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170)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⑥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Daum카페 http://cafe.daum.net/yangsanpoetsociety/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 정일근
⑥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왜 그렇게 바람이 좋았는지 몰라.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다.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오월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이마를 짚는다.
바람의 손은 언제나 서늘하다. 소년은 멈추어 선다.
그때 소년은 보았다. 바람의 몸을.
무형인 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보리밭 위로 달아나며 드러내는 몸의 흔적을.
“저게 바람의 몸이구나”라는 깨달음. 그것은 세상의 비밀 하나에 눈 뜬 기쁨이었다.
그러한 세상의 비밀을 찾는 것이 시고, 그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시오리쯤 되는 길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다시 바람이 분다.
함께 돌아가는 친구들은 보지 못하는 바람의 몸을 나 혼자 지켜보며 소년은 바람이 되고 싶었다.
온몸으로 부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이 나에게 절망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열네 살 중학생은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되어 백일장에 참석한다.
백일장의 시제가 ‘바람’이다. 열일곱 살은 자신에 차 있다. 일찍 바람의 몸을 보았기에.
이윽고 심사가 끝나고 입상자 명단이 방으로 붙는다. 열일곱 소년은 실망한다.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장원자가 호명되어 단상으로 나간다.
뜻밖에도 기라성 같은 상급생들을 모두 제치고 동급생인 여학생이 장원이다.
단발머리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서서 자신의 바람을 노래한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첫 줄에 나는 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동급생 계집아이가 어떻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충격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부끄러움은 또 절망을 낳았다.
내가 바람의 몸을 보았을 때 바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같은 나이의 여학생의 정신세계와 언어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백일장이 끝나고 열일곱 살은 호수 곁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동급생 계집아이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열일곱 살은 자신에게 결여돼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표정이다.
열네 살과 열일곱 살에 만난 바람은 분명 다른 바람이었다.
나는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다시 분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바람은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 태어나는 바람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의 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부는 바람이 내일도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그것이 내일의 시다.
처음 만난 시의 화두가 바람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일찍부터 풍병이 들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은, 바람병이 들었다.
나는 내 사주팔자를 보지 않았지만 내 사주와 팔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평생을 떠돌게 하는 역마살이 끼어 있을 것이다. 그런 바람들이 나를 시인으로 키웠다.
머무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바람은 부는 것이다.
분다는 것은 움직임, 시는 그런 움직임이다. 시인은 바람이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고여있는 것들은 시인을 만들지 못한다. 바람이 불기에 살아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나는 바람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는 동안 많은 사랑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부는 바람의 길을 따라 바람처럼 불어갈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다.
언제나 나는 바람이고 싶다. 그대에게로만 부는 뜨거운 바람이고 싶은 것이다.
그대 나의 시여.
< ‘나를 바꾸는 시 쓰기, 시 창작 강의 노트(유종화, 새로운눈, 2019)’에서 옮겨 적음. (2021. 1. 5.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170) 시인을 만드는 9개의 비망록 - ⑥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시인 정일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