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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의성현(義城縣)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5권 : 경상도(慶尙道) 의성현(義城縣)
동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5리,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40리, 서쪽으로 군위현(軍威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9리, 비안현(比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소문국(召文國)이었다. 신라가 이를 취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이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고,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현령(縣令)을 두었고, 신종(神宗)은 일찍이 적에게 함락되었다해서 감무(監務)로 강등시켰고, 충렬왕(忠烈王)은 대구(大丘)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현령(縣令)으로 삼았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소문(召文)ㆍ문소(聞韶)
【성씨】 본현 김(金)ㆍ심(沈)ㆍ홍(洪), 정(丁)ㆍ강(康)ㆍ설(薛)ㆍ노(盧) 지금은 노(魯)로 쓴다. 김(金) 모두 촌성(村姓)이다. 왕(王)ㆍ유(柳) 모두 개경(開京). 오(吳) 장기(長鬐). 강(姜) 진주(晉州). 박(朴) 속성(續姓)이다.
【풍속】 검소ㆍ솔직함을 숭상하고, 잠상(蠶桑)에 힘쓴다 관풍안(觀風案). 주민이 순박하다 조서강(趙瑞康)의 시다. 『신증』 운반에는 곡거(曲車)를 쓴다.
【형승】 산천(山川)은 백 리(百里)이고 연화(煙火)는 천 가(千家)이다 이발(李潑 호는 동암(東巖))의 시에, “깨끗한 산천은 백 리요, 태평한 연화(煙火)는 천 가라.”하였다.
【산천】 금성산(金城山) 현 남쪽 25리에 있다. 선암산(船巖山) 현 남쪽 50리인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있다. 금학산(金鶴山) 현 남쪽 25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서남쪽 30리에 있다. 모현(茅峴) 현 동쪽 45리에 있다. 마산(馬山) 현 북쪽 20리에 있다. 황산(黃山) 현 동쪽 50리에 있다. 산중에는 뽕나무가 많이 있어, 인근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해서 누에를 기른다. 빙산(氷山) 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빙혈(氷穴) 빙산의 큰 바위 밑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높이가 4척 8촌, 옆으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밑에 직하(直下)로 나 있는데 넓이가 1척, 길이는 1척까지는 잴 수 있는데 아래로는 굽어 있어 잴 수 없다. 입하(立夏) 뒤로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딱딱하게 되고,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ㆍ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 한다. 혈동(穴洞) 사곡리(舍谷里)에 있는데, 현에서 동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바위구멍[岩穴]이 아주 깊어서, 음수(陰獸)가 숨어 있는가 의심스럽다.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드리면 곧 응험이 있다. 천암(穿巖)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구부리면 깊은 못에 다다르며 구멍이 바위 가운데 있다. 기괴하고 이상하며 가뭄든 해에 기우제를 지내면 바로 응한다. 장천(長川) 현 서쪽 3리에 있다. 근원은 모현(茅峴)에서 나온다. 하천(下川) 현 남쪽 20리에 있다. 그 근원은 빙산에서 나오며, 현 서쪽 20리에서 남천(南川)과 합류되어 병천(幷川)이 되는데, 바로 비안현(比安縣) 쌍계(雙溪)의 상류이다. 황산천(黃山川) 현 동쪽 34리에 있다. 그 근원은 황산(黃山)에서 나온다. 바로 안동부(安東府) 독천(禿川)의 상류이다. 탄지(炭池) 현 남쪽 30리에 있다.『신증』 둔덕산(屯德山) 현 동쪽 3리에 있다. 두음산(豆音山) 현 서쪽 35리에 있다. 백장령(百丈嶺) 현 서남쪽 28리에 있다.
【토산】 사(絲)ㆍ솜[緜] 잠실(蠶室)은 현 북쪽 사진리(沙眞里)에 있다. 꿀[蜂蜜]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옷[漆]ㆍ송이[松蕈]
【봉수】 마산(馬山)봉수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의 감곡산(甘谷山)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고성산(古城山) 봉수 현 남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영니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영니산(盈尼山) 봉수 현 남쪽 25리에 있다.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의 승목산(繩木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누정】 문소루(聞韶樓) 객사(客舍) 북쪽에 있다. ○ 화지원(華之元)의 기(記)에, “현령 이광제(李光濟)군이 화산(花山)을 지나는 길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네는 우리 현(縣)의 공관(公館)을 아는가. 지세가 낮고 건물이 비좁아서 손님이라도 올 경우 여름이면 답답해서 숨쉬기도 어렵다네. 화풀이를 현령(縣令)에게 하고 관리들을 못살게 굴어서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네. 좀 넓게 새로 짓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전쟁이 10년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편히 살 수도 없었지. 다행히도 주상 전하께서 천명(天命)ㆍ인심(人心)에 순응하시어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반정(反正)하였으니,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고 겨우 숨을 돌리게 된 것이 몇 년 못 되었소. 이 마당에서 역사를 한다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것이요, 또 개작(改作)한다는 비난을 살 것도 같아서, 다만 관청의 북쪽에 옛터가 있길래 이를 누정으로 세우고자 하니, 고을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서 일해 줬다네. 산에서 재목을 얻고 흙을 파서 기와로 만들어 집을 짓되, 농한기를 틈타서 며칠 만에 준공을 보았다네. 역사를 한 사람은 백성이 아니면 중들이었는데, 모두들 품삯을 주어서 노고를 보상했네. 이후로는 사신으로 이 누정에 오른 자는 즐거워하기만 하고 화내는 일이 없어서, 화풀이가 백성을 박탈하는 재앙이 없게 되겠지. 아직 다 되지 않은 것은 단청 뿐일세. 이제 임기가 다 차서 언제 떠날지 모르겠네. 나를 위해서 그 본말(本末)을 적어주게. 그리고 성명을 써두어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주도록 하세.’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현에 북루(北樓)가 있다는 것은 나 또한 알던 바이다. 옛날 학사 김지대(金之岱)가 일찍이 이 도(道)의 안렴(按廉)으로 있을 때, 이 누대에 대해 읊기를, ‘문소(聞韶)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 백여 척 되는 높은 누정이 있네.’ 했었다. 어느 해에 이것이 쓰러지게 되었는가. 부로(父老)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마 현명한 이가 이를 일으켰고 우둔한 이가 이를 쓰러지게 했을 것이니, 다시 이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현명한 일이겠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우둔한 것이다. 이(李)군은 청렴하게 정치를 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되 괴롭히지 않았고, 재물을 없애고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오랫동안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일으켰으니, 현명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건축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나 조망의 넓고 좁은 데에 대해서는 내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잠시 대가의 손을 기다리기로 하자.” 하였다. ○ 김지대(金之岱)의 시에, “문소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는 백여 척 되는 높다란 누정이 있네. 향기로운 바람 십 리(十里)에 구슬 발이 걷히고, 밝은 달 일성(一聲)으로 옥피리 날리네. 연기는 가벼워 버들 그림자가 서로 가늘게 이어졌고, 비는 개어서 산빛이 짙은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용황(龍荒 흉노(匈奴))이 팔을 꺾은 갑지랑(甲枝郞), 그냥 난간에 기대고 있는 것 더욱 애석하네.” 하였다. 지대의 이 시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다가 시판(詩板)을 잃었다. 그 뒤 10년에 어떤 군수가 이 시를 몹시 찾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현수(縣守) 오적장(吳廸莊)에게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일(張鎰)의 아들 정하(廷賀)와 약혼했었다. 오(吳)가 딸을 데리고 임지에 간 동안 정하는 다른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오녀(吳女)가 듣고 미쳐서 함부로 지껄이다가 갑자기 이 시를 암송해내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베껴서 바치니 군수가 놀랐다고 한다. ○ 고려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깨끗하여, 밤은 고요하고 발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버들 빛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향기로운 내[煙] 모락모락하는 절간[僧家], 백성 걱정에 금방 변한 흰머리[鶴髮], 비[雨]를 얻어 기슭에 돌아온 검은 모자[烏紗], 여섯 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 사신(使臣)에게 부끄럽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문소(聞韶)의 누정 아름다운 곳, 비를 피해 오르니 해가 기운다. 풀빛의 푸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복숭아 꽃의 따뜻함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꼭 술같이 진하고, 세상의 맛은 점점 깁처럼 얇다. 애끊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하였다. ○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오천(烏川) 선생의 훌륭한 작품은 점과 획이 바르고 비스듬.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났네. 벽 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마루 위에서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누나. 우뚝하게 높은 산을 우러러 보니, 얼굴 시드는 것 바로 나이가 두렵다.” 하였다.『신증』 죽루(竹樓) 객관의 남쪽에 있다. 현령 이종준(李宗準)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철파역(鐵破驛) 현 북쪽 5리에 있다. 청로역(靑路驛) 현 남쪽 32리에 있다. 남원(南院) 현 남쪽 2리에 있다. 허어리원(許於里院) 현 동쪽 35리에 있다. 윤곡원(尹谷院) 현 동쪽 24리에 있다. 염곡리원(廉谷里院) 현 남쪽 12리에 있다. 황산원(黃山院) 현 동쪽 30리에 있다. 승봉원(僧逢院) 현 남쪽 20리에 있다. 건현원(件峴院) 현 남쪽 35리에 있다. 빙산원(氷山院) 현 남쪽 30리에 있다. 도리원(都里院) 현 서쪽 32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골짜기가 멀어서 맑은 물 흐르고, 모래가 평평해서 짧은 뗏목 없구나. 나루를 물었으나 길을 잃어버렸고, 연기 나는 곳은 두어 집뿐이다.” 하였다. 북원(北院) 현 북쪽 2리에 있다. 이곡원(梨谷院) 현 북쪽 18리에 있다.
【불우】 빙산사(氷山寺) 빙산에 있다. 수량암(修量菴) 금학산(金鶴山)에 있다. 백장사(白丈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비둘기와 제비가 서로 재잘거리니, 바야흐로 천하는 삼월 삼짇. 봄물은 기름 돌아 푸르고도 맑은데, 바위에는 꽃이 얼키설키 붉기도 하네. 시를 읊고 노니나니 술보다 흥겹고, 풀밭을 거니나니 쪽빛보다 푸르구나. 90일의 봄빛을 한번 훑으니, 조개(皁蓋 일산(日傘))가 성 남쪽에 가득해도 상관이 없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에 있다. 『신증』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와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지낸다.” 한다. ○ 유호인(兪好仁)의 영신가(迎神歌)에, “공은 어찌하여 이 구석에 있는고. 덩굴 풀에 의지하였는데, 산은 검푸르도다. 하늘을 위해 일했거늘 문란하도다. 진인(眞人)이 우뚝 일어섰으니, 푸른 나무 옆이로다. 물고기에 날개가 붙었으니, 다투어 뛰고 달리는도다. 황옥(黃屋 황제의 수레)의 좌도(左纛 황제 수레의 깃발)여, 범ㆍ이리를 당해내고, 유가(劉家 한(漢) 나라의 황가(皇家))의 기신(紀信)이여, 멀리 서로 바라보는도다. 사당에서 백세(百世)를 잡수시니 신(神)은 양양하고,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잊지 못하는도다.” 하였다. ○ 유호인의 송신가(送神歌)에, “신령이 양양함이여 산(山)의 머리로다. 구름은 뭉게뭉게 무턱대고 헤매는도다. 북은 두둥둥 둥둥 주저주저 춤추는도다. 여지(荔枝)가 누래지지 아니하니 계수나무는 부끄러워지는도다. 내가 드린 메를 받으시니 물리치지 않으시도다. 팔사(八蜡)는 해마다 가을이면 온 지경 안에서 구슬처럼 모여들어 삼밭처럼 빽빽하도다. 여귀(厲鬼 역귀(疫鬼))를 쫓으니 큰 복을 내리시는도다.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해마다 증수(增修)하는도다.” 하였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고구현(古高丘縣) 현 북쪽 20리에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구화현(仇火縣)을 고구현(高丘縣)으로 고쳤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뒤에 의성부(義城府)에 예속시켰다. 태일전(太一殿) 빙혈(氷穴) 옆에 있다. 매년 상원(上元 정월 보름)에 임금이 향(香)을 내려서 제사지낸다. 성화(成化) 14년 무술(戊戌)에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으로 옮겼다. ○ 신인손(辛引孫)의 시에, “태청(太淸 하늘)의 새 전각은 빙산(氷山)에 창건되었고, 하한(河漢 은하(銀河)) 돌아감은 정환(定環)에 벌여 있다. 오색(五色)이 보광(寶光)은 하토(下土)에 이었고, 삼태(三台)의 화개(華蓋)는 중간에 끼어 있다. 마음을 재계하기 10일 황궁의 섬돌로 달리고, 수명을 축수하기 천년 황제의 모습에 절한다. 원하옵기는, 비ㆍ바람 순조롭도록, 화기애애함이 인환(人寰)에 가득토록.” 하였다. 소문국(召文國) 옛터는 현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소문리(召文里)라 부른다. 어정(御井) 소문리에 있다. 아마 소문국 시절의 어정(御井)인 모양이다. 피촌향(皮村鄕) 현 남쪽 25리에 있다. 신촌부곡(新村部曲) 현 동북쪽 30리에 있다.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 현 남쪽 5리에 있다. 우곡부곡(牛谷部曲) 현 동쪽 20리에 있다. 골라소(骨羅所) 현 동남쪽 50리에 있다.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7백 20척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황산성(黃山城) 현 동쪽 40리에 있다. 서쪽만 돌로 쌓은 것이, 둘레 45척이었는데 지금을 황폐해졌다, 동ㆍ남ㆍ북은 모두 절벽이다. 금성산고성(金城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 9천 백 척,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 안에는 네 곳의 샘물이 있다.
【명환】 본조 김속(金續) 성품이 청렴ㆍ정직하다. 상공(常貢)의 물품은 모두 보(寶 재단(財團))를 세워 백성들에게서 걷지 아니하였다. 정종소(鄭從韶) 정치에 성적이 있다.
【인물】 고려 김홍술(金洪術) 태조(太祖 왕건(王建)) 때의 아전[吏]으로서 성주(城主)가 되었다. 태조 12년 가을에 견훤(甄萱)이 갑졸(甲卒) 5천 명으로 쳐들어와 홍술이 전사하니, 태조가 울면서, “나는 좌우의 팔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홍유(洪儒) 궁예(弓裔)의 말년에 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청주(靑州)가 배반하자. 유가 유검필(庚黔弼)과 더불어 진주(鎭州)를 진압했으므로 청주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19년에 백제(百濟 후백제) 토벌에 따라가서 이를 멸망시켰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김훤(金晅) 원종(元宗)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환(淸宦)ㆍ요직(要職)을 많이 지냈다. 충선왕(忠善王)이 세자(世子)로서 원 나라에 가 있을 때 훤은 시독(侍讀)으로 따라갔다.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성정(性情)이 깨끗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호(號)는 철촌(鐵村)이다. 김개물(金開物) 훤(晅)의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서정(瑞庭)이다.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였다.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었다. 남과 사귐에 있어 신용을 지켰다. 벼슬은 대간(臺諫)에 이르렀고, 옛날의 쟁신(爭臣)의 기풍이 있었다.본조 김순(金淳)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헌(僖憲)이다. 김말(金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가르치기를 열심히 했다.
『신증』 【효자】 본조 제연동(諸延同) 어머니가 나쁜 질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금방 나았다. 금상(今上 중종(中宗)) 11년 정려(旌閭)되었다. 도금동(都今同) 아버지가 죽자 여묘(廬墓)살이하였고, 상(喪)이 끝나서도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으며, 조석(朝夕)의 제사를 한결같이 하였다. 금상(今上) 16년에 정려(旌閭)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남부(南部) 읍으로부터 끝이 15리이다. 북부(北部) 끝이 10리이다. 점점곡(點谷) 동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이다. 빙산(氷山) 동남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소야(巢野) 동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다. 산운(山雲)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가음(佳音)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상천(上川)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하천(下川)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석전(石田) 위와 같다. 금뢰(金磊) 위와 같다. 소문(召文)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억곡(億谷)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안평(安平)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옥산(玉山)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귀산(龜山)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단촌(丹村)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외야(外也) 위와 같다. 내사곡(內舍谷) 동쪽으로 처음은 1리, 끝은 40리이다. 외사곡(外舍谷)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이다. 우곡(羽谷) 서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며, 안동 남쪽 경계와 비안(比安) 북쪽 경계를 넘어 있다. 이혜(泥兮)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며, 일계(日谿)의 옛 현이다. 구화(仇火) 북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40이며, 고구(高邱)의 옛 현이다. ○ 반촌향(反村鄕)은 남쪽으로 25리, 신촌부곡(新村部曲)은 동북쪽으로 30리,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은 남쪽으로 5리, 우곡부곡(牛谷部曲)은 동쪽으로 30리, 골라소(骨羅所)는 동남쪽으로 50리이다.
【토산】 뽕[桑]ㆍ옷[漆]ㆍ닥종이[楮]
【누정】 기양정(岐陽亭)ㆍ능파정(凌波亭) 모두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사원】 빙계서원(氷溪書院) 명종(明宗) 병진년에 건립하고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 태묘(太廟) 조에 있다. 이언적(李彦迪) 문묘(文廟) 조에 있다. 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모두 안동(安東) 조에 있다. 장현광(張顯光) 성주(星州) 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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