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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엄마의 말뚝(박완서)’을 읽다
‘엄마의 말뚝’은 박완서의 유일한 연작소설이자 대표작이다.
‘엄마의 말뚝 1’은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이 자식들과 함께 서울에 삶의 공간을 마련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고, ‘엄마의 말뚝2’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6·25 전쟁과 오빠의 참혹한 죽음에 고정되어 고통스러워하는 노쇠한 어머니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딸의 이야기를 담았고, ‘엄마의 말뚝 3’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자신의 소망과는 달리 서울 근교의 공원묘지에 묻히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곧 생명의 불꽃이 점차 사그라지는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쓴 글이다.
이 세 소설은 시간차를 두고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던 박완서 본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머니 홍기숙 여사의 삶의 궤적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한국 여성의 삶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 한 인간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엄마의 말뚝’ 줄거리>
[1편] 아빠가 죽고 엄마는 오빠와 ‘나’를 서울로 데려간다. 엄마는 바느질을 하며 고통스러운 생활을 감내한다. 사대문 밖의 초라한 셋방에 살던 ‘나’는 도시적 삶에 길들어 가고, 엄마는 ‘나’를 문안에 있는 학교에 진학시킨다. 해방을 맞고 드디어 문안에 집을 장만했는데, 결국 우리도 엄마가 만든 말뚝에 매인 셈이었다.
[2편] 5남매의 어머니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나’는 친정어머니가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머니는 수술 후유증으로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키며, 6·25 전쟁 중 비극적으로 죽어 간 아들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는 의식을 차린 후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화장하여 오빠의 유골을 뿌린 곳에 뿌려 달라고 부탁한다.
[3편] 수술 후 엄마는 7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신다. ‘나’는 엄마의 유언대로 엄마의 시신을 화장하여 오빠가 뿌려졌던, 고향이 보이는 강화도 바다에 뿌리려고 하지만 사회적 체면과 이목을 중시하는 조카가 매장할 것을 고집하여 서울 근교의 공원묘지에 묻는다.
<엄마의 말뚝 등장인물>
어머니 : 일제 강점기에 남편을 잃고 두 자녀를 교육시키며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의지적 인물이다.
오빠 :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착한 아들이었으나, 6·25 전쟁 중 인민군 장교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나 : 어머니의 끈기 있는 삶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작품 속으로>
나는 엄마가 서울이라는 거대한 대궐의 안주인처럼 우러러뵈었다. 엄마는 또 내 귓가에 소근소근 내가 서울 가서 앞으로 되어야 하는 신여성에 대해 얘기해주기도 했다.
"신여성이 뭔데?"
“신여성은 서울만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거란다. 신여성이 되면 머리도 엄마처럼 이렇게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까미로 빗어야 하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통치마를 입고 뾰죽구두 신고 한도바꾸 들고 다닌단다."
내가 히사시까미, 한도바꾸에 전혀 무지하다는 걸 아는 엄마는 기차간을 한 번 골고루 휘둘러보고 나서 저기 저 여자의 머리가 히사시까미, 조기 조 여자가 무릎 위에 놓고 있는 게 한도바꾸 하는 식으로 실물을 견학까지 시켜가며 열성스럽게 신여성이 뭔가를 나에게 주입시키려고 했다.
(p33)
오빠는 내가 한문 쓰기에 오랜 시간을 보내길 바랐지만 나는 시골집에서 천자문을 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집에 들어가지 마라, 골목 앞에 나가지 마라, 안집 애하고 놀지 마라, 동네 애들하고 놀지 마라, 상종할 만한 집 자식 하나도 없더라.
엄마는 자나 깨나 집요하리만큼 열심스럽게 나의 행동반경과 교우 범위를 제한할 줄만 알았지 그게 실제로 여덟 살짜리 계집애에게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면 나는 결코 단칸방을 벗어날 수 없었고, 엄마나 오빠 외의 말벗을 가질 수도 없었다.
(p47)
이사 간 날, 첫날 밤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엄마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비록 여섯 칸짜리 집이지만 없는 게 없었다. 안방, 마루, 건넌방, 부엌, 아랫방, 대문간 이렇게 여섯 개의 방이 공평하게 한 간씩이었다. 마당도 있었다. 마당이 네모나지 않고 삼각형인 게 흠이었다. 엄마는 이런 마당을 '우리 괴불마당' 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마당의 가장 변이 긴 쪽이 남의 집 뒤쪽으로 난 담인데 그 밑이 어마 어마하게 높은 축대였다.
(p66)
이상하게도 그때를 그리시는 어머니는 그때 거기서 고생하시면서 이웃을 함부로 상것들 취급하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던 때 같은 터무니없는 귀골스러움을 잃고 계셨다. 어머니는 예전 생각은 잘 나도 금방 돈지갑을 얻다 놓았는지는 아득한 노쇠한 어른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게 쓸쓸했다. 어머니가 정작 잃은 건 근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에게 지금 남아 있는 근거는 박적골 시절이 아니라 현저동 괴불마당 집인지도 몰랐다.
(p79)
남편은 말없이 말다툼하는 아이들 중 하나를 쇼크 받은 아내를 위해 떼어놓고 먼저 병원으로 갔다. 나는 그 아이마저 떼어놓고 내 방을 걸어 잠그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충격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졸음 때문이었다. 나 없는 동안에 일어난 재난의 당사자가 내 식구가 아니라 친정어머니라는 걸 알아들으면서 속으로 나는 얼마나 안도하고 기뻐했던가. 그 사실이 나를 심히 민망하고 부끄럽게 했지만 그런 죄책감조차 별로 절실하지도 못해 들입다 잠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나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집에 남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아이에겐 끝내 슬픔을 가장한 채 허겁지겁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불륜의 쾌락처럼 단잠이었다.
짧고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찬물을 끼얹듯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내 아이들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육친이듯이 어머니 역시 가장 가까운 육친이라는 거였다. 소위 말하는 일촌 사이가 서로 동등하거늘 나는 내 아이들 대신 어머니가 당한 재난을 마치 타인에게 그것을 떠맡긴 양 다행스러워했던 것이다.
(p97)
수술실 문이 열리고, 아직 수술복인 채인 의사가 눈만 반짝거리는 커다란 마스크의 한쪽 끝을 천천히 귀에서 벗기면 입가엔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사람 특유의 만족스런 피곤이 감돌고, 마침내 입을 열어 ‘안심하십시오.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하면 가족들이 혹은 우러러보기도 하고, 혹은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면서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광경은 출구 쪽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입구는 환자를 받아들이고 출구는 환자를 토해내고 가족은 전송하고 마중할 뿐이었다.
(p116)
"군관 동무, 군관 선생님, 우리 집엔 여자들만 산다니까요."
어머니의 눈의 푸른 기가 애처롭게 흔들리면서 입가에 비굴한 웃음이 감돌았다. 나는 어머니가 환각으로 보고 있는 게 무엇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가엾은 어머니, 차라리 저승의 사자를 보시는 게 나았을 것을.....
어머니는 그 다리를 어디다 숨기려는지 몸부림쳤다. 그러나 어머니의 다리는 요지부동이었다.
"군관 나으리, 우리 집엔 여자들만 산다니까요. 찾아보실 것도 없다니까요. 군관 나으리."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가 어머니에게 육박해오고 있음을 난들 어쩌랴. 공포와 아직도 한 가닥 기대를 건 비굴이 어머니의 얼굴을 뒤죽박죽으로 일그러뜨리고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이 송글송글 솟아오르고 다리를 감싼 손과 앙상한 어깨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가엾은 어머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차라리 죽게 하시지, 그 몹쓸 일을 두 번 겪게 하시다니…….
"어머니, 어머니 이러시지 말고 제발 정신 차리세요."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면서 울부짖었다.
(p127)
"네 그러믄요. 이 집엔 여자들만 산다니까요. 찾아보실 것도 없다니까요.
어머니가 급히 뒤따라 나오면서 안 해도 될 소리를 두서없이 지껄였다. 그들이 어머니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무도 여자요?"
앞장선 군관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오빠에게 물었다. 인민군을 본 오빠가 갑자기 실어증에 걸렸는지 으, 으, 으, 하고 신음할 뿐 뜻이 통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못했다.
“가안 여자는 아니지만서두 병신이에요. 사람값에 못 가는 병신이니까 여자만도 못하죠. 웬수죠. 병신 자식은 평생 웬수죠."
어머니의 얼굴에 공포와 비굴이 처참하게 엇갈렸다.
(p141)
그렇다면 참 이상도 하지. 변의조차 퇴화된 몽롱한 의식 속에서 하필 그 엑스트라들이 튀어나올 건 또 뭔가. 여느 때도 아닌, 장장한 인생의 막을 내리려는 이 금쪽같은 시간에. 인간 의식의 불가사의가 조금도 신비하거나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고, 조잡한 허구처럼 느껴져 무안스럽기도 했다.
(p159)
삼우날 다시 찾은 산소에서 나는 어머니의 성함이 한 개의 말뚝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정식 비석은 달포쯤 있어야 된다고 했다.
말뚝에 적힌 한자로 된 어머니의 성함에 나는 빨려들 듯이 이끌렸다. 어머니의 성함 중, 이름을 따로 뜻으로 읽어보긴 처음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닌 부드럽고 나직하게 속삭이며 아직 내 의식 밑바닥에 응어리진 자책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딸아. 괜찮다 괜찮아. 그까짓 몸 아무 데 누우면 어떠냐. 너희들이 마련해 준 데가 곧 내 잠자리인 것을.
생전의 어머니는 깔끔한 대신 차가운 분이어서 한 번도 그렇게 곰궂게 군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생애만큼 먼 옛날의 작명이 나에게 그런 위무를 해주고 있었다.
어머니의 함자는 몸 기己자, 잘 숙宿 자여서 어려서부터 끝 자가 맑을 숙 자가 아닌 걸 참 이상하게 여겼었다.
(p174)
<작품 연구>
제목 ‘엄마의 말뚝’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
이 작품에서 말뚝은 어머니와 가족들의 서울 입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서울에서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인 문안에서 살아가려는 엄마의 삶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나’가 엄마에게 느끼는 정신적 구속감을 의미하기도 하며, 오빠의 비극적 죽음에 초점을 맞추면 오빠의 죽음을 가슴에 말뚝처럼 박고 살아온 엄마의 한으로 볼 수도 있다.
‘어머니’의 유언이 갖는 의미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겪으며 살아온 어머니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한으로 남아 있는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유골을 강화도 앞바다에 뿌렸던 것처럼, 자신 역시 아들이 뿌려진 곳에 감으로써 아들의 곁을 지키려는 것이다.
‘어머니’가 싸우려는 대상
어머니가 싸우려는 대상은 바로 남북의 분단 상황이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극적 상처를 남긴 분단을 향해 어머니는 나름대로의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단 현실의 극복 의지가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연작 소설, ‘엄마의 말뚝’
이 작품은 1980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세 편의 연작 소설이다. 각 편마다 동일한 인물이 등장하며 유사한 성격의 사건이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해방 이전부터 6·25 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엄마와 ‘나’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각 작품은 독립된 완결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 작품이 모두 작가의 작품 세계의 본질을 보여 주고 있다. 중심인물인 엄마를 통해 작가는 한 개인의 일생이 정치사, 민족사의 차원으로까지 복잡하게 얽혀서 전개됨을 생생한 묘사를 통해 보여 준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복합적으로 뒤엉키며 전개되었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이다.
<서술 방식과 그 주제 >
이 작품에서 작가는 활달하고 개성적인 문체와 섬세하고 절제된 묘사력으로 ‘6·25 전쟁의 비극과 분단 고통의 극복 의지’라는 작품의 주제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엄마의 말뚝’에서는 서술자의 태도에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작품의 서술자는 현재의 관점에서 엄마의 과거를 회상하는 동시에, 엄마의 과거에 존재하는 ‘나’의 시선에서 엄마를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엄마의 모습과 동시에 과거의 ‘나’의 모습도 바라본다. 그리하여 서술자는 소설의 중심 사건을 다각적으로 대하게 되며, 이러한 태도는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서술자의 다양한 태도는 작품의 주제 의식을 복합적으로 형상화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천재 학습백과 참조)
(20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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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완서(朴婉緖, 1931 ~ 2011)
소설가. 1970년 “여성동아”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6·25 전쟁과 분단 문제, 여성 억압적 사회 구조 문제 등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적 입장에서 해결책을 담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엄마의 말뚝’, '유실', '꿈꾸는 인큐베이터',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꿈을 찍는 사진사', '창밖은 봄', '우리들의 부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