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30일 광화문 마라톤
2년만이다.
2015년 3월 16일 동아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고통의 두려움이 긴 시간을 보내게 했다. 이번 마라톤도 거의 마지막 날에 신청하여 가까스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출발 직전까지 망설임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충분한 연습도 없이 먼 거리 대장정에 선다는 것이 그 정도를 더하게 했다. 하지만 조선, 중앙, 동아마라톤 풀코스를 섭렵한 자부심과 도전과 열정의 끝에서 만나는 성취감, 무엇보다도 잔인한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 출발선으로 나서게 했을 것이다. 큰형님이나 친구를 보냈던 4월의 벽제화장터, 그리고 어머니의 관을 붙들고 푸른 보리밭 사이를 들어선 때도 모두가 4월 하순이었다.
청명한 아침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여유를 부리며 10년 전 춘천 마라톤 레이스에 참가할 때 김종곤 KIM. J. G 이니셜을 새겨 넣은 검정색 유니폼을 입었다. 초심의 마음으로 완주하는 모습을 그리며
광화문으로 나서는데 유럽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응원을 보낸다. 지하철로 이동하여 도착한 에드벌룬 날리는 광장에는 형형색색 수많은 건각들이 자신에 찬 눈빛으로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100미터 달리기 화약총 소리를 기다리는 초조함으로 서 있었지만 광화문을 시작으로 마포대교나 여의도공원 그리고 골인 지점인 월드컵경기장까지 코스가 친숙하고 선명하여 다소 위안이 되었다.
8시에 출발하여 서소문과 충정로를 거쳐 야트막한 애기고개(아현동) 언덕을 넘어 달려온 마포 경찰서 직전 4킬로 지점, 깨끗하고 넓은 거리에 주자들의 발놀림 소리가 경쾌한 화음을 이루고 있다. 작년까지 학교를 출강하면서 차가 막혀 마을을 졸이던 곳 그럴 때마다 뛰어서라도 가고 싶었던 그 곳을 지금 달린다. 대선을 홍보하는 한 무리의 응원단이 공덕동 로터리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실력있는 무명 가수들의 거리 공연까지 모두 달리는 주자들에게 힘을 주기에 충분하다. 6.5킬로 지점 마포대교 입구 약간의 오르막길을 잰 걸음으로 달려 앞에 선 주자와 위치를 바꿀 때 파이팅을 외치는 낮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무심결에 돌아보니 노래 잘하고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한국 대표 디바(Diva) 인순이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화장도 없이 흰 머리카락을 날리며 달리는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나도 박수를 보냈다.
마포대교에 올라서자 봄의 햇살이 양 옆으로 흐르는 한강의 물줄기와 어우러져 눈이 부시고 대교 끝지점에서는 풍물패의 사물놀이가 행사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여의도 공원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돌아 KBS 방송공사를 지나면서는 10킬로 주자들이 건너편 골인 아치로 빠져 나간다. 오롯이 하프코스 주자만 달리는 거리는 전반에 비하여 왜소한 대열이 되긴 했지만 거칠어진 숨소리는 국회의사당 아래 한강 길과 어둑한 터널을 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당산철교를 지나는 2호선 지하철에 눈을 주며 얼마를 달리자 양화대교 남단을 오르고 있다. 몸을 완전히 돌려 방향을 잡으니 발걸음은 한강 북쪽을 향하여 가고 있고 선유도 공원의 신록이 지친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양화대교를 벗어나 합정동 4거리에서 반원을 만들며 좌측으로 망원동 길에 접어드니 월드컵 주경기장 아치탑이 시야에 들어오고 15킬로 지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오른쪽에 서 있다. 아직도 6킬로 이상을 더 달려야 하는 무거운 심정으로 망원동에서 마포구청 방향으로 큰 길을 건너니 홍제천이 고가 아래로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해마다 마라톤을 준비하며 이 곳에서 연습을 많이 했고 엊그제도 오늘을 준비하기 위해 몇 번을 달린 곳이라 친숙한 마음이 앞선다. 이제 월드컵 경기장을 정면에 두고 여기서부터 하늘공원 노을공원을 따라 일직선으로 수색 근처까지 갔다가 월드컵 공원으로 돌아오는 4킬로를 가면 된다.
42.195킬로 풀코스를 달릴 때는 21킬로 하프 지점까지 지친 기색도 없이 경쾌하게 잘 달리는데 오히려 하프코스를 달릴 때는 18킬로나 20킬로 지점에서 극도로 고통을 느낀다. 그러다가 골인지점이 멀리서라도 보이고 응원단의 박수소리가 들려올 쯤에는 어디서 힘이 솟아나는지 다시 날아가듯 달린다. 이런 상황은 인간의 마음가짐과 정신력이 얼마나 우리의 삶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쉽게 짐작되는 부분일 것이다. 골인을 하고 완주메달을 걸고 경기장을 나선다.
마라톤은 달리는 시간이 하프 2시간이나 풀코스 4시간 이상으로 외부인에게는 잠깐의 시간일지라도 달리는 주자들은 그 과정에서 육체적 고통과 극도의 한계에 직면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마라톤과 인생의 여정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니 그러기에 살아가는 동안 고독과 고통이 있을지언정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되며 그것조차 운명의 동반자라 여기고 함께 가야 할 일이다. 잔인한(The cruelest month) 4월을 보내고 나는 다시 화려함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 서 있지만 수십 번의 마라톤에 참가했음에도 오늘의 진주황색 완주메달이 유독 눈이 부시고 아름다운 것은 아직도 멈추지 않은 나의 열정과 집념이 여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 저쪽으로 봄나비 두 마리가 아지랑이 되어 날아 오르고 그 사이로 계절의 여왕 5월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