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5악岳에 드는 관악산은 서울 남부의 관악구, 금천구와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 의왕시, 군포시 등을 가르며 도심한복판에 솟아 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관악산을 볼만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곳에 사는지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다닌 곳이다. 왼편에 좌청룡의 형국인 청계산(옛 명칭 : 청룡산)과 오른 편에 수리산(옛 명칭 : 백호산)이 우백호로 자리하고 있어 지역사령관으로서의 면모 또한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빌딩과 대단지 아파트가 내려다보이는 도심 속의 숲, 관악산의 숱한 갈림길 중 오늘은 암릉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6봉과 8봉능선이 발을 잡아끈다.
조선개국 후 한양천도를 할 때 무학대사는 관악산에 화산의 기가 있으므로 그 화기를 누르고자 광화문에 해태 상을 세워 제왕의 터전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 세조의 왕위찬탈 등으로 경복궁은 거듭 화마에 휩싸인다.
과연 이걸 관악산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관악산은 거기 그 자리에서 그들의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싸움에도 고개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냄새 맡고 있을 뿐이었는데.
“무학대사는 나무만 보았던 거야. 멀리 숲을 못보고.”
차라리 무학대사가 풍수지리학 이상의 식견이 있어서 한양이나 궁궐만의 위기의식을 초월한 범국가적 안목을 지녔다면 임진왜란이나 을사조약 등의 수난을 피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고인다.
관악산 곳곳에 물동이를 묻어 만일의 화재사태에 대비토록 수선을 피웠으나 관악산에 화기가 있다는 무학의 주장은 전혀 맞지 않다. 관악산에서의 화기라 함은 불타오르는 가을단풍과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의 석화성石火星산세, 그뿐이다.
관악이 왜 5악인지, 6봉능선에서 관악의 진면목을 보다
정부과천청사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이어진 길, 관악산을 오르는 진입로 직전의 대로는 은행나무 가로수와 떨어진 은행잎으로 온통 노랑물결이다. 넓은 아스팔트대로이지만 가을되어 노랗게 은행잎 물들고 또 낙엽 떨어지면 이 길은 낭만 가득한 산책로가 된다. 여기서 중앙공무원연수원과 기술표준원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초소와 안내판이 보이는데 이 길이 관악산 오르는 많은 들머리 중 한곳이다.
문원폭포 쪽으로 걸으면서 올려다본 3봉은 언제 봐도 위풍당당하다. 바윗길과 작은 협곡을 지나 문원폭포 직전 널따란 마당바위에서 연주대 방향이 아닌 좌측으로 6봉 가는 길이 있다. 지난주부터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시나브로 산 아래로 낙하하는 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정표 하나 없어 비탐방로처럼 산객도 뜸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육봉까지 1.5km라고 적힌 이정표가 세워져있다. 여기서 오가는 6봉능선의 위험도가 높아 산객을 인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탐방규제도 않으면서 방치하다시피 했던 구간이다.
난이도는 높은 편이지만 고소공포증 없고 등산화 밑창만 닳지 않았다면 바위 릿지를 만끽할 수 있는 명품코스이다. 두 손, 두 발을 바위에 밀착하여 슬랩구간을 기어올라 봉우리를 건너며 능선을 지날수록 골산으로서의 명산요소를 두루 갖춘 관악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네. 길이 다른가.”
“그때 그 길이야. 너희들이 익숙해진 거지.”
병소, 영빈이와 태영이는 두 달여 만에 두 번째로 6봉을 오르면서 처음과 달리 능숙하게 바위를 타는 중이다. 뾰족 침봉들과 급준 경사면의 바위벽들이 처음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도 하지만 몇 번 다니다보면 6봉은 능선 그 자체가 친숙하고 익숙한 길이 된다.
다소 가파르지만 3봉 릿지는 짜릿한 맛을 느끼게 한다
4봉은 높지는 않아도 내려설 때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바위 틈틈 소나무들이 몸을 비틀며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미 오랜 세월 이들은 한 식구 한 몸이 되어 살았다. 매끄러운 바위마다 사람들의 손자국이 묻어나고 그 자국들은 다시 짜릿한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거의 관악산만 20년 다녔는데 여기 6봉만 200번 넘게 다녔어요.”
그만큼 6봉에 매력을 느꼈고, 익숙해졌고 지금도 질리지 않는다는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6봉능선에서 두 번 마주친 6봉녀 혹은 날다람쥐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더니 작은 체구로 4봉의 수직 내리막을 훌쩍 내려선다. 그렇게 내려가 저만치 자취를 감추는 것이어서 뒤따르는 산객들을 난감하게 한다. 크게 높지는 않지만 발 디딜 곳이 도통 보이지 않아 자일 없이는 쉽게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다.
“그렇지, 바로 거길 딛고 오른손을 뻗어.”
몇 번 내려온 적이 있지만 늘 조심스럽다. 먼저 내려와서 세 친구를 인도한다.
“잘했어.”
친구들은 고개를 가로로 흔들면서도 내려온 4봉 암벽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는 표정이다. 4봉부터는 다소 편한 암릉길이다.
과천시내 아파트단지와 정부청사 건물을 내려다보게 되고 수원 광교산에서 백운산을 지나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이 무척 가깝게 잡힌다. 송신탑과 기상레이더들이 솟은 정상일대까지 울긋불긋 가을색이 넘실댄다.
능선을 지나 국기봉에서 한숨 돌리고 8봉능선 쪽으로 가며 만나는 촛대바위가 언제나처럼 반갑다. 보고 또 봐도 개성 뚜렷하고 잘생긴 바위다. 친구들을 바위에 올라타게 하고 사진도 찍다가 그대로 걸터앉는다.
불꽃바위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강렬하다
“관악산에서도 쇠말뚝이 발견되었다더군.”
“우리나라 산에서 빼낸 쇠말뚝이 수백 개라는데 여기도 박혀있겠지.”
1930년대 들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국내명산의 중요 혈점穴占에 쇠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정기가 모이는 자리에 쇠말뚝을 박음으로써 산의 맥을 끊어버리고자 함이다.
“일본 놈들은 어떻게 그런 발상까지 했을까.”
“세상을 삼키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놈들이 그런 걸 박는다고 산의 맥이 끊어지고 그 지역의 정기가 사라진다고 믿었던 거야?”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믿었겠지.”
우리 국민들의 풍수에 관한 믿음은 예로부터 강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고장 진산의 정기를 받아 출중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독립 운동가들이 생긴 거라는 믿음을 일본인들이 역이용했을 것이다. 정기가 솟는 혈에 쇠말뚝을 박아 그 기를 없애고 맥을 끊어 조선인들의 심리를 위축시키려했음이다. 조선인들에게는 일종의 신앙인 풍수로 그들의 기를 죽여야 한다는 실제자료가 있기도 하다.
“일리 있는 논리야. 우리 할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한신 적이 있었지.”
태영이한테 시선이 쏠린다.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 산의 맥을 죄다 끊어놓아서 아직도 친일파나 군인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 말씀을 인용하는 태영이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인간들 싸움에 자연만 등터진 셈이군.”
“가자. 가면서 쇠말뚝 박혀있나 잘보고.”
촛대바위를 지나서도 낙타바위 등 들쭉날쭉 솟은 다양한 바위들을 보면 혈이나 맥을 떠나 쇠말뚝은 그저 자연스러움에 대한 파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 놓여야 할 위치에서 제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연함을 인위적으로 파손하는 일은 그 어떤 이유로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저기 정상에 세워진 송신탑도 빼내야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박은 쇠말뚝보다 훨씬 더 큰데.”
“저걸 빼면 우리 집 텔레비전이 안 나올 텐데.”
가을은 8봉에 넘실대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6봉에 비해 8봉은 수월한 편이다. 모처럼만에 8봉 국기봉의 앉은뱅이 명품소나무와 조우한다. 여전히 푸르고 숱 많은 솔잎을 펼쳐 보이며 건강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담에 볼 때도 오늘 이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시게.”
“그대야말로 무르팍 상하지 말고 오래오래 산행하시게나. 그리고 열네 봉우리를 함께 걷는 만큼 우정도 열네 겹 더 두터워지길 바라네.”
멘토의 진심어린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며 8봉능선으로 진입한다. 국기봉 아래 갈림길, 불성사를 아래로 두고 8봉능선이 이어지는데 6봉에서의 도심권 조망과 달리 여기서는 관악산 깊은 산세를 두루 감상하며 봉우리들을 넘게 된다.
올랐다가 내려서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하게 되지만 팔봉은 힘들다거나 지루하지 않다. 그만큼 아기자기하면서도 산행의 다양한 맛을 보게 한다. 비탈바위 곳곳에 튼튼하게 밧줄이 설치되어 양방향 산객들이 안전하게 비켜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세 번째 봉우리를 지나 가을관악을 눈에 담으며 휴식을 취하는데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미수 허목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보다 한참 뒤인 영조, 정조 때 재상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은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에서 그를 언급하며 존경심을 표한다.
“허목 선생은 83세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그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사람들이 그를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었다. 저 관악산은 경기지역의 신령한 산으로 선현들이 일찍부터 유람한 곳이다. 그래서 나도 한번 이 산에 올라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틔우고 선현을 태산처럼 사모하여 우러르는 마음을 기르고자 했다.”
이 기록은 채제공이 67세 때인 1786년 4월 13일 하루에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던 걸 기록한 기행문의 구절이다. 채제공 선생도 팔순을 넘기셨으니 등산이 장수에도 도움 주는 건 만고의 진리인가 보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험하고 거칠었을 텐데.”
“그런 관악산을 연세 드신 분들이 스틱도 없이 올랐겠지.”
“그 얘기 들으니 몸이 가붓해지는 느낌이네.”
8봉능선에서 내려와 왕관바위와 조우한다
네 번째 봉우리 뒤로 삼성산이 보인다. 여섯 번째 봉우리를 지나면서 절묘한 형태의 왕관바위를 만난다. 관악산의 명물 중 하나이다. 관악산에는 제2, 제3왕관바위가 또 있으니 기암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뒤돌아 지나온 8봉능선과 그 왼편으로 학바위능선을 치고 올라 기상대와 연주대까지 가을이 짙게 깔려있는 걸 보고 마지막 밧줄구간을 내려서면 무너미고개에 이른다.
무너미고개에서 서울대 공학관으로 빠지며 산행을 마치려다가 여든 셋에 연주대를 밟으신 허목 선생 덕분에 삼성산 좌측을 감아 돌아 안양예술공원까지 길을 늘려 잡고 말았다. 느긋하게 서울대 수목원의 식물들을 감상하고 안양예술공원의 조각품들을 눈여겨보며 걷는다.
오래전 인근에 포도밭이 즐비했던 안양유원지는 2005년부터 쇠락한 주변 환경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후 관악산과 삼성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고 깨끗한 물을 활용하여 공원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많은 전시물들을 창작해왔다.
안양예술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대중과 소통하는 미술을 의미하는 공공미술로 작위적이긴 하지만 자연과 일체가 된 전시품들이다. 세계 각국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문화와 예술을 도시개발과 발전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완성한 예술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야외공연장, ‘나무 위의 선으로 된 집’은 공연장 자체가 작품으로 객석은 위에서 보면 마치 물결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다시 도로를 따라 짧지 않은 길을 걸어 공원진입로에 자리한 흰색 외벽의 건물을 보게 된다. 안양예술파빌리온이라는 건축물이다. 도서관과 작품전시와 공모전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되는데 보는 각도마다 다채로운 외관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