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휘는 수곤(秀崑)이고 자는 여진(汝鎭)이며, 성은 강씨(姜氏)이니 그 선대는 진양(晉陽) 사람이다. 우리 중종 때의 공신 영선군(永善君) 지(漬)의 4세손이다. 영선군이 첨정(僉正) 세침(世琛)을 낳았고 세침이 집의에 추증된 질(礩)을 낳았고 질이 참판에 추증된 응운(應運)을 낳았고 응운이 공을 낳았다. 어머니는 종실의 여자이니, 문천정(文川正) 이수갑(李壽甲)의 따님이다. 공이 태어난 지 일곱 해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모에게서 양육되었다. 이모는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어머니이다. 연세가 높은 할머니가 계셨는데, 공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하루는 이모가 고기를 주니 공이 받아 두고 먹지 않았는데 이모가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가지고 가서 할머니께 드리려고 합니다.”
하였다. 이모가 속으로 기특하게 생각하고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었다.
선조 15년(1582)에 첫 벼슬로 소격서 참봉이 되었다. 여러 번 옮겨져서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 임진년(1592)에 왜적이 쳐들어와 상이 평양(平壤)으로 피난할 때에, 일이 다급하여 후비(后妃)의 집안이 상과 함께 가지 못하게 되자, 공이 의친(儀親)으로서 상이 평소에 신임하고 있었는지라 상이 공에게 그 인솔을 맡기니, 드디어 상을 따라 서쪽으로 갈 수 있었다.
그 이듬해에 공조 좌랑을 거쳐 고창 현감(高敞縣監)이 되었다. 한창 전쟁을 겪는 중에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상황이었는데 공이 계획을 잘 세워 곡식을 마련해서 기민들을 진휼하였다. 이때에 양호(兩湖)의 유민(流民)이 수천 명이었고 북쪽의 친척과 친구들로서 춥고 주린 자들도 날마다 찾아와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공이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어 살린 자가 수천 수백 명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4년 만에 어떤 일의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니,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길을 막고 방백(方伯)에게 공을 더 유임시켜 달라고 호소하였고 백성들은 다투어 군량(軍糧)을 내어 그 처벌을 대속(代贖)하려 하였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모두들 마치 친척을 잃은 듯이 눈물을 흘렸다.
뒤에 몇몇 고을을 다스렸는데 치적이 항상 1등이었다. 담박(澹泊)하여, 거처할 만한 집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외출할 때에는 거마(車馬)도 없었다. 가족들이 가난의 고통을 겪는데도 공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집에서는 제사를 독실히 지냈고 종족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으며, 평생토록 타인의 잘잘못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품성이 돈후하고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불선(不善)을 보면 상대했을 때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아니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수치로 여겨 차라리 시장에서 회초리를 맞으면 맞았지 공에게 허물을 짓지는 않으려고 하였다.
돈녕부 첨정으로 광해군 때를 만나 10년 동안 옮기지 않고 있다가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주(廣州) 서쪽 구천리(龜川里)에 장사 지냈다. 원근에서 조문(弔問)을 온 자가 5, 6백 명에 이르렀다.
아내 이씨(李氏)는 또한 왕족이니 승지에 추증된 이갱(李鏗)의 따님이다.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다. 큰아들 아무는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하여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 선경(善慶)은 현감(縣監)이다. 사위 두 사람은 부사(府使) 최규(崔珪)와 사인(士人) 조성후(趙成後)이다. 또 서출로 딸이 하나 있는데 양식(楊湜)의 아내가 되었다.
아무는 사과(司果) 원록(元祿)을 낳았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군수 권성원(權聖源)에게 시집갔으며, 또 후 부인(後夫人)에게서 낳은 아들 원진(元禛)과 원지(元祉)가 있다. 선경은 현감 원희(元禧)를 낳았다. 외손이 8명인데 참봉(參奉) 최석량(崔碩量), 봉사(奉事) 최의량(崔毅量), 조연(趙渷), 조량(趙湸), 조항(趙沆), 조완(趙浣), 양만기(楊萬紀), 양만령(楊萬齡)이다. 또 최씨(崔氏)는 사위가 넷인데 찰방(察訪) 이한구(李翰衢), 진사 김식(金栻), 안횡(安鋐), 유중은(柳重殷)이다. 모두 자손이 번성하여 100여 명에 이르니, 덕을 지닌 자가 보답을 받는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공은 처음에 상을 호종한 공로로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나중에 큰아들이 높은 벼슬을 함으로써 다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이씨는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덕이 크고 베풂이 넓었으니 / 德鉅而施博
그 몸에 아름다움이 성대하였네 / 其賁於身者夥耶
지위가 낮고 봉록이 적었으니 / 位卑而食薄
길이 그 자손을 기다린 것이네 / 以待其子孫者夸耶
첫댓글 위의 기록은 외14대조부이신 강수곤 선조의 묘갈명으로서 미수 허목 선생이 지으셨습니다.
강수곤 선조는 의인왕후의 이종사촌 동생이 되시는데 두분이 같은 해인 1555년에 탄생하셨다는
점이 기묘한 인연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