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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11월 10일 YMCA, YWCA 연합예배 설교 - 누가복음 17장 11-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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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살아있는 다년생 텃밭이야기>
저희 교회 공동텃밭이 있는데 한쪽으로는 단년생 밭이 있고 한쪽으로는 다년생 밭이 있습니다. 고구마나 감자, 상추나 옥수수 이런 것들은 그때그때 지어서 먹고 씨앗을 남겨두었다가 다시 심어서 먹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한쪽에는 다년생 밭이 있습니다. 부추, 참나물, 취나물, 도라지 같은 것들입니다. 요놈들은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열심히 따 먹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다 죽습니다. 이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다 없어져 버립니다. 흙에서 보면 흔적도 없이 없어지기 때문에 죽어서 다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비로운 게 봄이 되면 하나씩 둘씩 싹이 올라옵니다. 아주 가냘프고 여린 놈들이 하나씩 하나씩 땅을 뚫고 올라옵니다. 씨앗이 아닙니다. 뭐예요? 뿌리들이예요. 땅 속에서도 겨우 내내 뿌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영하 10도 20도 내려가도 그 놈들은 땅속에서 가만히 얼어 죽지 않고 이 추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면서 가만히 버팁니다. 그러다가 얼음이 녹고 기온이 풀리고 땅이 녹으면 하나씩 하나씩 올라옵니다. 온갖 시련에 추위에 강풍이 닥쳐도 뿌리가 살아있으면 언제가 싹을 내고 잎을 내고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뿌리가 중요합니다.
<Y의 뿌리 - 기독교의 사회화>
중세 시대를 포함하여 루터, 칼빈에 의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때만해도 기독교에서 쓰는 구원의 용어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삶을 성숙시켜서 결국은 내 영혼이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구원받는 게 그 궁극적 목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옛날에는 이렇게 말하면 박수를 받았는데 18세기 이후부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이 유럽 전체로 확산이 됩니다. 갑자기 산업이 발달하면서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니까 도시빈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소위 자본가 계급이 생겨나면서 노예가 있고 종이 있는 봉건질서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지 않고 거리에, 노예들, 여성들, 도시빈민들의 아픔에도 계시다고 여기면서 교회가 아닌 거리, 탄광으로 나가 설교를 하면서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노예를 해방하고 여성들을 거리의 설교가로 세우고 그랬던 분이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웨슬리 선생님이십니다. 구원이란 개인의 도덕적, 내면적 영성, 끊임없이 거듭나는 삶의 변화를 통해 시작되지만 그것이 결국은 사회 변화와 사회 성화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사회 구원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 선생님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계를 다 복음화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기독교인의 무한 책임을 지닌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운동이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 영향을 주고 사회복음주의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이 줄기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Y입니다. 즉 Y의 뿌리는 기독교의 사회화입니다. 개인의 종교를 사회의 종교로 넓혀가는 그 시작점에 Y가 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아픈데 나 혼자 건강하면 행복합니까? 아니죠. 이 사회가 건강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병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도 내가 교회 가서 구원받았다고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폭력이 사라지고 사회안에 차별이 없어지고 예수께서 꿈꾸신 하나님 나라가 조직과 구조 사회 시스템안에서 실현됨으로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세계 YWCA의 비전을 보면 여성 리더십에 의해 정의,평화, 건강, 인간의 존엄성, 자유와 환경보전을 통한 지속적으로 포용적인 세상(온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살려가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YMCA나 YWCA는 우리가 서 있는 이 땅 한가운데서 사회적 성화-구원을 위해 시작된 쌍둥이 남매 단체들입니다.
1855년 8월 20-24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제1회 YMCA세계대회가 열리는데 그 파리대회에서 YMCA의 운동의 핵심 정신, 가치가 합의됩니다. 이것은 이후에 태어난 YWCA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고 이것이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는 Y운동의 정신적 뿌리가 됩니다.
<Y의 뿌리1 - 기독성>
그 첫째가 기독성-예수정신입니다. 예수 정신은 고난받는 약자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정신입니다. 그 사랑은 경계가 없어서 때로 위험합니다. 그 사랑은 철저히 사회적 약자, 아픔을 바라보고 있기에 사회를 뒤집는 사회 변혁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매우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Y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일제 시대에는 민족의 고난에 함께 했습니다. 초기 한국의 YMCA회장이 헐버트인데 그분은 서양인의 몸으로 한글의 우수성과 아리랑 등 한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기도 하고 한국민의 우수성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 역사책을 직접 집필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이 Y를 이끌면서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자기 민족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을 하셨습니다. YWCA가 창립되던 해에 Y는 세계대회에 대표들을 파견해서 3.1운동의 일제의 만행 특히 수원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났던 집단 학살의 만행을 전세계인들에게 알려 전세계인들을 경악시켰습니다. 일제 말기 민족말살정책을 쓰면서 농촌을 수탈해갈 때 Y는 농촌으로 사람들을 보내 농촌계몽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으로 파생된 사회적 아픔에 함께 하였고 산업화 시대에는 도시빈민의 가정들과 노동조합활동에 대한 교육적 지원을 통해 그들과 함께 합니다. 80년대는 군사독재시절 고문근절, 최루탄 사용 중지 등 인권운동의 포문을 열고 그것이 90년대 이후 사회가 다변화 되면서 일본의 역사왜곡, 여성의 인권, 다문화, 소수자의 인권, 평화통일, 탈핵, 기후위기 등의 환경문제까지 영역을 넓히면서 시대가 앓고 있는 고난과 아픔의 문제에 함께 합니다. Y는 시대의 굴곡과 그 아픔을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시대의 고난을 끌어안으며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왔습니다.
<Y의 뿌리2 - 청년성>
Y의 두 번째 뿌리는 청년성입니다.
젊음! 무엇이 청년입니까? 20대가 청년입니까? 30대가 청년입니까? 40대가 청년입니까? 나이가 청년입니까? 제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잠깐 사역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매우 존경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장례식장에 참석한 회중들을 위해서 손수 인사말씀을 녹음해놓고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 왔는데 고인이 직접 영상으로 나와서 인사를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으로 축도하기 전 마지막 파송의 찬송을 다함께 일어나서 즐겁게 “오! 해피데이”를 찬양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장례식에 참여하신 분들이 박수치면서 <오! 해피데이>를 부르셨습니다. <오! 해피데이>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행복한 날, 오 행복한 날 예수께서 나를 새롭게 하신 날
오 행복한 날, 오 행복한 날 예수께서 나를 새롭게 하신 날
그는 나에게 싸우고 기도하고 싸우고 기도하는 법들을 가르쳐 주셨네
매일 매일 기쁘게 살아
예수는 나에게 기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네
오 즐거운 날 싸우고 기도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오 행복한 날
인생이라는 무대가 누구에게도 쉽지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인생이지만 매일 매일 무너져내리는 내 자신과 싸우고 기도하고 싸우고 기도하면서 매일매일의 내 자신을 새롭고 온전한 자아로 세워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연세 드신 목사님은 장례식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시면서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내일의 내 자신이 오늘의 내 자신보다 더 거룩해지는, 사람 앞에서 생명 앞에서 자연 앞에서 이 무너져가는 지구생명체 앞에서 더 진실해지는 자아로 거듭나는 삶을 노래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75세에 돌아가셨는데 젊은 청춘이십니까? 아니십니까? 젊음은 가능성이요, 변화하는 생명이요, 끊임없이 싸우고 저항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생명력입니다. Y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진화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고민하면서 때로는 저항했고 때로는 가슴으로 품었고 때로는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습니다. 시대와 함께 눈높이를 맞추며 변화하는 생명력! 이것이 Y의 젊음! 청년성입니다. 한국 교회 초기 만해도 교회가 시대를 읽고 아픔을 읽으면서 사회 변화를 주도해갔습니다. 병원을 세우고 교육을 하고 사회 아픔을 끌어안으면서 서민들과 함께 하는 기독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오히려 민주화의 방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회는 통일을 이야기하고 21세기 동북아 공정을 이야기하고 젋은이들은 페미니즘, 다양한 성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서로 다른 생각, 종교, 이념을 가진 이들이 평화와 공존과 상생을 이야기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자기 언어에 갇혀 자기들만의 교리와 문자에 갇혀 담장 높이 벽만 쌓고 있습니다. 교회의 벽을 허물고 변화의 생명력을 가지고 시대의 아픔을 품으면서 사회변화의 중심에 서야할 소명과 사명이 Y의 길이요 시대적 요청입니다.
<Y의 뿌리3 - 개방성>
Y의 뿌리 세 번째 특징은 개방성입니다. 개방성은 Y운동을 더 큰 무대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일 뿐만아니라 온 세상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참여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에 등장하는 환자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이방인보다 더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먼저 망합니다. 이 때 앗시리아인들이 민족 혼혈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피가 섞입니다. 그 후로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비록 사회적 천대를 받는 사마리아인에 나병환자였지만, 소박한 감사와 기쁨이 있는 이 사람의 인생에 진정한 구원이 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함부로 여기지도 않았고 중환자라고 막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일하는 불법체류자이면서도 이슬람교도인 한 노동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저는 이 시대 종교인은 이런 예수님의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중의 하나가 유대교에 갇힌 하느님을 해방하신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넘어서 가나안의 여인에게, 이방 나병환자에게, 낯선 사마리아인에게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보셨습니다. 초대 교회가 결정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사랑하시지 않고 이방사람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카톨릭은 제1960년대 초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하느님은 카톨릭 안에만, 성직자 안에만 갇혀있지 않음을 공식선언했고 그래서 타문화 타종교, 타 지역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2013년 WCC세계교회 협의회 부산 총회에서는 개종금지선언을 하면서 새로운 선교와 전도 확언을 위한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 조항을 읽어드리면
“우리는 선교가 식민지화와 연계하여 각 지역 사람들 가운데 있는 지혜를 알아보는데 실패하고 그들의 문화를 폄하한 것을 반성한다. 문화를 공격하고 문화파괴에 일조한 선교 활동은 생명대신 죽음을 불러왔다. 전도는 개종이 아니다.
우리의 선교실천은 고난 받은 사람들과 연대해야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나누는 것으로서의 전도는 자기를 비우는 겸손으로 행해지며 다른 사람을 향한 존중과 다른 문화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가 수반된다. … 진정한 전도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의 관점에서 행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
진정한 전도는 개종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신앙은 자기 확신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 세상을 품는 일입니다. 타자를 향한 한없는 개방성 없이 온 세상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Y의 개방성은 우리를 교회를 넘어 온 세상에서 아파하시고 신음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부르시고 초대하시는 그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나오는 이야기
마더테레사 수녀님이 켈커타에서 일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이가 거리에서 굶고 있는 것 같아서 보육원에 데려다 놓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이 아이가 나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따라가봤더라는 거죠. 그랬더니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는 후미진 한 구석에 있는 어떤 여인의 품으로 쑥 들어가더라는 겁니다. 누구였을까요? 네 맞습니다. 엄마입니다. 비록 화려하지 않고 좋은 시설에 맛좋은 밥이 없어도 그곳에는 엄마의 품, 엄마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깃들고 생명이 살아나고 생명이 회복되고 치유되고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Y가 기독성과 저항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기독교의 사회화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세상이 저는 바로 이런 하느님 나라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이후 한국 YWCA를 위해 헌신하셨던 박에스더님의 글은 이 시대Y의 뿌리와 Y의 길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Y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Y는 사업이 주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되고
이웃과 사회에 대해서 봉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품으로 이시대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무한 책임을 가지고 삶의 지경을 넓혀가고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확장해 나가는 것 Y의 뿌리요, Y의 길이요, Y의 소명입니다. 이런 Y의 길을 응원합니다. 하느님이 언제나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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