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없이도 사고할 수 있는가
동네 어귀에는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이라는 장승이 서 있고, 그 장승 뒤로는 미루나무가 아침 저녁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길이 있다. 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 새 마을 한가운데에 다다른다. 초가집들 사이로 유난히 돋보이던 석이네 기와집,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하던 일, 나무 그늘에서 공기놀이를 하던 일, 강둑을 쏘다니며 나비를 잡고 삼태기로 물고기를 잡던일, 더우면 물 속에 풍덩 들어가 미역을 감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인 호영이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런데 호영이의 동생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주 귀여웠고 나를 친누나처럼 잘 따랐던 아이.
'고향' 이란 말을 들으면 혜민이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고향에서 겪은 일들이 '고향' 이란 말과 어우러져 그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고향' 이란 말과 고향에 대한 생각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호영이의 동생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이것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사고이다. 미루나무라는 말을 듣고 미루나무를 떠올리는 것과는 다른 사고이다. 간혹 호영이 할아버지가 캐온 약초 생각도 난다. 혜만이는 그 약초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습은 아주 뚜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런것을 보면 언어 없이도 사고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말이 헛나갈 때 또는 생각은 나는데 적합한 말을 찾기 어려운 경우 등은 언어와 사고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 준다. 음악가가 작곡이나 연주를 할 때나, 화가나 조각가가 작업을 할 때에도 언어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언어와 사고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고는 대부분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언어 없이 생각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극히 단순하고 거의 형체가 없는 불분명한 관념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됨으로써 비로소 사고의 내용도 명백해지고 사고 과정도 빨라지며 사고 능력도 중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