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묻고 남편이 답하다(19)
허수아비
헝클린 실타래 같은 옛 시간을 불러놓고
한 올 한 올 풀어가는 올곧은 심지 있어
마른 뼈 굳은 마디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드맑은 하늘만을 고집하던 아버지는
오늘, 이 혼탁함이 못내 안타까우신지
기어이 뒷모습 보이며 바람 속을 걸어간다.
허수어미
가진 것 다 내주어야 어미는 웃는단다
인습의 벼랑 끝까지 질긴 굴레 훌훌 털고
꽉 묶인 팔다리 풀어 당당히 선 조선의 여자.
동강 난 강줄기를 바닥까지 비워내면
말갛게 고여 드는 저 따순 핏줄 있어
가난을 끌어안을수록 어미품은 넉넉하다.
홍오선의 제7시조집 '어눌한 시'(2016년 고요아침 발행) 중에서
아내가 묻고 남편이 답하다(19)
아내의 일곱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하고, 시조를 쓰는 사람이년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2007년도 이영도 문학상 수상작이다. 청도군이 주최하고 <이호우·이영도 문학 기념회(회장 민병도)>가 주관하는 이호우·이영도 시조문학 수상자로 선정된 작품이다. 우리나라 현대시조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청도출신 이호우·이영도 남매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청도군이 주관하는 이 남매 문학상에서 이호우 시조문학상은 이정환시조시인이 본상을, 정용국시조시인이 신인상을 받았으며 이영도 시조문학상은 홍오선 시조시인이 본상을, 정경화 시조시인이 신인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이 상은 시조시인이면 누구나 한번 쯤 꿈꾸는 로망이다. 그만큼 값진 상이다.
사진 삭제
(사진은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되기도 하는 허수 아비)
허수아비-이 글은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상을 가감 없이 그려낸 작품이다. 유교적 인습에 젖어 늘 올곧은 심성만을 고집하시던 아버지는 그래서 ‘마른 뼈 굳은 마디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로 표현되듯이 평생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뼈가 닳도록 노력 했지만 한 번도 어렵다거나 불평 한 마디 없으셨다. 오히려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유혹과 부조리를 외면하며 묵묵히 가장으로서 가야 할 길을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가신다. 자신을 버려 가정을 지켜내는 이 시대의 아버지를 논 한가운데 서서 불평없이 새를 쫓는 허수아비로 비유했다. ‘뒷모습 보이며/ 바람 속을 걸어간다’는 아버지는 늘 앞만보고 전진하기 때문에 그 이름만으로도 든든하다.
허수어미-어머니는 한마디로 희생과 헌신의 표상이다. 그래서 ‘가진 것 다 내주어야/ 어미는 웃는다’고 화자는 말한다. 어미는 껍데기만 남은 속빈 우렁이다. 더 이상 내줄 것이 없어 바닥이 드러나야 어미는 웃음을 보인다. ‘가난을 끌어안을수록/ 어미품은 넉넉하다.’는 표현대로 고난과 격랑에 시달릴수록 어미는 대범해진다. 가정을 이끌어가는 부정과 모정이 눈물겹도록 가슴을 친다.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앞모습을 보이기 싫어 뒷모습만 보이는 아비와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사랑과 헌신을 퍼내는 어미의 희생정신이 현대인의 고뇌에 찬 자화상으로 숙연하게 오버랩 된다.(2021.6.5)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