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욕망을 찾아서(2)-자크 라캉
이가 빠진 동그라미
한 조각을 잃어 버려 이가 빠진 동그라미 슬픔에 찬 동그라미
잃어버린 조각 찾아 데굴데굴 길 떠나네 어떤 날은 햇살 아래
어떤 날은 소나기로 어떤 날은 꽁꽁 얼다 길옆에서 잠깐 쉬고
에야디야 굴러가네 어디 갔나 나의 한 쪽 벌판 지나 바다 건너
갈대 무성한 늪 헤치고 비탈진 산길 낑낑 올라 둥실 둥실 찾아가네
한 조각을 만났으나 너무 작아 헐렁헐렁 다른 조각 찾았으나
너무 커서 울퉁불퉁 이리 저리 헤매 누나 저기 저기 소나무 밑
누워 자는 한 쪼가리 비틀 비틀 다가가서 맞춰 보니 내 짝일세
얼싸 좋네 찾았구나 기쁨에 찬 동그라미 지난 얘기하려다가
입이 닫혀 말못하니 동그라미 생각하네 이런 것이 그렇구나
냇물 가에 쭈구리고 슬퍼하던 동그라미 애써 찾은 한 조각을
살그머니 내려놓고 데굴데굴 길 떠나네 길 떠나네 길 떠나네
길 떠나네 길 떠나네................
70년대 말 내가 좋아했던 송골매의 ‘이가 빠진 동그라미’란 노래이다. 경쾌한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자신의 이상적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청춘을 노래한 것 같은 노랫말로 한동안 꽤 인기를 끌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노래에 나온 위의 모습의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모습과 유사하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 주체란 한쪽 모서리가 잘라져 나간 동그라미처럼 어떤 결함이자 결핍이다. 모서리가 빠져나간 모습, 이가 빠진 모습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남근의 부재일 수도 있고 거세불안에 따른 남근 감추기일 수도 있다. 아무튼 한 조각을 잃어 버려 결핍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슬픔에 찬 주체의 모습이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 헤매듯이 주체 또한 잃어버린 작은 대상(objet petit )을 찾아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는 것이 주체가 가는 길이다.
한 조각이 잘라져 나가기 전의 완벽한 동그라미는 주체가 형성되기 전의 완벽한 나(자아)이다. 어린 아기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환호성을 울리며 반가워하듯이 거울 단계(상상계) 속에 비친 이상적 자아(ideal-I)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의 등장으로 아이는 상징계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주체는 분열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아버지에 의한 금지’로 봄으로써 언어적 질서의 세계로 편입으로 상징계를 설정한다.) 이때 인간은 자아의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는 충격을 받는 것이다. 이 충격을 마음 깊은 곳에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아가는 일, 그것이 인간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주체란 이상적 자아의 한 조각을 잃어버린, 이가 빠진 동그라미 같은 결핍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이처럼 끊임없이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아서 헤매는 운명을 타고 난 존재이다. 그런데 떨어져나간 한 조각은 본디 내 것이지만 더 이상 내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마음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영원히 나를 만족시킬 수 없는 타자의 욕망을 쫒는 것임을 말한다.
입이 닫혀 말 못하니 동그라미 생각하네 이런 것이 그렇구나.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았다는 순간 동그라미는 더 이상 입이 닫혀 말을 못한다. 나는 이 한 줄의 노랫말이 어쩌면 라캉의 이론보다도 더 인간과 세계를 둘러싼 진리의 섬광을 번듯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결국 완벽한 자아를 찾는 것과 완벽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순간(라캉이 말하는 쥬이상스) 동그라미는 언어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절정의 순간에 할 말을 잃는 것과 같고 완벽한 자아를 성취하는 순간 언어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절대적 절정의 순간은 언어의 매개로 이루어지는 상징계에서 추방됨을 의미한다.
길 떠나네 길 떠나네.........
주체는 결핍이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망은 작은 대상을 찾아 헤매고 대상을 찾았다고 희열을 느끼는 순간도 잠시, 또 다른 결핍이 생겨나고, 또 다른 대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헤매는 모습이 인간의 삶인 것이다. 내게는 ‘길 떠나네’라는 송골매의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후렴구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주체의 길과 시니피앙의 길
라캉은 이러한 주체의 운명과 기표(시니피앙)의 운명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주체는 결핍이고 욕망은 환유인 것이다. 언어의 비극은 어떤 기표(시니피앙)도 기의(시니피에)와 완벽하게 결합하여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그녀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향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열망(기의)을 사랑이라는 말(기표)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또한 그는 그녀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이제껏 그와 그녀 사이의 관계가 심각히 훼손될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그녀를 붙들고 싶은 절박한 욕구에서 내뱉는 “사랑해”라는 말이 튀어 나오는 순간 사랑은 저만치 달아날 것 같은 불안이 드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 빠진 이 남자가 처한 입장이 시니피앙이 처한 입장과 같다. 하나의 시니피에와 결합하여 완벽한 의미를 산출하려는 시니피앙의 노력은 시니피에와 결합하는 순간 수포로 돌아간다. 그 결합의 순간, 붙들어 맸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니피에는 저만치 달아난다.
기표의 운명이 완벽한 의미를 찾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미끄러지는 환유의 과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의미의 이해를 위해 사전을 찾는 과정과 흡사하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자. 행복의 정의를 다음의 국어사전에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정의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하나의 기표를 다른 문장 속의 다른 기표로 대체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정의에 만족할 수 없다면 기표는 또 다시 다른 기표로 대체해 가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기표를 다른 기표를 대체시키는 일, 그것이 즉, 환유이다.
s1(기의)---> s2---> s3---> s4---> s5--->.......
S1(기표)---> S2---> S3---> S4---> S5--->......
밤새워 원고지를 수십 장씩 찢어가며 글을 써본 사람은 알고 있다. 글쓰기란 머릿속에 떠오르는 창조적 영감을 휘갈겨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기표들을 계속적으로 대체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이처럼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서 끊임없이 기표들을 바꾸어 가는데 그러한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기 욕망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그런데 라캉처럼 끝없는 기표로 욕망을 대체해 나간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요. 관점의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한편 시뮬라크르화된 세상에서 참과 진리의 행방은 공간밖으로 내쫓아 소멸하는 건가요. 소외된 현실에서 존재의 환원을 거듭해야 하는 현실이 힘에 부칠때가 있답니다...ㅠ,ㅠ ~
시뮬라크르화된 세상에서 참과 진리의 행방은 공간밖으로 내쫓아 소멸하는 건가요? 라캉보다 더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무래도 욕망의 끝은 타나토스, 즉 죽음을 의식한 것 같아요. 그런데 후기에 갈수록 주이상스에 대해 강조를 많이 했다고 하네요. 이런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러한 욕망이 인간을 살게하는 힘이다. 욕망을 누려라! 라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기표가 끝없이 다른 기표로 대체된다는 것은 기표가 기의를 찾아가는 도달할 수 없는 수고의 과정이고, 인간이 작은 대상, 즉 본질적인 만족을 가져올 수 없는 욕망의 가상적/임시적 충족대상을 찾아가는 생의 과정이라는 것이네요.수사학과 문학의 과정도 그런 생의 과정의 일부인 것이네요. 완벽하게 욕망이 충족되는, 즉 본질적 만족을 가져오는쥬이상스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라캉은 회의적일 것 같은데. 글쓰기(문학하기)가 혹 새로운 삶의지평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요. 욕망의 만족을 위한 작고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고 자신의 분열된 주체를 회복하는경지로 나가게 우릴 돕는다면.
글쓰기가 새로운 삶의 지평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서 인생 전체의 욕망을 더듬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들어다 보는 것, 그것이 욕망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확실히 글쓰기에는 뭔가가 있어요.
니코스님의 라캉.. 글 여러 편 중, 전 이 글이 가장 좋습니다.^^종종 흥얼거리던 송골매의 노랫말이 이리도 심오했군요. 그 중에 '입이 닫혀 말 못하나' 와 같은 증세가 요즘 제게 간간히 나타나는데, 이는 '완벽한 자아를 찾는 것과 완벽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순간(라캉이 말하는 쥬이상스)'에 다다른 도인의 경지로 제가 먼저 발을 디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하~ 기표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기의들.. 순간순간 그런 경험을 하고요. 예를 들어 소리나 색깔, 공기의 흐름 등이 개입을 하는 상황 같은 거요. 무의식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상황이요. 그럴 때 기표가 그 모든 센스들을 포함할 수 있을까.. 요즘 그런 회의가 들곤 해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기표의 그물을 던져 기의를 포획하려는 순간 빠져 나가버리는 그 허무함과 틈새가 있기에 우리 존재가 성숙해지며 글쓰기에 매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첫댓글 그런데 라캉처럼 끝없는 기표로 욕망을 대체해 나간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요. 관점의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한편 시뮬라크르화된 세상에서 참과 진리의 행방은 공간밖으로 내쫓아 소멸하는 건가요. 소외된 현실에서 존재의 환원을 거듭해야 하는 현실이 힘에 부칠때가 있답니다...ㅠ,ㅠ ~
시뮬라크르화된 세상에서 참과 진리의 행방은 공간밖으로 내쫓아 소멸하는 건가요? 라캉보다 더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무래도 욕망의 끝은 타나토스, 즉 죽음을 의식한 것 같아요. 그런데 후기에 갈수록 주이상스에 대해 강조를 많이 했다고 하네요. 이런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러한 욕망이 인간을 살게하는 힘이다. 욕망을 누려라! 라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기표가 끝없이 다른 기표로 대체된다는 것은 기표가 기의를 찾아가는 도달할 수 없는 수고의 과정이고, 인간이 작은 대상,
즉 본질적인 만족을 가져올 수 없는 욕망의 가상적/임시적 충족대상을 찾아가는 생의 과정이라는 것이네요.
수사학과 문학의 과정도 그런 생의 과정의 일부인 것이네요. 완벽하게 욕망이 충족되는, 즉 본질적 만족을 가져오는
쥬이상스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라캉은 회의적일 것 같은데. 글쓰기(문학하기)가 혹 새로운 삶의
지평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요. 욕망의 만족을 위한 작고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고 자신의 분열된 주체를 회복하는
경지로 나가게 우릴 돕는다면.
글쓰기가 새로운 삶의 지평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서 인생 전체의 욕망을 더듬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들어다 보는 것, 그것이 욕망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확실히 글쓰기에는 뭔가가 있어요.
니코스님의 라캉.. 글 여러 편 중, 전 이 글이 가장 좋습니다.^^
종종 흥얼거리던 송골매의 노랫말이 이리도 심오했군요. 그 중에 '입이 닫혀 말 못하나' 와 같은 증세가 요즘 제게 간간히 나타나는데, 이는 '완벽한 자아를 찾는 것과 완벽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순간(라캉이 말하는 쥬이상스)'에 다다른 도인의 경지로 제가 먼저 발을 디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하~
기표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기의들.. 순간순간 그런 경험을 하고요. 예를 들어 소리나 색깔, 공기의 흐름 등이 개입을 하는 상황 같은 거요. 무의식이 끊임없이 요동치는 상황이요. 그럴 때 기표가 그 모든 센스들을 포함할 수 있을까.. 요즘 그런 회의가 들곤 해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들이 있다는 것이 희망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기표의 그물을 던져 기의를 포획하려는 순간 빠져 나가버리는 그 허무함과 틈새가 있기에 우리 존재가 성숙해지며 글쓰기에 매달리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