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Ⅵ 주제 말의 힘 -으르렁말과 가르랑말
【 읽기 전 활동 】
◉ ‘으르렁’과 ‘가르랑’이란 단어의 어감의 차이를 말해 보자.
◉ 우리가 나누는 대화 가운데서 듣기에 거슬리는 말을 찾아 발표해 보자.
【 으르렁말과 가르랑말 】
미국의 언어학자 하야카와는 「생각과 행동 속의 언어」라는 책에서 언어의 함축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으르렁말(snarl words)과 가르랑말(purr words)을 구별했다. 그가 든 예를 인용하자면 “이런 버러지 같은 놈! You filthy scum!”은 으르렁 말이고, “넌 세상에서 제일가는 여자야(you’re the sweetest girl in all the world)”는 가르랑말이다. 앞의 말은 언어를 사용해서 남을 도발하거나 위협하는 으르렁거림이고, 뒤의 말은 고양이가 가르랑거리거나 개가 꼬리를 흔들 듯 남의 호감을 사기 위한 언어 행위라는 것이다. 으르렁말이나 가르랑말에서는 언어의 소통 기능 가운데 중립적인 정보적 기능이 거의 사라지고, 그 대신 표현적 기능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으르렁말이나 가르랑말의 의미는 개념적 의미라기보다는 감정적 의미다. 으르렁말의 극단적인 형태는 욕설을 포함한 각종 금기어1)이고, 가르랑말의 극단적인 형태는 연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과장된 찬사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붙이는 갖가지 존칭 수식사2)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여러 단계의 으르렁말과 가르랑말들이 있다. 어떤 말들은 그 함축하는 바가 긍정적․우호적이고, 어떤 말들은 그 함축하는 바가 부정적․적대적이다.
예컨대 ‘중매인’이 맡은 역할은 점잖지만 ‘뚜쟁이’가 하는 짓은 천하다. ‘정치가’는 ‘위정자’보다 더 존경받고, ‘밀정’이나 ‘간첩’이나 ‘첩자’는 ‘첩보원’이나 ‘정보원’보다 더 경멸받는다. 나는 ‘신앙인’과는 얘기가 통하지만, ‘예수쟁이’와는 도무지 얘기가 안 통한다. 비교 대상이 된 단어들의 개념적 의미는 같지만, 감정적 의미는 판이하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은 정보적 기능과 표현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고, 그래서 그 말 속에는 개념적 의미와 감정적 의미가 중첩돼 있다. 그 표현적 기능이 커질수록, 그래서 감정적 의미를 포함한 함축적 의미가 더 커질수록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으르렁말이나 가르랑말에 가까워진다. 으르렁말이나 가르랑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정당 대변인을 포함한 정치적 리플릿 작성자들이나 상품 광고 제작자들이다. 그들이 주로 노리는 것은 객관적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 우리 모두는 일상적인 의사 소통 과정에서 무심코, 또는 의도적으로 으르렁말과 가르랑말을 사용한다. 착취․칼잡이․매국노․투기꾼․야합3)․술수4) 같은 말들이 으르렁말의 범주에 속한다면, 창의력․자유․녹색 운동․동지․애국․연대 같은 말들은 가르랑말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말들은 그 말을 대하는 사람의 경험과 신념에 따라 으르렁말에 속하기도 하고, 가르랑말에 속하기도 한다. 자유주의․공산주의․민족주의․사회주의․공화주의․좌파 같은 정치 언어들이 그렇다. 이 말들은 으르렁말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든 가르랑말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든, 그들에게 이 말들의 사전적 의미, 즉 개념적 의미는 거의 잊혀진다. 심지어는 ‘미국적’이라는 말도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은 제국주의․독재 정권 옹호․인종 차별․문화적 천박성 따위의 의미를 함축하는 으르렁말로 받아들여지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이 말이 자유․기회․풍요․너그러움 등의 의미를 함축하는 가르랑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함축적 의미는 또 어떤 단어에 고유하게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쉽게 생기고 사라지고 변한다. 으르렁말의 범주에 속하는 금기어들(주로 성기․성행위․배설 행위․죽음․질병․신체적 불리․사회적 불리와 관련된 노골적인 말들)의 부정적 연상을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완곡어5)들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감옥’이라는 말의 부정적 연상을 제거하기 위해 ‘형무소’를 거쳐 ‘교도소’라는 멋진 말이 생겼지만, 사람들은 ‘감옥’이나 ‘형무소’라는 말에 붙어 있던 부정적인 함축 의미를 이내 ‘교도소’에도 그대로 이식6)해서 받아들였다. ‘식모’나 ‘차장’이나 ‘운전사’라는 말을 대치하기 위해 ‘가정부’나 ‘안내양’이나 ‘기사’라는 말이 만들어졌지만, 그 새 말들이 처음에 지녔던 산뜻한 함축적 의미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국가정보원이 어지간히 잘해나가지 않는 한, ‘안기부라는 말이 지녔던, 고문이나 공작 정치와 관련된 함축적 의미가 국정원으로 옮겨 붙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적․사회적으로 민감한 금기어들을 완곡어로 바꾸려는 진보주의자들의 태도와 실천을 90년대 들어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C)’이라는 비아냥 섞인 이름을 얻었다. PC의 지지자들은 ‘검둥이’나 ‘흑인’이라는 말 대신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정신 박약7)’이라는 말을 대치하기 위해 ‘학습 곤란’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말들도 이내 옛말이 지녔던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완곡어의 반대자들은 언어가 반영하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의가 존속하는 한, 말을 다듬고 바꾸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완곡어의 지지자들은 편견을 드러내는 언어의 사용 자체가 불평등과 불의를 고착화8)한다고 반박한다. 둘 다 일리가 있는 견해다. 확실한 것 하나는, 언어의 통제와 조작이 PC지지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 고종석, 국어의 풍경들, 문학과 지성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