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목사의 인식 피정 이야기 1: 아내와의 여행이라는 의미 ◈
출발 몇 시간 전 항공사에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항로 폐쇄로 인한 출발 연기’
세 시간이나 뒤로 미뤄졌지만 공항버스 시간은 그대로 인지라 새벽 4시 반에 출발하여 무려 세 시간이나 공항 의자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내겐 동행자가 있었다. 아내와의 동행 여행!
아내는 나와 가정과 교회를 위해 여행다운 여행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일상에서는 학교로, 방학 중에는 교회에 전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내가 공항 화장실에 다녀와도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커피를 뽑아왔을 때도 그랬다. 늘 혼자였거나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때와는 달리 그 자리에 아내가 있었다.
변변한 여행가방 조차 없었던 우리는 흰바람에게 가방을 빌려 짐을 꾸리고, 가방 하나로 어찌 한달 가까이를 견디겠냐는 주변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먼저 한 일은 공항 면세점에서 아내에게 백팩 하나를 사준 것이었다. 말로는 “자기 짐은 자기가!”였지만 이참에 가방 하나를 선물하고픈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눈은 고가에 가 있었지만 정작 집어든 것은 색깔과 디자인이 맘에 든다며 저가의 가방을 골랐다.(얼마나 다행인지^^ㅠㅠ)
10시간의 비행 후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좌석을 골라 편안한 좌석을 정했음에도 10시간이 넘는 장거리를 가기엔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탈 때와 병원에 갈 때 부자에 대한 갈증이 극대화 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날짜변경선으로 인해 해가 있을 때 도착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구글맵에 의존한 호텔까지의 이동, 아내는 앞장서서 가이더가 되고 난 짐꾼으로 충실했다. 버스가 내린 곳 주변엔 세계 최대의 체인 호텔들이 넘쳐났지만 우린 가방을 끌고 언덕을 올라 허름한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길가 가게에 들러 세 번을 묻고서야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여장을 풀고 굽은 허리를 폈을 때쯤 초인종이 울렸다. 등산 가방에 줄은 너덜너덜한 채로 효림이가 환히 웃으며 방 안에 들어섰다. 5개월만의 만남, 그것도 이국땅에서 보는 아들의 얼굴은 우리를 해바라기로 만들어 주었다. 문득 큰놈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찡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여행을 갔으면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나의 지론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 짙은 고수향이 버겁게 다가오고 풀풀 날릴 것 같은 밥알과 어우러진 묘한 냄새는 그나마 괜찮다 싶은 생 양파 썰어놓은 것으로 터키에서의 첫 식사를 마쳤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시차 때문인지 잠은 오지 않고, 길거리에서 산 전기통닭구이 반쪽에 현지 맥주 한 병을 먹는 맛으로 잠을 부를 수 있었다.
아침 조식, 빵과 햄, 치즈, 버터, 따끈한 우유, 잼과 꿀과 초콜릿, 방울토마토와 사과 슬라이스 몇 개, 오믈렛과 계란 스크램블을 보자마자 애기님이 함께 왔으면 내 스타일이라며 좋아했을 것이라고 아내가 말을 뗐다.^^
아주 저렴한 호텔이었지만 가성비는 갑이다. 잠자리도 청결과 편안함을 주었지만, 음식도 무엇보다 직원들의 친절함은 일류호텔보다 나았다.(가본적은 없지만...^^)
10시를 넘겨 이스탄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있으니 거칠 것이 없다. 언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길 찾기도 순항이었고 가볼 것도 척척이다. 옆에서 아내는 나보다 아들에 딱 붙어서 걷는다. 괜히 불렀다 싶기도 했다.^^
어디를 가든 머리를 디밀고 다가오는 고양이들, 길거리 곳곳에 제 세상처럼 편히 누워 잠들거나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거리의 개들, 처음엔 몰랐지만 주인이 있는 개들은 짖고, 주인이 없는 개들은 절대 짖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그들의 친근함이 오직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고 나서는 거리에 나설 때면 늘 빵과 남은 음식을 챙기게 되었다. 가난은 이스탄불 골목과 거리를 서성이는 개들에게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스탄불 길거리 음식의 대표는 ‘시밋’이라는 1리라 200원짜리 빵(깨가 얻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 같았다)과 군밤, 그리고 구운 옥수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간식이 아니라 그들 일반의 한 끼 식사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예사로 볼 수 없었다. 터키의 대표음식이라 불리는 케밥 중에서 우린 고등어 케밥만 두 번 먹었다. 아들의 터키 여사친 ‘씨벨’(발음 주의)의 안내로 맛본 고등어 케밥 때문이었다. 도시를 안내하겠다는 씨벨에 의해 우린 첫 날 3만보 가깝게 걷는 혹사를 당했고^^ 덕분에 이스탄불의 구석구석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나중에 씨벨은 자수했다. 자기도 길을 잘 모른다고...^^)
안 만큼 보인다는 일반진리가 터키에서도 빛을 발했다. 신구 도시를 가로지르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갈라타사리’ 다리 위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유유자적 전갱이 새끼와 숭어를 낚아 올리는 사람들, 다가가면 환히 웃어주며 제일 먼저 중국사람 이냐고 묻다가 꼬레아라고 하면 엄지를 세워 형제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진 찍기에 금방 반응하고 포즈를 취해주는 사람들, 무려 500년이 넘는 시장을 갖고 있는 나라, 어디를 가든 인산인해를 이루는 도시와 거리들, 첫날 무리를 한 탓에 파스를 붙여가며 걷는 아내의 얼굴이 그들 속에서 환하다.
이스탄불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분주하다. 종교도 다르고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도 그렇다. 다른 것을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기에 편안하다. 물론 새우 여덟 마리를 볶아내고 8만원의 돈을 갈취해간 사람도 있었지만, 빈 홍차 잔에 다시 차를 채워 갖다 주고 길을 물으면 기꺼이 하던 일을 멈추고 온몸으로 방향을 일러주는 사람들과 길거리의 개와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수북이 던져주는 모습 속에서 이스탄불은 타인의 도시가 아니라 위아래 동네처럼 느껴진다.
아들은 친구를 만나러 가고 아내와 난 지하철과 트렘을 타고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세계 최대의 시장이라 불리는 ‘바자르’ 시장 끝에서 장인이 주물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었고, 바다가 건물들 사이로 보인다고 무작정 바다를 향해 걷다가 새로운 동네를 만나기도 했다. 아내는 힘들어 하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내 손을 꼭 잡고 잘도 걸었다. 우연히 아르메니아 교회를 만나 구경을 하다가 한 노인분이 불쑥 내민 성경책(영어 신약성경)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곳 시세로는 꽤 큰돈을 주고 받아든 내게 아내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실실 웃기만 했다. “성경책이잖아” 하는 내가 더 웃겼는지 “그럼 성경책이지” 하는 말로 샐샐 거렸다.
구글로 탁심광장 근처의 한국 식당을 찾았다. 향신료에 상실된 입맛을 되찾으려는 발악이었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후회감이 찾아들었다. 한국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현지인 남자 세 명이 반기는 것과 미리 예약이 되어 있어서인지 부침개가 담긴 접시가 비닐도 안덮인 채로 뗏장처럼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면을 시켰다. 그리고 소주가 있냐고 물으니 있단다. 2만원이라고도 했다. 한국에서 1000이면 살 수 있는 소주가 20,000원! 그냥 라면 두 개를 시켰다. 압력밥솥에서 끓인 라면 같은 식감이 더욱 질리게 했다. 게다가 라면은 우리 라면이 아니라 현지 라면에 우리 스프만 넣은 것 같았다. 중국과 일본 식당과 달리 한국식당이 고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라면 두 개에 우리 돈 10,000을 내고 나오며 아들의 터키 여사친 ‘씨벨’의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스탄불이 눈에 제대로 들어찰 즈음 우린 밤 비행기를 타고 조지아로 넘어갔다. 네 시간의 비행, 새벽에 도착한 조지아의 입국심사를 마치고 검색대를 나서려는데 검색대의 직원이 와인 한 병을 내게 주었다. 아니 옆 검색대의 아내에게도, 입국하는 외국인 모두에게 그랬다.
입국을 축하하며 와인을 주는 나라! 조지아는 그렇게 신선하게 다가왔다.(계속)
첫댓글 우와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