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매체는 필름에 빛을 저장했다가 다시 투과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상자 속 어둠 속에서 저장된 이야기는 편집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포착을 지나 전하고 싶은 메시지로 전환된다. 파벨만이란 성을 가진 새미는 부모님과 처음 간 극장에서 그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세실 B. 드밀 감독의 1952년 작 “지상 최대의 쇼”였다. 달려오는 열차와 막으려는 자, 멈출 수 없는 질주와 충돌은 소년의 마음에 기폭제가 된다. 부모를 졸라 달리는 장난감 기차와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를 갖게 된 새미는 영화에서 본 그 장면을 재연해 본다. 열차가 달리고 차와 사람이 부딪혀 날아가고 탈선하기까지 과정을 찍고 상영한다. 새미 파벨만은 휘발되어 사라지는 순간들을 저장하고 간직하는 방법으로의 영화를 알게 된다.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감독이라는 수식이 무색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제 자신의 영화 인생을 돌아볼 순간이 되어 묵혀둔 일기장을 열어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이 된 영화와 함께 영글어 거던 유년을 만들어준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파벨만스(fabelmans)는 제목 그대로 파벨만이라는 이름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새미라는 주인공의 관점으로 본다. 이 영화가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fable(우화)에 man(사람)이라는 은유적 장치를 통해 스필버그가 지금 것 만들어온 영화와 인생에 대한 고찰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식으로 보자면 파벨(fabel) 이란 연극 용어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연출가나 작가가 생각하는 줄거리에 대한 해석을 뜻하는데 용어를 대입하면 파벨만스가 함의하고 있는 다양한 것들이 보인다. 우선 파벨만 가족들은 아빠의 직장을 따라 여러 곳을 옮겨간다. 동북부에서 시작해서 서부로 마지막엔 남서부 La까지 가게 된다. 새미의 아버지는 공학자고 그가 연구하고 개발하는 기계들의 발전사는 동부에서 서부로 이어지는 미국의 건국사와 닮아있다. 새미가 자라며 영화를 이햐하는 방식 역시 기차가 달려오는 장면을 찍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최초의 영화라 불리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열차 도착을 떠올리게 된다. 처음 찍은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왜 혹은 자신이 이 매체에 열광하는 가를 고민하면서 예술이라는 영역을 고민하게 된다. 파벨만스는 한 개인의 연대기가 당위성을 얻어가는 과정을 설명해 낼 때 영화는 예술의 영역으로 가게 되고 세계는 곧 여러 개의 개인이 뭉쳐짐과 동시에 원래 하나였던 파편이라는 점을 전해준다.
우화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상징성,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표층에 깔아 뒀다면 더 깊은 곳에 어떤 식으로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비극과 사건을 영화라는 예술은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스필버그의 대답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 속 새미의 삶은 비극으로 가득하다. 가정에선 자신의 성취를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을 삼는 아버지와 예술적으로 넘쳐흐르는 감정을 쏟아내지 못해 힘들어하는 엄마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가하는 학교 생활을 견뎌야 한다. 앞서 말했듯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런 비극적이고도 슬픔에 가득 차 있지만 보는 관객은 스치는 장면들을 아름답고 낙관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예술이 비극을 어떻게 다룰 때 유의미한 결과가 발생하는 가를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인생을 각색해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끝이 나고 여운 머릿속을 휘졌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첫 장면이었다. 6살의 새미는 극장이 두려웠고 그 이유는 어두운 공간 속에 있을 거라는 감각 때문이었다. 이때 부모들은 새미를 설득한다. 아빠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허구이고 필름에 빛을 투과해 화면을 보여주는 거라 말하고 엄마는 영화는 행복하고 기분 좋은 꿈이 라고 한다. 영사기에서 빛이 나오고 영화가 시작되면 새미는 거기에 매료된다. 아빠가 말하는 사실로서의 작동과 스크린에 비치는 엄마가 알려준 빛이라는 꿈이 그려지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아빠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동네에 집들이 밝아 우리집 찾기가 함들다는 말을 한다. 새미는 거기에 찾기가 쉽다. 가장 어두운 집이 우리 집이란 말을 한다. 그말은 대부분 집들이 기독교인인데 반해 유대인인 그들은 성탄절에 집을 밝게 꾸미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는 영화속에서 중요한 의미로 작동한다. 가장 어둡기에 밝은 집들 사이에서 돋보이기도 하고, 빛은 어둠이 있어야 의미를 가진다. 영화를 흔히들 빛의 예술이라 말한다. 인간의 삶이라는 캄캄한 곳에서 생겨나는 아픔과 비극을 그러모아 빛이라는 형태로 비춘다. 어떤 이야기는 작은 손바닥에 담길 만큼 작은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큰 스크린에 투사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필름에 박제하고 편집이라는 자기 통제를 거쳐 영화는 만들어진다. 새미의 성장 역시 보는 존재에서 찍는 존재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감독으로 성장하기 까지 여정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지극히 속 깊은 개인적인 사연을 다룬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발짝만 뒤로 물러나서 본다면 어떤 예술 창작의 주체나 거기에 동원된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영화로 살아온 스필버그가 어떤 형태로 변해도 영화는 영화로서 영화일 모든 영화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닐까 싶다.
첫댓글 역시👍 👍 👍 ~
자신의 덮어두었던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도 스필버그 스러웠던거 같아요.
거창하지도, 또는 소박하지도 않지만 시간 내내 나의 시선을 즐겁게 영화내에 가두어 주었네요.
마지막 미치가 보내준 사진을 보며 툭하고 눈물이 터졌어요.
하고싶은거 하고 살자~!!!
저는 스필버그옹 영화취향은 아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가 매우 큰 감독님이죠
영화를 매우 사랑하는 제 영화인생도 돌아보게 하드라구요
우스게 소리지만 8미리 카메라 입문기를 쓰면
안 걸릴 감독 없겠다싶은 생각도 했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인생의 첫 영화 감상!
덕분에 영화에 몰입하게 된 소년의 성장기를 잔잔하게 잘 묘사한 영화이군요.
영화와 사랑에 빠진 감독이
본인 성장기 이야기를 필름에 담을수 있으니 영화 감독이란 직업이 매력적이긴 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
아직 못 봤지만 꼭 보고 싶은 영화에요 😍
감삼평 감사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