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정신이란?
현재의 인류는 '정신'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검증되어야만 분명하게 제시하는데 현재까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말은 하고 싶고 해야겠는데,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정신'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초감각적인 사고로 모든 상황이 여기에서 비롯되고 끝이 난다.
예컨대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하고자 하면, 정신이 먼저 결정을 내리고 이어서 행동으로 옮긴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자아가 찾아가는 곳, 기대는 곳이 정신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요컨대 정신에 달렸다. 이 정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켜서 좀더 나은 자아를 만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어떤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선택하여 즐겁게 실천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힘든 일도 아닌데 힘들어하고 선택하지 않는다. 결과는 차치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싶은가에 자신의 정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 인류가 깨어있는 의식에 방점을 찍어서 깨어있는 의식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이해하지만, 깨어있는 의식은 인간이 잠을 깸과 동시에 상을 만들어서 그 상 속에서 일상 살아간다. 본질-정신은 그 상을 만드는 존재이다. 본질을 꿰뚫으면, 이해하면, 자신의 정신을 활용할 수 있다. 상에 휘둘리면 어떤 일도 힘들고 하기 싫다. 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걷다 보면 아픈 다리에 집착하게 되고, 서 있는 것이 편하고 서 있으면 다시 힘이 들어 앉고 싶고, 앉으면 다시 눕고 싶다. 이렇듯이 현실은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나태해진다. 이를 '물질주의'에 매몰되었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라는 자각이 온다 그 자각이 정신이다. 그러다가 다시 나태해지는 상황이 연속되고 작심삼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이 지식 정보화 시대에서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미약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지식 정보화시대가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깨어있는 의식에 방점을 찍으니, 아이들로 봐서는 당연히 그렇게 될수밖에는 없을 것이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어느 순간 드는 이 생각이 중요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이 들도록 할 수 있을까가 질문이다. 정신은 이렇듯 자신의 본질이며,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자신에게 하는 일, 또는 나쁜 일-다른 사람에게 심각하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할 때도 이러한 자신의 내면의 외침이 당연히 들려야 한다. 이것이 보이지 않아서, 겉으로 보아서는 알수가 없기 때문에 간과되고 있다. 이 정신을 성장, 발달시키는 단계가 인간의 발달단계이다. 이 단계에 올바른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21세, 성인이 될때까지 현실에 적응시키는 교육은 겉으로 보이는 교육이고, 핵심은 이와 같이 정신을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당연히 보이지 않아서 어려운데 -이 말은 체험을 해야 이해한다는 말이다- 지식 정보화 시대가 정신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해하기는 더욱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신의 힘을 활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물질주의에 휘둘리게되어서 삶도 행복하지 않다. 바로 말하면 정신의 힘을 활용하면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를 쓰게 되고, 불가능도 없다.
예컨대 수업 중 -교사가- 떠드는 아이에게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작은 소리로 "쉿 조용히"라고 했을때 나오는 반응은 다양하다. 첫째, 순간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는 반응이 얼굴에 나오는 아이-겸연쩍은 표정, 둘째, 교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왜 나만'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아이, 이 아이는 다른 아이를 살피면서 과연 다른 아이는 떠들지 않는지에 대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이 아이는 점차 교사가 다시 한번 자신을 지적하는 경우를 기다려서 반격을 가한다. 물론 교사도 잘못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왜 나만 떠든다고 해요'라고 하는 아이는 정신이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한 아이이다. 정신이 올바르게 성장했다면 교사의 지적을 받으면 아!하는 자각이 나와야 한다. 셋째, 일부러 수업을 망치기 위해서 떠드는 아이도 있다. 이 아이는 자신의 정신이 주위환경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한다.
어떤 경우의 정신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까?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는 아이가, 자신이 잘못하면 스스로 자각이 일어나는 아이이다. 점차 삶이 올바르게 나아갈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세 번째 경우는 정신이 업, 습관에 의해서 자각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정신은 자신이 잘못했을 경우에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여야 다음 경우 자각이 안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반복해야 점차 정신의 습관이 형성되어서 자각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정신의 속성이다. 반면 아이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미루면 -특히 교사에게- 이것이 점차 내부에서 자각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서 잘못을 저질러도 반성하지 못하는 상태로 나아간다.
슈타이너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이에게 교사는 당연시 되는 어떤 권위여야 합니다. 마치 위대한 선지자가 말하는 것의 힘이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반면 아주 나쁜 것은 아이가 교사에게 의구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해롭습니다. 아이가 교사를 인정하는 그런 존경심은 생각컨대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 그리고 이것은 교사가 아이에게 주는 마치 하나의 선물 같은 것입니다(슈타이너 지음, 이정희 옮김, 2008, 95)."
교사가 주는 선물은 아이에게 자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만약 이때 아이가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면, 내면에서 정신이 자각을 하는 체험을 한다. 아이는 다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경우에 자각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도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영혼에 습관을 들이는 것이고, 교사의 권위는 아이의 영혼에 습관을 형성하는 일이 된다. 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는 자신의 정신의 자각기능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우를 범한다.
두 번째, 정신의 힘을 활용하는 것이다. 정신-마음이 물질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면, 또 영혼의 습관이 형성되기 전에는 이러한 자각이 일어난다. 예컨대 어떤 일-하기 싫은 일을 하기 전에나 할 때 '그만 하자', '하기 싫다'라는 마음이 들 때 '그래'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 보기도 하고, 그만 둬 보기도 하면서, 이때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자신의 존재를 만날 때가 있다.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순간 자신의 존재가 얼굴을 비춘다. 그렇게 꾸준히 계속하면 자신의 존재를 만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난다. 그러면 그 힘을 활용해 보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하도록 해보고, 그 존재가 하도록 자신의 몸에 힘을 빼보기도 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면 마음-정신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살펴보면 '정신은 인간이 잠을 깸과 동시에 몸 밖으로 나간다고 한다. 인간이 힘을 쓰면 근육이 힘을 쓴다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말하는데, 사실은 근육이 아니고 몸 밖에서 힘을 주는 그 힘에 정신이 살아있다'(슈타이너 지음, 최혜경 옮김, 2007, 257).
영혼의 공감에 대해서 살펴보면, 영혼이 공감을 할 때 자신의 존재의 본질의 힘을 쓸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은 공감과 반감할동을 하는데, 공감은 대상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활동이고, 반감은 대상으로 보는 사고활동이다. 영혼 활동은 항상 호흡과 같이 공감-반감을 되풀이한다. 예컨대 "타인을 바라볼때 상대방에 대한 헌신-내적인 방어, 즉 공감-반감, 공감-반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슈타이너 지음, 최혜경 옮김, 2007, 181)."
공감,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삼라만상과 내가 하나인 상태이다. 그리고 다시 빠져나와서 대상으로 자각하고 다시 공감을 한다. 대상과 하나가 되면, 첫째 대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윤관이 거란족을 물리칠때 대상의 이치를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외교로써 가능했다. 대상의 이치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야 파악한다. 둘째 삼라만상의 에너지를 얻는다. 만물이 자라는 에너지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을 하면 되지 않는가하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눈을 뜸과 동시에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공감을 자각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각해야 공감의 힘을 쓴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기싫을 때 귀찮을 때,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대상을 보고 사고활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공감하지 않고 있다. 반면 어떤 일이 재미있으면 그 순간 자신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인간의 영혼은 공감과 반감을 반복하기 때문에 공감만 반감만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감의 힘을 할용한다면, 대상의 이치는 물론이고, 삼라만상의 자라는 힘도 얻을 수 있다. 반면 반감의 힘을 자각하면 힘든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짜증이 나고 힘이 든다.
인간의 본성 상 공감을 자각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대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면 가능하다. 그럴 경우 인간은 정신의 힘을 쓰는 것이다.
요컨대 정신이란 물질에 매몰되는 것을 막고, 잘못을 했을 경우에 자각이 일어나는 존재이다. 올바른 이념에 자신을 존치시켜서 하게 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삶을 살도록도 한다. 공감의 힘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아야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자각이 일어난다. 부정적인 마음은 먼저 자신의 정신을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가 그렇게 생각할 경우엔 어떤 존재가 와도 어떤 해결도 하기 어렵다. 반면 스스로 자각이 일어나면 어떤 일도 불가능하지 않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정신이다.
누구나 자신의 영혼의 힘을 쓸수 있다. 이것이 그동안 인류를 다녀간 성인들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