 무리가 기러기의 목쉰 소리에 깨어 초롱초롱 빛난다. 아득히 저 먼 곳을 꿈결처럼 지나가는 기러기의 목쉰 소리가 또랑또랑 추억을 두드린다.
- 2023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선정〈아름다운 언어 문학상〉수상 -
첫댓글 오늘 읽어보는군요 기러기는 하늘을 날며 서로 뒤쳐지는 놈이 하나도 없이
비행속도를 잘 조절한다고 해요
어린날의 일기장을 보는듯 순수한 소년의 모습을 만납니다
뛰어난 감성, 언어문학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움이 머물던 들녘을 자주 떠올립니다.
어린 시절의 아득한 추억이 그립습니다.
하하. 제 마음과 비슷하시군요.
철 모르던 어린 시절에 시도했던,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야생동물 사냥이지만
그 때의 그 동물들을 불안에 쫓기게 만들었던 미안함이 저도 선생님과 비슷합니다.
메뚜기, 개구리, 까투리, 참새, 미꾸라지,가재 등등... 그 때는 왜 그렇게 그들을 괴롭혔는지...ㅎ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수상 축하드립니다.^^
철부지 때 날뛰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무모한 만행으로 괴롭혔던 지난 날을 반성합니다.
그들도 소중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