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부전나비의 문제 외 4편
송종규
이를테면, 껍질은
수많은 버선을 화폭에 걸어놓고 떠나간 화가의 뒷모습 같기도 하지만
나는 내 몸을 싸고 있던 껍질을 벗자마자 그것을, 말끔히 먹어치웠다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날 것을 짐작하지는 못했으나
나는 내게, 우월한 족속이라는 최면을 건 적 있다
높은 데로 비상하는 것은 내가 꿈꾸던 삶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제 몸을 먹어치운 대가로 날개를 얻었다고 수군거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만
솔직히 볼품없고 징그러운 껍질을 세상에 남기지 않은 것은
내 우월감과, 공중과, 우유부단한 구름 때문이다
문제는 공중, 공중에는 또 수많은 공중이 있다
榜을 붙이다
새벽 두시, 늦은 잠에 겨우 든 거 같았는데 위층인지 아래층인지 옆집인지, 위층의 위층인지 아래층의 아래층인지 옆집의 또 그 옆집인지, 술 냄새 진동하는 시끌벅적한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내 방으로 쳐들어왔다 싸우는 줄 알았는데 낄낄거리는 거 같았고 한껏 붕 떠 있는 거 같았고 불순한 음모에 가담해 의기투합한 불한당들 같았다 그들은 마치 허공에 빈주먹을 휘두르는 주정뱅이처럼 후줄근한 바짓가랑이를 내 방으로 들이밀었다
이 새벽
난감한 것은 내 집의 침실까지 침입한 저들의 무례를 꾸짖을 도리가 없다는 것과 나비처럼 가여운 내 방을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이 없다는 것, 세상은 온통 불통이라는 것, 무엇보다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는 것
꼬박 밤을 새우고 아홉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불운했던 지난밤과 공동주거구역의 법칙을 깨뜨린 몰염치를 전화기 저쪽에 고발했다
<아이구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榜을 써 붙이겠습니다> 그는 내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 종이비행기처럼 경쾌한 문장을 내 방으로 날려 보냈다 달콤하고 포근한 말의 구름다리가 수화기 저쪽에서 내 방까지 순식간에 완공 되었다, 나는 이제 안락할 것이다
“관리규약 제10조에 의거 입주민은 늦은 밤 고성방가를 삼가주셔야 하며 공동의 권리와 의무를 ......관리소장 백” 당당하게 榜이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있다
밤새 술을 마신 듯 퉁퉁 부은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며 힐끗 글씨들을 쳐다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는 아무래도, 지난밤의 혐의가 묻어있는 듯하다 짧은 순간 엘리베이터 안은 적의로 가득 찬다
이제 곧, 사사로운 하룻밤이 생의 뒤쪽으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천천히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나온다
고요한 종이
햇빛 환한 한 장의 풍경 아래, 둥그런 호숫가 그 둘레에, 온통 고요뿐인 해안에
누군가 우체통을 세우고
누군가 또 빈 의자를 두고 떠나갔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아 나무에 박힌 옹이를 손톱으로 긁거나 붉은 글씨를 써 우체통에 넣는다 느티나무처럼 큰 사람이 와서 절절한 마음 거두어가리라 믿으면서, 그곳은
태초이거나 태초 이전이거나, 나는 폭풍처럼 젊거나 심하게 늙었거나, 슬픔은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어왔거나
온통 흰색과 푸른색의 공중에, 서서히 달빛 스며드는, 그 한 장의 풍경 아래
어떤 생에 대해 떠올리려다가 꿀꺽 삼키면, 아무런 의식도 없이 슬픔은 몸을 부풀려 최대의 질량으로 덮쳐온다
누군가 첨탑을 만들고 누군가 또 빗장을 열어놓고 갔다
누군가 돌아오지 않는다
빨간색 볼펜
채 수인사도 나누기 전에 책들이 쳐들어왔다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춘란이 꽃대를 밀어 올리던 날이었다 수세기 전 느릅나무와 박물관 속 남자들도 문을 밀고 들어왔다 나는 탁자에게 전화기에게 냉장고에게 바구니 가득 말들을 퍼 주고 느릅나무 푸른 잎사귀들을 앵무새들의 마당에 깔아 주었다 바구니 가득 말들은 무성해지고 새처럼 날개를 달고 잎들은 수북수북,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숲의 캄캄한 안쪽
나는 빨간색 볼펜을 들고 쫓아가 숲의 옆구리를 들추려다 말고 나는 남자를 문밖으로 밀어내려다 말고 괘도를 이탈한 이 오랜 시간들을, 숨이 차도록 많은 미끄러운 문장들을, 받아적는다 꾸역꾸역 받아먹는다 앵무새와 의자와 동그란 스탠드와 함께 나도 공중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책장 속에는 앵무새가 살고 박물관 속 남자가 산다
장갑
아파트 마당에 너덜해진 장갑이 버려져 있다
한 번도 획기적이지 않았던 그의 삶에 새긴 주름진 골짜기를
많은 날짜들이 짚어갔을 것이다, 검붉은 얼룩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적어 넣을 게 없는 당신에 관한 문제이고
이것은 기막힌 어떤 생의 실종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당신들과 덥석 악수하고 싶었지만 시커멓게 닳은 손톱 때문에
멈칫거리던 그의 손을
장갑은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불운했던 한 사람의 생애, 굳은 손바닥에 새겨진 깊은 금들을
장갑은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요에서 수수꽃다리까지 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는지
자동차가 무심한 듯 그의 손금을 뭉개고 지나간다
햇살들이 내려와 손가락을 덮는다 봉분, 소복하게 솟아오른다
----애지 2012년 봄호에서
송종규 심상으로 등단--시집 {고요한 입술}, {녹슨 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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