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31)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③ 암시하듯 언뜻 비치게/ 시인 안도현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ljs5731/ 김중식 / 완전무장
③ 암시하듯 언뜻 비치게
제목을 붙이는 방식을 정리해보면,
시의 중심 소제를 앞에 제시하는 경우(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는 없지만 내용보다
어깨를 낮춤으로 해서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에’ ‘~에서’가 붙은 모든 제목이 그렇다)가 비교적 쉽고 간명하다.
낙타는 전생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육신의 정상에
고통의 비계살을 지고 다닌다
전생부터 세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안 봐도 안다는 듯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오아시스에 몸을 담가 물이 넘쳐흘러도
낙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는다
전생부터 지 수고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통 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가능한 한 가느다란 장딴지를 달고 다닌다
잠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잠이 더욱 쌓여 고개가 푹 숙여질수록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
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
과적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최후로 덧보태진, 그까짓, 비단 한 필 때문이라는 듯
고꾸라져도 되는 걸 낙타는
이 악물고 무너져버린다
죽어서도
관 속에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간다
―김중식, 「완전무장」 전문, 『황금빛 모서리』(문학과지성사, 1993, 36~37쪽)
이 시는 낙타라는 시적 대상을 통해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다.
낙타의 힘겨운 일생을 낙타의 숙명적인 외모와 오버랩시키면서 삶 속에 도사린 고통과 죽음을 그리고 있다.
내용을 읽기 전에 「완전무장」이라는 제목을 먼저 접한 독자는
이 제목이 결국 시인의 반어적 표현임을 알아차리고 무릎을 치게 된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최승자의 시 앞부분이다.
제목은 「개 같은 가을이」.
이렇게 첫 구절이나 첫 행을 아예 앞에 내세워 시의 제목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제목을 붙일 때는 어떤 경우든 간에 호기심을 유발하되 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무겁되 가볍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해야 할 것이다.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에서 옮겨 적음. (2022. 6. 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31)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③ 암시하듯 언뜻 비치게/ 시인 안도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