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건조한 바람만 분다
논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혀를 길게 빼고 옆 도랑물을 핥는다
할딱거림이 펼쳐진다
일사병을 앓고 있는 목마른 계절
영감의 애간장은 언젠가 고사되고 말 것이다
애꿎은 티비 채널을 돌리다 말고
양은 주전자를 쳐들고 벌컥벌컥 마셔댄다
도무지 비가 올 징조가 아닌께 앞에서 깔짝대지 말고 고추밭에나 나가 봐
애먼 할멈에게 화살을 날린다
부부 사이 쩍쩍 금이 가면 안 되는데
생각마저 파산하면 안 되는데…
할멈은 호미 한 자루 들고 산밭으로 간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파국 속에
찔레꽃 향기가 저리 아득하게 번져오는가
푸석푸석 먼지만 풀풀 날리는 심장을 두드리며
이놈의 징한 갈증은 언제 끝날 것인가
가난한 시간 내내 한 번도 흥건하게 젖은 적 없는데
박하사탕처럼 잠시 환해졌다가 시들해지는 오후
영감에게 문자가 온다
그래도 거기가 제일 맘 편할 거여 찔레꽃이나 실컷 보고 와
고구마
보랏빛 꽂은 수태를 했다는 뜻이다
작열하는 태양이 넝쿨이 돼고 은밀한 땅속이 궁금하지 않다
지상처럼 덩어리진 슬픔 따윈 없을거야
순하디 순한 알몸들이 모여
일가를 이루었을 듯한 내밀한 세계
따뜻한 어둠이 흙 속에 있다,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나는 입맛을 숨길거다
동치미 담그는 버릇을 참을거야
보랏빛 은 이야기가 움튼다는 뜻이다
주인공들 이 올망졸망 발단에서 전개로 슬쩍
넘어간다는 뜻이다
된장이 되는 시간
그것은 칠 할이 장독대의 일
정월엔 빈 항아리를 열어
태양과 바람과 달을 품게 해야 하고
보름 후엔 개운하게 모든 걸 비워내야 한다.
덩그러니 담긴 채 말간 공복의 상태
마음먹은 오늘이 바로 길일이다.
산밭의 꿩 소리와 벌레 소리가 곰팡이와 함께 발효됐다.
메주를 넣고 바다의 산통을 이겨낸 소금물을 붓는다
항아리 속에 복룡리의 날씨가 켜켜이 쌓인다
찰방거리는 숨소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지막엔 숯 두어 개와 건 고추 몇 알을 띄운다
이제부터는 숙성을 위한 기다림이니
처음 다녀간 여자의 손길을 기억해야 한다
독을 열고 닫은 소리와 풍경
햇볕의 농도는 얼마나 옅은지 강한지
발소리가 가까이 오는지 멀리 가는지
온통 민감해야 한다.
여자가 손으로 찍어 간을 볼 때마다
메주는 슬며시 표정을 살피기 일쑤
아, 반복도 미학
겨울이 가고 매화꽃이 움틀 때가 좋다
여자의 표정이 봄볕처럼 화사하다
오후 네 시 무렵의 서풍과
저녁노을과 아홉시의 귀신새 울음소리가
항아리 안쪽에서 한 몸이 되려한다
내버려둔다, 푸른곰팡이의 난장
춤이 끝난 자리, 맛이 발아한다.
다음해 여자가 첫눈이 내리던 날
한 숟갈을 떠서 된장국을 끓인다.
순하게 익은 계절들이 집안 가득 퍼진다.
이제 당신만 오면 그만이다
들밥 정식
들판 한 쪽이 건넨 밥상
오늘의 정식은 자운영 꽃밥이다
바람은 고명을 얹듯 종달새 소리를 슬쩍 놓고
샘이라도 났을까
웃비가 소나기 한 그릇 뚝딱 삼키고는 시치미 뗀다
이 봄엔 레시피 따위 필요 없어
민들레 무침 개나리 볶음 진달래 화전이 한 상이다
대마산 밑에서 허기지게 밭메는 우리 엄마
눈요기가 황홀한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꿈속 같은 들길을 걷는다
쑥 냉이가 파랗게 날을 세우고 시샘을 한다
바람은 입맛이 도는지 슬쩍 앉았다 가고
한바탕 꽃들의 만찬상이 화려하다
뜨개질 사랑
잠깐 당신 생각에 빠져있는 순간
모자를 뜨고 있는 실타래가 꼬이기 시작한다
만지면 만질수록 엉키고 엉켜서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만 나는 나를 놓치고 만다
머릿속이 캄캄하다 작은 방심은 긴장을 놓쳤다는 뜻
놓친 상처를 매듭으로 봉합하려는데
촘촘하게 슬픔이 아려온다
놓치고 또 놓치고 그러면서 힘들게 엮어 온 길
가위로 삐져나온 생각의 부위를 싹둑싹둑 자르고 싶다
바늘로 예상치 못한 곳으로 굴러간 후회를 찌르고 싶다
왜 나는 이별 후에도 잔뜩 엉켜있는 것일까
떠난 사람이 남긴 무늬를 왜 완성하려는 것일까
묻고 답하는 나는 확신이 없다
통속적인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못한 내가 너무나 싫다
또다시 한 자리에 뭉쳐진 그리움이 풀려나간다
한 올 한 올, 당신의 소문이 흘러든 쪽으로…….
수목원
오월이 세상에 길을 놓고 있다,
악보도 없이 나무들이 몸관악기 를 연주한다,
피톤치트 피톤치트 바람에 추임새가 들린다,
방문객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며 들꽃들이 수다를 떤다,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송화가루 음율이 간절하다,
나만 빼고 모두 봄이라 한다,
시린 생각을 저들에게 들키고 말았을까,
내 안에 있던 머뭇거림이 슬쩍 빠져나가려 한다,
당신은 어디까지 갔는가?
오전에 나뭇잎과 오후에 나뭇잎의 태도는 다르다,
길어진 만큼 어떤 것은 짧아진다,
묏새 소리와 묏새 소리가 모여 떼 울음이 되려한다,
당신도 듣고 있는가,
귀를 닫고 눈을 닫아도 길은 더 선명 해지고 있다,
나무들처럼 천 천히 걸어와도 좋다,
그리움이 잔뜩 우거진 나의 숲을 향해
201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당선
2019년 계간열린린시학등단
한국문인협회 신안지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