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이면 울어라
지난해 여름, 라인강과 엘베강에서는 ‘헝거스톤’이라는 특별한 돌들이 오랜 세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데카나스 저수지에서는 7,000살 먹은 스톤헨지, ‘과달페랄의 고인돌’이 통째로 드러났다.
이 돌들은 슬픔의 돌이고 두려움의 돌이다. 극심한 가뭄을 경고하는 돌이고, 사람 마음에 공포를 심는 돌이다. 이 헝거스톤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616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체코 엘베강의 헝거스톤이다. 돌의 비스듬한 표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Wenn du mich seehst, dann weine(내가 보이면 울어라)”.
과거 유럽 사람들은 심각한 가뭄이 들 때면 하천 수면에 닿은 마지막 돌에 수위와 날짜 혹은 이런저런 이름들을 새겨두었다. 이 돌들은 평소에는 물속에 조용히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심한 가뭄이 들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 헝거스톤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경고장이었다.
인류는 오랜 세월, 농산물 수확량으로 삶의 질이 결정되었다. 내가 죽고 사는 일, 지역공동체인 부족의 생존 여부, 나아가 국가의 존망까지도 식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식량이 부족하면 가장 가난한 자부터 굶어 죽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덜 가난한 자가 굶어 죽고, 그다음 그다음으로 넘어갔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넘지 않는 자가 없다는 말처럼 굶주림은 기존 질서를 흔들고, 가책 없이 양심을 버리게 한다. 내가 남의 집 담을 넘어 도둑이 되고, 우리 무리가 다른 무리의 밥을 빼앗으며 약탈을 한다. 이 나라가 저 나라의 식량을 탐하며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니 기근석, 배고픈 돌, 슬픔의 돌로 불리는 ‘이 돌을 보는 것’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었겠으며,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겠는가.
저녁 일곱 시, 스물 몇 살의 청년이 조그만 제집, 아니 제 방으로 돌아왔다. 현관을 들어서며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누른다. 천정에 달린 등이 고여 있던 어둠을 후루룩 불어낸다. 빛을 먹고 사는 등은 오늘도 하루 종일 굶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고, 가끔 주변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점심은 편의점에서 먹었던 젊은이는 소파도 되고 침대도 되는 곳에 털썩 주저앉는다. 벽과 침대 사이에 겨우 놓인, 책상도 되고 식탁도 되는 곳에 오도카니 자리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있었냐고, 오늘 하루 무사했냐고, 슬프거나 배고프지는 않았냐고…. 손가락으로 조그만 친구의 얼굴을 가만히 문지른다. 엄지손가락만 한 밀짚모자를 쓴 연회색 얼굴이 초승달 눈을 하고 웃는다. 나는 괜찮아, 포근히 잘 있었어, 네가 일할 동안 나는 늘 너를 생각했단다. 네가 부탁하고 간 기도도 하고 있었단다.
이 작은 친구의 이름은 ‘에그스톤’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반려돌’이다. 에그스톤, 말 그대로 달걀처럼 생긴 돌이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이고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질감을 가졌다. 자연석 그대로의 모양에 자연 그대로의 색을 가진 것도 있고, 알록달록 색을 입히고 표면을 매끈하게 가공한 것도 있다. 정말이지 앙증맞고 살갑다.
‘반려(伴侶)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짝이 되는 동무‘라 나온다. 배우자를 반려자로 부르는 것처럼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이 말이 근래 들어서는 점차 범위를 넓혀간다. 반려동물은 익숙하다. 가축으로 실외에서 사육되다 애완동물이란 이름으로 집 안으로 진입하더니 급기야 반려, 즉 인간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털 달린 친구들은 이제 반려를 넘어 식구가 되고 가족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부터는 식물도 반려라는 호칭이 붙었다. 특정한 화초나 식물을 ’반려식물‘이라며 애지중지 정을 쏟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이들이 많아졌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식물에게 반려라니 갸우뚱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최근 들어서는 돌까지 반려의 반열에 올랐다. 돌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낯설지 않다. 수석이라는 장르가 있고, 역사 또한 까마득하게 올라간다. 그러나 같은 돌이라도 수석과 반려돌은 거리가 있다. 태생부터 다르다. 수석은 예술적, 재산적 가치도 상당하고 감상을 위한 공간이며 좌대나 거치대 등 돌을 위한 가구도 필요하다. 즉, 생활에서나 경제적으로나 어느 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누릴 수 있는 분야다. 그러나 반려돌은 그와 반대로 여유 없음을 이유로 사람에게 온 듯하다.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면 다양한 반려돌들이 올라와 있다. 돌 하나만 팔기도 하고 공깃돌만 한 주변석과 세트로 묶어 팔기도 한다. 방석이나 둥지, 옷이나 다양한 액세서리까지 있다. 가격도 만 원짜리 한두 장이면 충분하다. 관리도 쉽다. 강아지처럼 산책을 시켜주지 않아도 되고, 고양이처럼 배변 모래를 갈아주지 않아도 된다. 사료나 간식에 드는 비용도 없고, 병원비도 들지 않는다. 소리 내어 울거나 집 안을 어지럽히지도 않는다. 식물처럼 자리를 많이 차지하거나 자라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손을 조금만 놓아도 죽어버리는 그런 불상사나 비극도 없다 반려돌은 조용한 불사신이다. 그리고 완벽한 내 편이다.
세상은 분명 좋아졌는데 살아내기는 더 힘들어졌다. 변화무쌍한 사회에 끊임없이 적응해야 하고 또 수시로 비교당해야 한다. 순간이라도 멈칫하면 도태되는 세상, 이 살벌함 속에 여유라는 피안을 마련한 이들은 대개 기성세대들이다. 경제적인 여유이든지 마음을 놓아버리는 달관의 여유라든지 말이다.
그러나 이제 막 시작하는 풋내기들은 상황이 다르다. 물론 소위 금수저로 불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곤 ’내가 품은 희망‘과 ’주변의 기대‘밖에 없는 이들이 월등히 많다. 밥벌이라는 절벽을 기어오르다 손톱이 닳고, 사람 사이를 잘 지나다니지 못해 수시로 부딪치고 넘어진다.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온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시간이나 관계에서 여유라고는 한 방울도 남지 않은, 그래서 쩍쩍 갈라진 저수지 바닥처럼 몸이 깨어지고 마음이 터져버린 이들. 많은 웃는 얼굴 뒤에는 많은 그들이 감춰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공간으로 작은 돌이 한 알 두 알 들어간다.
반려돌을 철없는 젊은이들의 가벼운 유행이라 볼 수도 있다. 정말, 딱 거기에만 머물면 얼마나 좋으랴! 고독사한 어느 젊은이의 책상에 남겨진 물건이다. 수험서 열 몇 권, 컵라면 몇 개, 약봉지와 동전 저금통 그리고 반려돌, 아니 헝거스톤 하나.
첫댓글 무섭고 가슴아픈 글입니다.
'내가 보이면 울어라' 얼마나 무서운 경고일까요.
내 걱정도 한 짐인데 요즘은 지구 걱정을 참 많이 하고 있어요.
우리 건물에도 고독사가 발생했는데
그이는 수많은 소주병이 그의 반려였지요.
쓸쓸하고 쓸쓸합니다.
전성옥샘의 글은 언제나 사람살이의 이런저런 턱을 놓치지 않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전성옥 선생은 사회 문제, 인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사회수필도 이렇게 차원이 다르게 쓸 수가 있네요
샘 반갑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요.
요즘의 사회현상들이...
어떤분이 수석이 아닌 돌을 모으고
좋아한다더니 그게 반려돌? ㅎㅎ
반려견 반려식물은 들어봤는데
반려돌은 좀 그러네요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