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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마(驛馬)
-김동리-
1
‘1)화개 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2)구례(求禮)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골(花開峽)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 그림자와 검은 3)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추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 도의 경계를 그어 주며, 다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蟾津江) 물이었다.
4)하동(河東), 구례, 5)쌍계사(雙磎寺)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 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6)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 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 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7)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8)황화물 장수들의 실바늘, 9)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10)골백분들이 또한 구례 길에서 넘어오고, 하동 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수들의 김, 미역, 11)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12)산협(山峽)하고는 꽤 13)은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화개 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개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恨) 많고 멋들은 14)진양조, 15)단가, 16)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기다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17)남사당 18)여사당 19)협률(協律) 20)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가 이 화개 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가운데도 옥화(玉花)네 집은 술맛이 유달리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즉 옥화―의 인심이 후하다 하여 화개 장터에서 가장 이름이 들린 주막이었다. 얼마 전에 그 어머니가 죽고 총각 아들 하나와 단 두 식구만으로, 안주인 옥화가 돌아올 길 21)망연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라 하여 그들은 더욱 호의와 동정을 기울이는 모양이기도 하였다. 혹 노자가 달린다거나 22)행장이 23)불비할 때 그들은 으레 옥화네 주막을 찾았다.
“나 이번에 경상도서 돌아올 때 함께 24)회계하지라오.”
그들은 예사로 이렇게들 말하곤 하였다.
2
늘어선 버들가지가 강물에 씻기고 저녁 바람에 은어가 번득이고 하는 여름철 석양 무렵이었다.
나이 예순도 훨씬 더 넘어 되었을 늙은 25)체 장수 하나가 26)쳇바퀴와 바닥감들을 어깨에 걸머지고 손에는 지팡이와 부채를 들고 옥화네 주막을 찾아왔다. 바로 그 뒤에는 나이 열대여섯 살 가량 나 뵈는, 몸매가 호리호리한 소녀 하나가 조그만 보따리를 옆에 끼고 서 있었다. 그들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저 큰애기까지 두 분입니까?”
옥화는 노인보다 큰애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저녁상을 물린 뒤 노인은 옥화에게 인사를 청했다. 살기는 구례에 사는데 이번엔 경상도 쪽으로 벌이를 떠나온 길이라 하였다. 본시 여수(麗水)가 고향인데, 젊어서 친구를 따라 한때 구례에 와서도 살다가, 그 뒤 목포로 군산으로 전전하여 나중 진도(珍島)로 건너가 거기서 열일여덟 해 사는 동안 그만 머리털까지 세어져서는, 그래 몇 해 전부터 도로 구례에 돌아와 사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저런 큰애기를 데리고 어떻게 다니느냐고 옥화가 물은즉 그렇잖아도 이번에는 죽을 때까지 아무 데도 떠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떠나지 않고는 두 식구 가만히 앉아서 굶을 판이매 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하였다.
“그럼 저 큰애기는 할아부지 딸입니까?”
옥화는 ‘27)남폿불’ 그림자가 반쯤 28)비낀 바람벽 구석에 붙어 앉아 가끔 그 환한 두 눈을 떠서 이쪽을 바라보곤 하는, 소녀의 동그스름한 어깨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노인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평생 객지로만 돌아다니고 나니, 이제 고향 삼아 돌아온 곳(求禮)이래야 또한 객지라, 그들 아비 딸이 어디다 힘을 입고 살아가야 할는지 아무 데도 의탁할 곳이 없다고 그들의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곤 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는 노는 것을 좋아했지라오. 동무들과 광대로 꾸며 갖고 댕기봤는듸, 젊어서 한번 농게 평생 못 잡기 마련이여…… 그것이 스물네 살 때 29)정초닝게 꼭 서른여섯 해 전일 것이여, 바로 이 장터에서도 하룻밤 논 일이 있었지라오.”
노인은 조용히 추억의 실마리를 더듬는 듯 방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곤 하는 것이었다.
순간 옥화는 가슴이 섬짓하였다. 서른여섯이라면 바로 자기의 나이와 같은 햇수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이튿날은 비가 왔다.
3
화개 장날만 30)책전을 펴는 성기는 내일 장볼 준비도 할 겸 하루를 앞두고 절에서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쌍계사에서 화개 장터까지 십 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산협의 장려한 풍경은 언제 보나 그에게 길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
처음엔 글을 배우러 간다고 할머니에게 손목을 끌리다시피 하여 간 곳이 절이었고 그 다음엔 손위 동무들의 31)사랑에 끌려다니다시피쯤 하여 왔지만, 요즘 와서는 매일같이 듣는 북소리, 목탁 소리 그리고 그 32)경을 치게 해맑은 은행나무, 33)염주나무(菩提樹), 이런 것까지 모두 다 싫증이 났다.
당초부터 어디로 훨훨 가 보고나 싶던 것이 소망이었고, 그러나 어디로 간다는 건 말만 들어도 당장에 두 눈이 시뻘게져서 34)역정을 내는 어머니였다.
“서방이 있나 일가 친척이 있나, 너 하나만 믿고 사는 이판에 너조차 밤낮 어디로 간다고만 하니 난 누굴 믿고 사냐?”
어머니의 넋두리는 인제 귀에 못이 박힐 정도였다.
이러한 어머니보다도, 차라리, 열 살 때부터 절에 넣어 중질을 시켰으니 인제 35)역마살(驛馬煞)도 거의 다 풀려 갈 것이라고, 은근히 마음을 늦추시는 편이던 할머니는, 그러나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다. 36)당사주(唐四柱)라면 다시는 더 사족을 못 쓰던 할머니는 성기가 세 살 났을 때 보인 그의 사주에 37)시천역(時天驛)이 들었다 하여 한때는 얼마나 낙담했던 것인지 모른다. 하동 산다는 그 키가 나지막한, 명주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가 혹 갑자 을축을 잘못 꼽지나 않았나 하여, 큰 절(쌍계사를 가리킴)에 있는 어느 노장에게도 가 물어 보고, 지리산 속에서 도를 닦아 나온다던 어떤 키 큰 영감에게 다시 뵈어도 봤지만 시천역엔 조금도 요동이 없었다.
“천성 제 애비 팔자를 따라갈려는 게지.”
할머니가 어머니를 좀 비꼬아 하는 말이었으나 거기 깊은 원망이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말엔 각별나게 신경을 쓰는 옥화는,
“부모 안 닮는 자식 없단다. 근본은 다 엄마 탓이지.”
도리어 어머니를 원망하곤 하였다.
“이년아, 에미한테 너무 오금 박지 말어라. 남사당을 붙었음, 너를 버리고 내가 그놈을 찾아갔냐 너더러 찾아달라 성화를 댔냐?”
그러나 서른여섯 해 전에 꼭 하룻밤 놀다 갔다는 젊은 남사당의 진양조 가락에 반하여 옥화를 배게 된 할머니나,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중과 인연을 맺어서 성기를 가지게 된 옥화나 다같이 화개 장터 주막집에 태어났던 그녀들로서는 별로 누구를 원망할 턱도 없는 어미 딸이었다. 성기에게 역마살이 든 것은 어머니가 중 서방을 정한 탓이요, 어머니가 중 서방을 정한 것은 할머니가 남사당에게 반했기 때문이라면, 성기의 역마운도 결국은 할머니가 장본이라, 이에 할머니는 성기에게 중질을 시켜서 살을 때우려고도 서둘러 보았던 것이고 중질에서 못 푼 38)살을 이번에는 옥화가 그에게 책 장수를 시켜 마저 풀어 보려도 했던 것이다. 성기로서도 불경보다는 분명히 이야기책에 끌리는 눈치요, 중질보다는 차라리 장사나 해 보고 싶다는 39)소청이기도 하여, 그러나 옥화는 꼭 화개장만 보이기로 다짐까지 받은 뒤, 그에게 책전을 내어 주기로 했던 것이었다…….
성기가 마루 앞 축대 위에 올라서는 것을 보자 옥화는 놀란 듯이 자리를 일어나 앉으며,
“더운데 왜 인제사 내려오냐?”
곁에 있던 수건과 부채를 집어 주었다.
지금까지 옥화에게 이야기책을 읽어 들려 주고 있은 듯한 어떤 낯선 계집애 하나는 책 읽던 것을 그치고 얼굴을 들어 성기를 바라보았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흰자위 검은자위가 꽃같이 40)선연한 두 눈이었다. 순간 성기는 가슴이 찌르르하며, 갑자기 생기 띤 눈으로 집 앞에 늘어선 버들가지를 바라보았다.
얼마 뒤 계집아이는 안으로 들어간 뒤 옥화는 성기의 점심상을 차려 들고 와서,
“체 장수 딸이다.”
하였다. 어머니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체 장수라니?”
성기는 밥상을 받은 채, 그러나 얼른 숟가락을 들려고도 않고 그의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구례 산다드라, 이번에 어쩌면 하동으로 해서 진주 쪽으로 나가 볼 참이라는데 어제 저 화개골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 딸아이는 그 체 장수의 무남 독녀인데 영감이 화개골 쪽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하동 쪽으로 나갈 때 데리고 가겠노라고, 하도 41)애걸 복걸을 하기에 그동안 좀 맡아 있어 주기로 했다면서, 옥화는 성기의 눈치를 살피듯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화개골에서는 며칠이나 있겠다는데?”
“들어가 보고 재미나면 지리산 쪽으로 깊이 들어가 볼 눈치드라.”
그리고 나서 옥화는 또,
“그래도 그런 사람의 딸같이는 안 뵈지?”
하였다. 계연(契姸)이란 이름이었다.
성기는 잠자코 밥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밥은 반도 먹지 않고 상을 물려 버렸다.
이튿날 성기가 책전에 있으려니까 그 체 장수의 딸이 그의 점심을 이고 왔다. 집에서 장터까지래야 소리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였지만 그래도 전날 늘 이고 다니던 ‘상돌 엄마’가 있을 터인데 이렇게 완연히 처녀티가 나는 남의 큰애기더러 이런 42)사환을 시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계연의 쪽에서는 그러한 빛도 없이 그 꽃송이같이 환한 두 눈에 웃음까지 담은 채 그의 앞에 밥 43)함지를 공손스레 놓고는 떡과 엿과 참외들을 팔고 있는 음식전 쪽으로 눈을 팔고 서 있었다.
“상돌 엄마 어디 갔는데?”
성기는 계연의 그 아리따운 두 눈에서 44)흥건한 즐거움을 가슴으로 깨달으며, 그러나 고개는 엉뚱한 방향으로 돌린 채 의외로 거친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손님이 대청에 가뜩 찼는듸 상돌 엄마가 혼자서 바삐 서두닝게 어머니가 저더러 갖고 가라 했어요.”
그동안 거의 입을 열어 말하는 일이 없었던 계연은 성기가 묻는 말에 의외로 생경한 전라도 45)토음(土音)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가냘프고 동그스름한 어깨와 목하며, 어디서 그렇게 힘차고 쾌활한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줌이나 될 듯한 가느다란 허리와 호리호리한 몸매에 비하여 발달된 팔 다리와 토실토실한 두 손등과 조그맣게 도톰한 입술을 가진 탓인지도 몰랐다.
“계연아, 오빠 세숫물 놔 드려라.”
이튿날 아침에도 옥화는 상돌 엄마를 부엌에 둔 채 역시 계연에게 성기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세숫물을 놓는 일뿐 아니라 46)숭늉 그릇을 들고 다니는 것이나 밥상을 차려 가는 것이나 수건을 찾아 주는 것이나 성기에 따른 잔심부름은 모조리 계연으로 하여금 하게 하였다.
“아이가 맘이 컴컴치 않고 인정이 많고 얄미운 데가 없어.”
옥화는 자랑삼아 가끔 이런 말도 하였다.
“즈이 아버지는 웬일인지 47)반억지 비슷하게 거저 곧장 나만 믿겠다고 아주 양딸처럼 나한테다 맡기구 싶은 눈치드라만…….”
옥화는 잠깐 말을 끊어서 성기의 낯빛을 살피고 나서 다시,
“그래 너한테도 말을 들어 봐야겠고 해서 거저 대강 들을만하고 있었잖냐.”
하는 것이, 흡사 성기의 동의를 구하는 모양 같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옥화는 계연의 말을 옮겨, 구례 있는 저이 집이래야 구례 읍내에서 외따로 떨어져, 무슨 산기슭 밑에 이웃도 없이 있는 오막살인가 보더라고도 하였다.
“그럼, 살림은 어쩌고 나섰을까?”
“살림이야 그까진 거 머 방문에 자물쇠 채워 두었으면 그만 아냐, 허지만 그보다도 나그네 길에 데리고 나선 계연이가 걱정이지.”
이러한 옥화의 말투로 보아서는 체 장수 영감이 화개골에서 나오는 대로 계연을 아주 양딸로 정해 둘 생각인 듯이 보였다. 다만 성기가 꺼릴까 보아 이것만을 48)저어하는 눈치 같았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옥화는 성기더러 장가를 들라고 권했으나 그는 응치 않았고 집에 술 파는 색시를 몇 차례나 두어도 보았으나 색시 쪽에서 성기에게 간혹 말썽을 낸 적은 있어도 성기가 색시에게 그러한 마음을 두는 일은 한 번도 있은 적이 없어, 이러한 일들로 해서 이번에도 옥화는 계연이로 하여금 성기의 미움이나 받지 않게끔 되도록이면 그녀의 좋은 점만 성기에게 이야기하려는 눈치 같아도 보였다.
4
아랫집 실과 가게에서 성기가 짚신 한 켤레를 사들고 오려니까, 옥화는 비죽이 웃는 얼굴로 막걸리 한 사발을 그에게 떠 주며,
“오늘 날씨가 너무 덥잖겠냐?”
고 하였다. 술 거를 때 누구에게나 맛뵈기 떠주기를 잘하는 옥화였다. 계연이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계연아, 너도 빨리 나와 목마를 텐데 미리 좀 마시고 가거라.”
옥화는 방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49)항라 50)적삼에 가는 삼베 치마를 갈아입고 나오는 계연의 두 눈은 물에 어린 연꽃처럼 흰자위 검은자위가 선연해 있었다.
“꼭 스무 해 전에 내가 입었던 거다.”
옥화는 51)유감(有感)한 듯이 계연의 옷맵시를 살펴 주며 말했다.
“어제 꺼내서 52)품을 좀 줄여 놨더니만 청성스레 맞는구나. 보기보단 품을 여간 많이 입잖는다 이 앤……. 자 얼른 마셔라. 오빠 있음 어때, 음식에 무슨 53)내외가 있냐?”
그러자 계연은 웃는 얼굴로 술잔을 받아 들고는 방으로 들어가 마시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성기는 먼저 수양버드나무 밑에 와서 새 신발에 물을 축이었다. 계연이도 곧 뒤를 따라 나섰다. 어저께 성기가 칠불암(七佛庵)까지 (칠불암에 있는 54)노장 하나가 그에게서 삼국지(三國志) 한 55)질을 외상으로 가져가고는 보름이 넘도록 소식이 없어) 책값 수금 관계로 좀 다녀올 일이 있다 했더니, 옥화가 있다 그러면 계연이도 며칠 전부터 산나물을 캐러 간다고 벼르는 중이니 이왕이면 좀 데리고 가잖겠느냐고 하였다. 성기는 가슴도 좀 뛰고 그러나 나물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싫다고 했더니, 너더러 누가 나물까지 캐라냐고, 앞에서 길만 끌어 주면 되잖냐고 우기어, 56)기승한 어머니에게 성기는 결국 진 것같이 되었던 것이다.
성기는 처음부터 큰길을 버리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수풀 속 산길을 돌아가기로 하였다. 원체가 지리산 밑이요, 또 나뭇길도 본시부터 똑똑히 나 있지 않은 곳이라, 어려서부터 자라난 고장이라곤 하지만 57)울울한 수풀 속에서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해매곤 하였다.
쳐다보면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꼭대기요 내려다보면 발 아래는 바다같이 내리깔린 뿌연 수풀뿐, 그 위에 흰 햇살만 물줄기처럼 내리퍼붓고 있었다. 58)머루, 59)다래, 60)으름은 아직 철이 일러 파랗고, 가지마다 새빨간 61)복분자, 62)오디는 오히려 철이 겨운 듯 한머리 까맣게 먹물이 돌고 있었다.
성기는 제 손으로 다듬은 퍼런 63)아가위나무 가지로 앞에서 칡넝쿨을 헤쳐 가며 가고 있는데, 계연은 뒤에서 두릅을 꺾는다 딸기를 딴다 하며 자꾸 혼자 떨어지곤 하였다.
“빨리 오잖고 뭘 하나?”
성기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나무라면 계연은 딸기를 따다 말고 두릅을 꺾다 말고 그 도톰한 입술을 꼭 물고는 뛰어오는 것이었으나 한참만 가다 보면 또 뒤에 떨어지곤 하였다.
“아이고머니 어쩔거나!”
갑자기 뒤에서 계연이가 소리를 질렀다. 돌아다보니 떡갈나무 위에서, 가지에 치맛자락이 걸려 있다. 하필 떡갈나무에는 뭣하러 올라갔을까고 곁에 가 쳐다보니 계연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그 아래쪽 딸기나무 가지가 넘어와 있다. 딸기나무에는 가시가 있고 또 비탈에 서 있어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그 딸기나무와 가지가 서로 얽힌 떡갈나무 쪽으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몸을 굽혀 손으로 치맛자락을 벗기려면 간신히 잡고 서 있는 윗가지에서 손을 놓아야만 하겠고, 손을 놓았다가는 당장 나무에서 떨어질 형편이다. 나무 아래서 쳐다보니 활짝 걷어 올려진 베치마 속에 64)정강마루까지를 채 가리지 못한 짤막한 65)베고의가 훤한 햇살을 통하여 안의 것을 뽀얗게 보여 주고 있었다.
성기는 짚고 있던 생나무 지팡이로 치맛자락을 벗겨 주려 하였으나 지팡이가 짧았던 관계도 있겠지만 제 자신도 모르게 지팡이 끝은 계연의 그 발그레하고 매끈한 종아리만을 자꾸 건드리고 있었다.
“아이 싫어! 나무에서 떨어진당게!”
계연은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어이한 다람쥐란 놈까지 한 마리 다래 넝쿨 위로 타고 와서 지금 막 계연이가 잡고 서 있는 떡갈나무 가지 위로 건너뛰려 하고 있다.
“아, 곧 떨어진당게! 그 막대로 저 다램지이나 때려 줬음 쓰겠는듸.”
계연은 아랫도리를 거의 햇살에 훤히 드러내인 채 있으면서도, 다래 넝쿨 위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그 요망스런 66)턱주가리를 쫑긋거리고 있는 그 다람쥐가 더 안타까운 모양으로 또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요놈의 다램이가…….”
성기는 같은 나무 밑 가지에까지 올라가서야 겨우 계연의 치맛자락을 끌러 주고, 그러고는 막대로 다시 조금 전에 다람쥐가 앉아 있던 다래 넝쿨을 한 번 툭 쳤다. 이 소리에 놀랐는지 산비둘기 몇 마리가 푸드득하고 아래쪽 머루 넝쿨 위로 날아갔다.
“샘물이 있어야 쓰겠는듸.”
계연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이마의 땀을 씻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산줄기를 탈 때마다 연방 더 67)우악스런 68)멧부리요 어두운 수풀을 지나 환하게 열린 하늘을 내다볼 때마다 바다같이 벌어진 골짜기에 69)질펀히 차 있는 것이 머루 다래 요 딸기 칡의 넝쿨들이다.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여기저기서 70)난장판으로 뻐꾸기들은 울고 이따금씩 낄낄하고 골을 건너 날아가는 꿩 울음소리도 71)야지의 가을 벌레 소리를 듣는 듯 72)신산할 뿐이었다.
해는 거의 하늘 한가운데를 돌아 바야흐로 불을 끼얹는 듯하고, 어두운 숲 그늘 속에는 해삼 만큼씩 한 시커먼 달팽이들이 땅에 붙어 허연 진물을 토하고 있었다.
햇살이 따갑고 땀이 흐르고 목이 마를수록 성기들은 자꾸 넝쿨 속으로만 들짐승처럼 파묻히었다. 나무 딸기, 덤불 딸기, 머루, 다래, 오디, 손에 닿는 대로 따서 연방 입으로 가져갔으나 입에 넣으면 눈 녹듯 녹아질 따름 떨적지근한 침을 삼키면 그만이었다. 간혹 이에 걸린다는 것이 아직 익지 않은 73)풋머루 풋다래요, 딸기 녹은 침물로는 그 쓰고 떫은 것까지 사양 없이 씹어 넘겨졌다. 처음엔 입술이 먼저 거멓게 열매물이 들었고 나중엔 온 볼에까지 묻어졌다. 먹을수록 목이 마른 딸기를 계연은 그 새파란 머루, 다래 섞인 둥그런 칡잎으로 하나 가득 따서 성기에게 주었다. 성기는 두 손바닥 위에다 그것을 받아서는 고개를 수그려 물을 먹듯 입을 대어 먹었다. 먹고 난 칡잎은 넝쿨 위로 던져 버리고 74)칡넌출이 담뿍 감겨 있는 다래 넝쿨 위에 비스듬히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계연은 두 번째 또 칡잎의 것을 성기에게 주었다. 성기는 성가신 듯이 그냥 비스듬히 누운 채 그것을 그대로 입에 들어부어 한 입 가득 물고는 나머지를 그냥 넝쿨 위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 그는 곧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세 번째 칡잎에다 딸기 알, 머루 알을 골라 놓은 계연은 그러나 성기가 어느덧 잠이 들어 있음을 보자 아까 성기가 하듯 하여 이번엔 제가 먹어 버렸다.
“참, 잘도 잔당게.”
계연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자기도 다래 넝쿨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드러누워 보았으나 곧 재채기가 났다. 그는 목이 몹시 말랐다. 배도 시장하였다.
갑자기 뻐꾸기 소리가 무서워졌다.
“넝쿨 속에는 샘물이 없는가?”
계연은 넝쿨을 헤치고 한참 들어가다 문득 75)모과나무 가지에 이리저리 얽히고 주렁주렁 열린 으름 넝쿨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익어 있음 쓰겄는듸.”
계연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아직도 파란 오이를 만지듯 듯한 딴딴한 으름을 제일 큰 놈으로만 세 개를 골라 따 쥐었다. 그리하여 한나절 동안 무슨 열매든, 손에 닿는 대로 입에 넣곤 하던 버릇으로 부지중 입으로 가져가 한번 76)답삭 물어 떼어 보았더니 이내 비릿하고 떫은 풀 같은 것이 입에 하나 가득 끼였다.
“아, 풋내 나!”
계연은 입의 것을 뱉고 나서 성기 곁으로 갔다. 해는 벌써 점심때도 겨운 듯 갈증과 함께 시장기가 잦았다.
“일어나 샘물 찾아가장게.”
계연은 성기의 어깨를 흔들었다.
성기는 눈을 떴다.
계연은 당황하여 새파란 으름 두 개를 성기의 코끝에 내어 밀었다. 성기는 몸을 일으켜 계연의 그 동그스름한 어깨와 목덜미를 껴안았다. 계연의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에서는 한나절 먹은 딸기, 오디, 머루, 다래, 으름들의 달짝지근한 풋내와 함께 황토흙을 찌는 듯한, 향긋한 고기(肉) 냄새가 느껴졌다.
까악까악하고 난데없는 까마귀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울며 날아갔다.
“칠불은 아직 멀지라?”
계연은 다래 넝쿨에 걸어 두었던 점심을 벗겨 들었다.
5
화개골로 들어간 체 장수 영감은 보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떠날 때 한 말도 있고 하니 지리산 속으로 아주 들어간 모양이라고 옥화와 계연은 생각하고 있었다.
“산중에서 아주 여름을 나시는갑네.”
옥화는 가끔 이런 말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끈기 있게 이야기책을 들고 앉곤 하였다. 계연의 약간 77)구성진 전라도 지방 토음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맑고 처량한 노래조를 띠어 왔다.
그동안 옥화와 계연의 사이에 생긴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옥화가 계연의 왼쪽 78)귓바퀴 위에 있는 조그만 79)사마귀 한 개를 발견한 것쯤이었다.
어느 날 아침 계연의 머리를 빗어 땋아 주고 있던 옥화는 갑자기 정신 잃은 사람처럼 80)참빗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머니, 왜 그리여?”
계연이 놀라 물었으나 옥화는 계연의 두 눈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따름 말이 없었다.
“어머니, 왜 그러시여?”
계연이 또 한 번 물었을 때 옥화는 겨우 정신이 돌아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다시 빗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계연은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옥화에게 다시 더 캐물을 도리도 없었다.
이튿날 옥화는 악양(岳陽)에 볼일이 좀 있어, 다녀오겠노라면서 아침 일찍이 머리를 빗고 떠났다. 성기는 큰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소낙비가 왔다. 계연이가 밖에서 빨래를 걷어 안고 들어오면서,
“어쩔 거나 어머니 옷 다 젖겄는듸!”
하였다. 그의 치맛자락은 바깥 날씨의 추운 비바람을 묻혀서 성기의 자는 낯을 스치게 하였다. 성기는 눈을 뜨는 길로 손을 뻗쳐 계연의 치맛자락을 거머잡았다. 계연은 빨래를 안은 채 고개를 홱 돌이켜 성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계연의 입가에 바야흐로 조그마한 81)우물이 패려 할 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머니 옷 다 젖겄는듸!”
또 한 번 이렇게 말하며 계연은 82)청으로 나갔다. 성기는 어느덧 또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성기가 다시 잠이 깨었을 때는 손님들이 청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계연은 그들의 83)치다꺼리를 해주고 있는 모양으로, 부엌에서,
“명태랑 풋고추밖엔 안주가 없는듸!”
하는 소리가 났다.
나중 손님들이 돌아간 뒤 성기는 계연이더러,
“어머니 없을 땐 손님 받지 말라고.”
약간 84)볼멘소리로 이런 말을 하였다.
“허지만 오늘 해 넘김, 이 술은 쉬어질 것인듸 그냥 두면 어머니 오셔서 화내시지 않을 것이요?”
계연은 성기에게 타이르듯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 있으니 그는 웃는 낯으로 성기 곁에 다가서며,
“오빠, 나 면경 하나만 사주시오. 똥그란 놈이 꼭 한 개만 있었음 쓰겠는듸.”
하였다.
이튿날 마침 장날이라 성기는 점심을 가지고 온 계연에게 미리 사 두었던 조그만 면경 하나와 찰떡 한 뭉치를 꺼내 주었다.
“아이고머니!”
면경과 찰떡을 보자 계연은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 꽃 같은 두 눈에 웃음을 담뿍 담은 채 몇 번이나 면경을 들여다보곤 하더니 그것을 품속에 넣고는 성기가 점심을 먹고 있는 곁에 돌아앉아, 어느덧 짝짝 소리를 내며, 그 떡을 먹고 있었다.
성기는 남이 보지 않게끔 전 앞에 사람 그림자가 얼씬할 때마다 자기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어 그것을 가리워 주곤 하였다. 딴은 떡뿐 아니라 계연은 참외고 복숭아고 엿이고 유과고 일체의 군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성미인 듯하였다. 집 앞으로 혹 참외 장수나 엿장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거나 하면 계연은 85)골무를 깁다 말고 86)바늘겨례를 붙이다 말고 뛰어 일어나 그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멀거니 바라보고 섰곤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성기가 절에서 내려오려니까 어머니는 어디 갔는지 눈에 뜨이지 않고, 계연이만이 청 끝에 걸터앉은 채 이웃 주막의 87)놈팡이 남자 한 사람과 함께 참외를 먹고 있었다. 성기를 보자 좀 무안스러운 듯이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곧 일어나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오빠!”
“………….”
그러나 성기는 계연에게는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대로 자기의 방으로만 들어가 버렸다. 계연은 먹던 참외도 청 끝에 놓은 채 두 눈이 휘둥그레져 성기의 뒤를 따라왔다.
“오빠, 왜?”
“………….”
“응, 왜 그리여?”
“………….”
그러나 성기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계연이가 두 팔을 성기의 어깨 위에 얹었을 때 성기는 맹렬히 몸을 뒤틀어 계연의 팔을 뿌리치고는 돌연히 미친 것처럼 뛰어들어 계연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처음 계연은,
“오빠, 오빠!”
하고 찡그린 얼굴로 성기를 쳐다보며 두 손을 내밀어 그의 매질을 막으려 하였으나 두 찰 세 찰 철썩철썩하고 그의 손이 얼굴에 와 닿자 계연은 방구석에 가 얼굴을 쿡 처박은 채 얼마든지 그의 매질에 몸을 맡기듯이 하고 있었다.
이튿날 상에 점심을 가지고 온 계연은 그 작고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문채 말이 없었으나 그의 꽃같이 선연한 두 눈엔 깊은 적의도 원망도 품어 있지 않은 듯하였다.
그날 밤 계연이가 혼자 강가에 나가 있는 것을 보고 성기는 가슴을 울렁거리며 그의 뒤를 쫓아 나갔다. 하늘엔 별이 파랗게 나 있었으나 나무 그늘은 강가를 88)칠야같이 뒤덮고 있었다.
“오빠.”
계연은 성기가 바로 그의 곁에까지 왔을 때 일어나 성기의 턱 앞으로 바싹 다가 들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불렀다.
“오빠, 요즘은 어쩔라꼬 만날 절에만 가 있은 것이여?”
그 몹시도 굴곡이 강렬한 전라도 지방 토음은 이렇게 속삭이었다.
그 즈음 성기는 장을 보러 오는 일 이외에는 절에서 일체 내려오지를 않았다. 옥화가 악양 89)명도에게 갔다 소낙비를 맞아 돌아온 뒤부터는 어쩐지 그와 계연의 사이를 전과 달리 경계하는 듯한 눈치라, 본래 심장이 약하고 남의 미움받기를 유달리 싫어하는 그는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노여움도 있고 하여 어쨌든지 절에서 배겨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성기는 말끝을 채 맺기도 전에,
“계연아, 계연아―.”
하고 또 어느덧 옥화의 계연이 찾는 소리가 들리어, 성기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 어머니도 어쩌면 저다지 야속할까?’
성기는 갑자기 목이 뿌듯해졌다.
반딧불이 지나갔다. 계연은 돌 위에 걸터앉아 손으로 90)여뀌풀을 움켜잡으며 혼자말같이 또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었으나 냇물 소리에 가리어 잘 들리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성기가 방 안으로 부엌으로 누구를 찾으려는 듯 기웃기웃하다가 좀 실망한 듯한 낯으로 그냥 절로 올라가고 있었을 때, 계연은 역시 이 여뀌풀 있는 냇물가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던 것이다.
6
사흘 뒤에 성기가 다시 절에서 내려오니까 체 장수 영감은 마루 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고, 계연이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아 빗고 새옷―새옷이래야 전날의 그 항라 적삼을 다시 빨아 다린 것―을 갈아입고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곁에 두고 수심에 잠겨 있던 계연은 성기를 보자 그 꽃같이 선연한 두 눈에 갑자기 기쁨을 띠고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그 노기를 띤 듯한 도톰한 입술은 분명히 그들 사이에 일어난 어떤 절박하고 불행한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막걸리 사발을 들어 영감에게 권하고 있던 옥화는 성기를 보자,
“계연이가 시방 떠난단다.”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옥화의 말을 들으면 영감은 그 전날 성기가 절로 올라가던 날 저녁에 돌아왔었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이니까, 즉 어저께 영감은 계연이를 데리고 떠나려고 하는 것을 하루 더 쉬어 가라고 만류를 해서, 그래 오늘 아침엔 일찍이 떠난다고 이렇게 막 행장을 차려서 나서는 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모두 나중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처음 그는 쇠뭉치로 돌연히 머리를 얻어맞은 것같이 골치가 띵하며, 전신의 피가 어느 한곳으로 쫙 모이는 듯한 양쪽 귀가 머리 위로 쫑긋이 당기어 올라가는 듯한, 혀가 목구멍 속으로 오그라들어 가는 듯한, 눈언저리에 퍼런 불이 번쩍번쩍 나는 듯한 어지러움과 노여움과 91)조마로움이 한데 뭉치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그의 전신을 휩쓸어 가는 듯하였다. 그는 지금껏 이렇게까지 계연에게 마음이 가 있어 떨어질 수 없게 되었으리라고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것이 이제 영원히 헤어지려는 이 순간에 와서야 갑자기 심지에 불을 켜듯 확 타오를 마련이던가, 하는 것이 자꾸만 꿈과 같았다. 자칫하면 체면도 염치도 다 놓고 엉엉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이 목이 징징 우는 것을, 그러는 중에서도 이 얼굴을 어머니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는 의식에서,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마루 끝에 궁둥이를 찧듯 털썩 앉아 버렸다.
“아들이 참 잘생겼소.”
영감은 분명히 성기를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성기는 그쪽으로 고개도 돌려 보지 않은 채, 그들에게 무슨 적의나 품은 듯이 앉아 있었다.
옥화는 그 동안 또 성기에게 역시 그 체 장수 영감의 이야기를 해 들려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 지리산 속에서 우연히 옛날 고향 친구의 아들이 된다는 낯선 양반을 만났다. 그는 영감의 고향인 여수에서 큰 공장을 경영하는 실업가로, 지리산 유람을 들어왔다가 이야기 끝에 이 영감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영감에게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살자고 한다. 영감은 문득 고향 생각도 날 겸 그 청년의 도움으로 어떻게 형편이 좀 필 것같이도 생각되어 그를 따라 여수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나오는 길이다. ―옥화가 무어라고 한참 하는 이야기는 대개 이러한 의미인 듯하였으나, 조마롭고 어지럽고 노여움으로 이미 두 귀가 멍멍하여진 그에게는 다만 벌떼처럼 무엇이 왕왕거릴 뿐 아무것도 분명히 들리지 않았다.
“막걸리 맛이 어찌나 좋은지 배가 부르당게.”
그동안 마지막 술잔을 들이키고 난 영감은 부채와 지팡이를 집어 들며 이렇게 말했다.
“여수 쪽으로 가시게 되면 영영 못 보게 되겠구먼요.”
옥화도 영감을 따라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 일을 누가 알간듸, 인연 있음 또 볼 터이지.”
영감은 커다란 92)미투리에 발을 꿰며 말했다.
“아가, 잘 가거라.”
옥화는 계연의 조그만 보따리에다 돈이 든 꽃주머니를 넣어 주며 93)하직을 하였다.
계연은 애걸하듯 호소하듯 한 붉은 두 눈으로 한참 동안 옥화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또 오너라.”
옥화는 계연의 머리를 쓸어 주며 다만 이렇게 말하였고, 그러자 계연은 옥화의 가슴에다 얼굴을 묻으며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옥화는 계연의 그 물결같이 흔들리는 동그스름한 어깨를 쓸어 주며,
“그만 울어, 아버지가 저기 기다리고 계신다.”
하였다. 그의 음성도 이젠 완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럼 편히 계시요.”
영감은 옥화에게 하직을 하였다.
“할아부지 거기 가 보시고 살기 94)여의찮그던 여기 와서 우리 한데 삽시다.”
옥화는 또 한 번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오빠, 편히 사시요.”
계연은 이미 시뻘겋게 된 두 눈으로 성기의 마지막 시선을 찾으며 이렇게 말했다.
성기는 계연의 이 말에 꿈을 깬 듯, 청에서 벌떡 일어나 계연의 앞으로 당황히 몇 걸음 95)어뚤어뚤 걸어오다간 돌연히 다시 정신이 나는 듯, 그 자리에 화석처럼 발이 붙어 버린 채, 한참 동안 96)장승같이 계연의 얼굴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편히 사시요.”
이렇게 두 번째 하직을 하는 순간까지도 계연의 그 시뻘건 두 눈은 역시 성기의 얼굴에서 그 무슨 기적과도 같은 새로운 명령만을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러나 성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뻔하다가 겨우 버드나무에 몸을 기댈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계연의 시뻘겋게 상기한 얼굴은 거기 옥화와 그의 아버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이 성기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인 성기의 두 눈엔 다만 불꽃이 활활 타오를 뿐, 아무런 새로운 명령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만치 가고 있는 계연의 항라 적삼을, 고운 햇빛과 늘어진 버들가지와 산울림처럼 울려오는 뻐꾸기 울음 속에 멀거니 바라보고만 서 있는 성기일 뿐이었다.
장터 위를 지나, 비스듬히 올라간 산모퉁이를 돌아 길은 구례 쪽으로 나고 모퉁이를 도는 곳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계연은 이 소나무 밑까지 오자 소나무 둥치에다 얼굴을 대고 서서 한나절 동안이나 소리를 내어 울고 갔다…… 하는 것을, 그러나 그 이듬해 늦은 봄에야 성기는 알게 되었다.
7
성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이듬해 97)우수(雨水) 98)경칩(驚蟄)도 다 지나, 99)청명(淸明) 무렵 비가 100)질금거리는 때였다. 주막 앞에 늘어선 버들가지는 다시 실같이 늘어지고 살구, 복숭아, 진달래들이, 골목 사이로 산기슭으로 울긋불긋 피고 지고 하는 날이었다.
아들의 101)미음 상을 차려 들고 들어온 옥화는 성기가 미음 그릇 비우는 것을 본 뒤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너, 함경도 쪽으로 가 보고 싶냐?”
“………….”
성기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장가들어 살겠냐?”
“………….”
성기는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해 아직 봄이 오기 전, 보는 사람마다 성기의 102)회춘을 거의 다 단념하곤 하였을 때, 옥화는 이왕 죽고 말 것이라면 어미의 심정이나 알고 가라고, 그래 그 체 장수 영감은 서른여섯 해 전 남사당을 꾸며 와 이 화개 장터에 하룻밤을 놀고 갔다는, 자기의 아버지임에 틀림이 없었다는 것과 계연은 그 왼쪽 귓바퀴 위의 사마귀로 보아 자기의 동생임이 분명하더라는 것을, 103)통정하노라면서 자기의 같은 왼쪽 귓바퀴 위의 검정 사마귀까지를 그에게 보여 주곤 하였다.
“나도 처음부터 영감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섬짓하긴 했다. 그렇지만 설마 했지, 그렇게 남의 간을 뒤집어 놀 줄이야 알었나! 하도 아슬해서 이튿날 악양으로 가 명도까지 불러 봤드니, 요것도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이 104)재출대는구나, 차라리 망신을 했지.”
옥화는 잠깐 말을 끊었다. 성기는 두 눈에 불을 켜는 듯한 105)형형한 광채를 띠고 그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또 모르지만 한 번 알고 나서야 인륜이 있는데 어쩌겠냐.”
그리고 부디 에미 106)야속타고나 생각지 말라고, 옥화는 아들의 뼈만 남은 손을 잡고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옥화의 이 마지막 하직같이 하는 통정 이야기에 의외로 성기는 도로 힘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 불타듯한 형형한 두 눈으로 천장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성기는 무슨 새로운 결심이나 한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 함경도 쪽으로 가 볼 생각도 없다. 집에서 장가들어 살림을 할 생각도 없다, 하는 아들에게 그러나 옥화는 전과 같이 이제 고지식한 희망을 두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어쩔라냐? 너 졸대로 해라.”
“………….”
성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도로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한 107)달포나 넘어 지난 뒤였다.
성기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산나물이 화개골에서 연달아 자꾸 내려오는 이른 여름의 어느 장날 아침이었다. 108)두릅회에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키고 난 성기는 그 어머니에게,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맞춰 주.”
하였다.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지도 다시 한 보름이나 지나, 뻐꾸기는 또다시 산울림처럼 유창하게 울고 늘어진 버들가지엔 햇빛이 젖어 흐르는 아침이었다. 새벽녘에 잠깐 가는 비가 지나가고, 날은 다시 유달리 맑게 개인 화개 장터 갈림길 위에서, 성기는 그 어머니와 하직을 하고 있었다. 갈아입은 109)옥양목 고의 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동여매고 난 성기는 새로 맞춘 새하얀 나무 엿판을 110)질빵해서 111)느직하게 엉덩이 즈음에다 걸고 있었다. 윗목판에는 새하얀 가락엿이 반 넘어 들어 있었고, 아랫목판에는 팔다 남은 이야기책 몇 권과 간단한 112)방물이 좀 들어 있었다.
그의 발 앞에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로 나 있었으나, 화개골 쪽엔 처음부터 등을 지고 있었고, 동남으로 난 길은 하동, 서남으로 난 길이 구례, 작년 이맘때도 지나 그녀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 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퉁이 고갯길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환히 장터 위를 굽이돌아 구례 쪽을 향했으나, 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구례 쪽을 등지고 하동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와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백민」(1948)
♠핵심 정리
▷갈래 단편 소설
▷배경 시간적 - 구체적인 시간은 나오지 않음
공간적 - 전라, 경상도의 경계 지역인 화개 장터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성격 무속적(巫俗的), 운명적(運命的)
▷의의 민속적인 소재로 한국인의 토속적인 삶과 운명관을 시적으로 승화시킴
▷제재 삼대에 걸쳐 대물림되는 숙명적 운명(역마살)
▷주제 운명에의 순응과 그에 따른 인간의 구원
♠구 성
시간적 순서에 따른 5단 구성
▷발단 옥화네 주막에 체 장수 영감과 딸 계연이 찾아옴
▷전개 옥화의 아들 성기는 계연과 서로 사랑을 느낌
▷위기 옥화는 계연이 동생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가짐
▷절정 체 장수 영감이 계연을 데리고 떠나고, 계연은 옥화의 이복 동생임이 밝혀짐
▷결말 성기는 병석에서 일어나 운명에의 순응. 길을 떠남
♠등장 인물
▷성기 역마살을 타고난 인물. 그의 역마살을 제거하기 위한 가족의 노력과 계연과의 사
랑에 의해 해결되려 하던 역마살의 극복이 끝내 좌절되자, 결국 방랑의 운명에 순
응하여 고향을 떠남
▷옥화 화개 장터에서 주막을 운영하는, 성기의 어머니이자 체 장수의 딸. 아들의 역마살
제거에 실패하고 운명에 순응하게 됨
▷체 장수 옥화의 부친. 36년 전 남사당패의 하나가 되어 주막의 여인과의 사이에서
옥화를 낳음
▷계연 체 장수의 딸. 옥화의 이복 자매
♠줄 거 리
화개 장터에서 주막을 꾸려 가며 혼자 살고 있는, 마음씨 착하고 인심이 좋은 옥화는 아들 성기의 타고난 역마살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사주 팔자에 의해 역마살이 끼면 집에 머물지 못한다기에 이를 지우기 위해 성기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쌍계사란 절에 보냈었다.
어느 날, 나이 예순도 훨씬 더 넘은 체 장수 영감이 쳇바퀴와 바닥감들을 걸머진 채 과년한 딸을 데리고 옥화네 주막으로 와서 그 딸 계연을 당분간 맡기고 떠난다. 그리고 옥화는, 성기가 중질을 해서 못다 푼 살을 책 장사를 통해서 풀어 보려고 장날에는 책 장사를 시킨다.
계연은 옥화에게 이야기책을 들려 주다가 성기와 마주보게 되고, 성기는 갑자기 가슴이 떨이고 눈에 생기를 띠게 된다. 그러다가 성기와 계연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성기가 결혼하여 역마살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옥화는 아들 성기를 정착시키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옥화는 계연의 왼쪽 귓바퀴에 있는 조그만 사마귀 한 개를 우연히 발견하였다. 계연의 귓바퀴에 난 사마귀를 보고 놀란 옥화는 계연이 자신의 동생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옥화가 명도를 찾아가 알아 본 바로는 계연이 옥화의 이복 동생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성기와 계연의 사랑은 천륜에 의해 운명적으로 좌절된다.
옥화는, ‘체 장수 영감이 서른여섯 해 전 남사당을 꾸며 이 화개 장터에 와서 하룻밤 놀고 갔다는, 자기의 아버지’라는 것과 ‘계연의 왼쪽 귓바퀴 위의 사마귀로 보아 자기의 동생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성기에게 이야기한다. 성기는 이 일에 충격을 받고 심하게 중병을 앓게 된다. 그러나 성기는 결국 그 병을 이겨 내고는 엿판을 지고 육자배기 가락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운명에 순응, 역마살을 따라 화개 장터를 떠난다.
♠작품의 이해와 감상
‘역마(驛馬)’는 1948년 「백민」에 발표된 김동리의 단편 소설로 이른바 역마살로 표상되는 ‘당사주(唐四柱)’라는 동양인과 한국인의 깊은 운명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역마살’이라는 민속적인 소재를 통해 토속적인 삶과 그 운명을 다룬 이 작품은, 자연의 법칙에 인간의 생명적인 리듬이 무리없이 결합되는 것이라는 작가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보여 주는 ‘무녀도’, ‘황토기’, ‘바위’ 등과 함께, 전통 지향적인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김동리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 운명적으로 주어진 역마살에 둘러싸여 있으며, 소설의 배경인 화개 장터 역시 역마살이 낀 장돌뱅이들의 집결지이다. 이 역마살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결혼을 통해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성기가 사랑하던 계연이 옥화의 이복 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불가능해지게 된다. 성기가 역마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결말은, 운명을 거스르지 않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 한국적인 운명관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삶의 한 형식으로 운명에의 순응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운명에 의해 사회의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변두리 인간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옥화나 그의 아버지인 체 장수 모두 운명적으로 변두리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아들인 성기 역시 역마살을 타고나 변두리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자 옥화는 불교의 힘을 빌어 이 역마살을 극복하려고 성기를 쌍계사에 보내기도 하고, 또한 계연과 결혼시켜 정착하게 하려 한다.
다분히 토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역마살이라는 운명관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이 작품은 운명을 거역하기보다는 거기에 슬기롭게 순응함으로써 생의 리듬을 얻고 있는 한국적인 인간상, 즉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것은 작자의 구경적 생에 대한 인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김동리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절망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역마’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절망은 허무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절망과는 다르다. 김동리의 허무 의식은, 그가 허무를 모든 인간이 짐 지고 있는 공통된 운명이라고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삶의 허무하다는 것, 그것은 허무를 생활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인간은 이 허무를 거역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다. 즉 허무는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이 허무를 타개하는 것은 인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김동리는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를 초극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동리는 ‘역마’를 통해 동양적 운명관을 보여 주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등장 인물들이 운명에 패배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어둠의 측면과 전통이 하나의 질서관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자연의 법칙 앞에서 인간의 생명적인 리듬감이 무리없이 결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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