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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색
나도 모르게 손을 뻗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다. 마치 내 머리를 만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본능에 사로잡힌 그 순간 누군가가 내 눈빛을 봤다면 알아채지 않았을까. 숨길 수 없는 그 욕망
을.
한 계단 아래 앞좌석에 앉아 있는 여인의 빛나는 머릿결이 자꾸 시선을 붙든다. 정수리 뒤쪽에 얌전히 자리한 하얀 가마를 중심으로 탄력 있는 머리카락들이 가지런하고 풍성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건강한 머릿결이었다. 아니 푸르게 빛나는 젊음이었다.
어쩌면 그 머릿결을 만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까마득히 멀어진 내 젊은 날에 닿고 싶은 것은 아닐까. 마치 ET처럼 손끝으로 만지기만 하면 내게도 그 젊음이 물들기라도 할 것처럼.
언제부터인지 반짝이는 머릿결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만지고 싶은 마음을 지그시 누르곤 했다. 내 머리카락이 탄력도 윤기도 잃은 후의 일이다. 손끝으로 그 감촉을 확인해 보고 싶은 무의식적인 끌림이라 해도, 어떤 아쉬움이라 해도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은 자제력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데….
머리카락은 여인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자기애自己愛는 머리카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젊은 아가씨들이 길게 머리를 기르는 일, 수시로 그 머리카락을 손아귀에 잡고 쓰다듬는 것이나 돌돌 말기도 하는 광경을 어디에서건 자주 본다. 마치 자기 자신을 애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공연히 머리를 쓸어 올리기도 하고 가슴께로 흘러내린 긴 머리를 뒤로 넘기는 모습에서 알수 없는 만족감을 엿보곤 한다. 그만큼 길고 윤기 흐르는 머리털은 젊음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은발을 지닌 사람을 더러 만나면, 이제는 그 모습을 부러워 한다. 희거나 검거나 어쨌든 머리카락은 풍성해야 하는 모양이다.
숱이 많고 힘이 있으면 색깔에 관계없이 아름답다. 거기에 더하여 안색이 건강하고 피부가 곱다면 은발은 더욱 빛이 난다.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늙는다는 것은 세포 하나하나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머리카락이라고 예외는 없다. 힘도 없어지고 다시 나는 것보다 빠져나간 머리카락이 더 많으니 성글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빛나는 윤기도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직장만 그만 두면 염색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도 겁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이상한 통념,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사람은 꽃처럼 젊고 풋풋해야 한다는 오랜 편견에 혼자 힘들어서 누가 뭐라는 것 같아 불안하고 민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그만 두고 나니 또 다른 핑계가 생겼다.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는, 뒷방노인 신세가 된 데다 머리까지 희끗희끗하면 더욱 초라해 보일 것이라는 자괴감이었다.
실제로 귀밑이나 이맛전에 쭝긋쭝긋 올라온 흰머리는 아무리 봐주려 해도 마음에 안 들었다. 어쩌다 따로 삐져나와 유난히 빛나는 흰 머리카락 한 올 조차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보기 싫었다.
전날의 다짐은 어디로 가고 흰 머리카락을 찾아 공략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빨리 돋아나는 귀밑머리, 오른쪽 머리 일부에 마치 외인부대처럼 무리지어 올라오는 흰 머리카락들을 발견즉시 일분염색약으로 물들여 버리곤 했다.
젊은 시절, 만나던 사람은 미국 가곡 '은발'을 즐겨 불렀다. 우리가 은발의 때를 맞이하리라는 예상은 거의 관념일 뿐 실감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머리는 유난히 검었다. 우리는 서로의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한 채 헤어져 은발이 된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때는 내 머리도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던가. 어느 날, 무심코 빗을 꺼내 그의 앞에서 머리를 빗었다. 머리카락에서 불이 번쩍인다고 그가 감탄했다. 밝은 햇살 아래 내 머리도 그처럼 탐스럽게 빛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머릿결에 대한 나의 집착은 가버린 젊음에 대한 아쉬움에 다름 아닐까. 누군가는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지만 가끔은 머리털만이라도 세월과 무관했으면 싶다. 아직도 여심이 남아 있냐고 비난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월에 실려 온 건지 휘둘려 온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흰 머리카락을 더 이상 감추지 않을 때 온전히 그 무정한 세월을 받아들이고 손을 잡을 것 같다. 염색은 사실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어서 빨리 흰머리와 화해하고 싶은데, 그런데 ‘조금만 더 있다가, 더 있다가….’ 그러면서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또 염색할 때가 된 모양이다. 이맛전이며 귀밑이 보기에도 심난하기 짝이 없다.
첫댓글 '회원 수필'방이 너무 오래 정체되어 있네요. 할 수 없이 한 편 올립니다.
들어오시는 분은 많은데 명색이 수필카페, 제발 작품들 좀 올려주세요.
저도 사십대 후반부터 이십여년을 염색을 하고 있어요
칠십까지만 염색을 하고 칩십 이후론 염색하지 않겠다는 제 다짐이 유효할지 장담은 못하겠네요 ㅋㅋ
사진으로 뵙는 복희성은 여전히 고우시니 염색쭈욱하세요
공감이 물씬 풍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Black & White! 경계선에서 늘상 망설이지요.
아내는 저보다 훨씬 많은 눈 발로 초겨울입니다.
저는 뉴질랜드에서 그런대로 자연스레 지내려는데요.
고국에 올해 갔더니 주변에서 은근히 염색을 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