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샤미나드 신부님 생애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Guillaume-Joseph Chaminade) 신부는 1761년 4월 8일 프랑스 보르도 페리구에서 14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견진성사를 받을 때에 윌리암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깊이 공경하는 뜻으로 마리아의 정배이신 성요셉의 이름을 받아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가 되었다. 샤미나드 신부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가난, 정결, 순명에 대한 사적 서원을 발하였다. 또 그는 마리아의 요구에는 무엇이든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16세에 샤를르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맏형의 권고로 보르도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공부를 하였고 파리의 성 슐피스 신학교를 마쳤다. 그는 사제로 서품되고 1785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품을 받은 후, 샤미나드 신부는 그의 두 형제가 일하고 있는 뮤시당의 생 샤를르 학교로 돌아와서 관리직을 맡았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혁명을 예고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광신자들과 예언한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불안을 조성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프랑스 정부는 성직자 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들에게 이단적인 선서를 하도록 명하였다. 성직자법의 선서를 거절하면 사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10월 16일, 몽탸뉴 당의 승리와 더불어 프랑스에는 공포 정치가 막을 올렸다. 약 40명의 사제들이 보르도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비밀리에 사제 직무를 수행했다.
샤미나드 신부는 여러 곳에서 비밀 집회를 감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 법에 반대하는 책자를 발간하여 도처에 뿌렸다. 그의 은신처는 보르도의 변두리에 있었는데, 그는 땜장이로 변장하여 거리를 돌아 다녔고, 바늘 장수로 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신자들의 고백을 듣고, 중환자에게 병자성사를 베풀었으며, 유아 세례는 물론 혼인 성사까지 집전하는 열성을 보였다. 1795년 마침내 예배 자유의 법령이 선포되자, 박해동안 덕성이 높았던 샤미나드 신부는 민법에 서약한 “선서 사제들”의 복귀를 위한 힘든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해 10월 말에 비선서 성직자들에 대한 법령이 실시되어 또다시 행상인을 변장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그는 후일 그의 사업에 크게 공헌하게 된 마리 떼레즈 드 라무루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영적 지도를 시작한다.
정부의 추방명령으로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지낸 3년간 샤미나드 신부는 자주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가서 기도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 수도원보다 사라고싸에 있는 "필라르의 성모"였다. 거대한 성전 중앙에 성모님의 성상이 있고, 그 둘레에는 수많은 등불들이 반짝이고 있어서, 마치 성모님이 살아 계시는 듯하였고, 그 앞에 모인 신자들에게 응답하시는 듯 보였다. 샤미나드 신부는 자주 이 성전에서 기도하였다. 그는 그 시대의 프랑스 사회를 염려하였고, 무질서의 와중에서 희생되어가는 젊은이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무너진 교회를 염두에 두고 늘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샤미나드 신부의 후계자 까이예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샤미나드 신부님은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이루실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만일 프랑스로 돌아가면 하늘의 여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신심회를 창설할 것이며, 하늘의 여왕이게 특별히 봉헌될 수도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삘라르의 성모는 샤미나드의 마음속에 새로운 영성을 심어주셨다. 그리고 이 영성의 중심은 항상 예수님이었다. 하지만 마리아의 아들이란 위치에서 예수님을 관상하게 하고, 마지막 시대는 마리아의 시대임을 일러주셨던 것이다.
1800년 가을, 샤미나드 신부는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는 보르도에서 사제 직무를 시작하였다. 또한 바자(Bazas)교구의 행정도 담당하게 된다.
1800년 12월 8일, 샤미나드 신부는 보르도에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 신심회(소달리티 조직), 또한 복음화를 위한 목적으로 마리아께 봉헌된 평신도들의 단체를 시작한다. 1801년 2월 2일 12명의 신심회 회원이 교육을 받고, 봉헌식을 하였다. 그 회원들은 교사, 세일즈맨, 신학생, 신부, 구두수선공 등 다양하였다. 그 다음해인 1802년 2월 2일에는 그 수효가 정확히 100명으로 불어났으며, 1807년경에는 400명에 달했고, 여성 회원들은 300명에 이르렀다. 샤미나드 신부와 그 회원들은 ‘사제증가운동’, 양서보급 운동, 그리고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위한 활동 등을 통하여 황폐해진 프랑스 전역에 다시금 그리스도 교회를 일으키려는 운동을 했다.
1808년 가을, 보르도에서 약 60 마일 떨어진 아장에서 “기도회”를 조직하여 아장 사람들 안에서 활력을 주고 있던 귀족 출신이며 매우 신심이 깊었던 젊은이, 아델 드 바츠 드 트랑꿸레옹과의 편지를 통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장의 작은회’와 ‘보르도의 신심회’의 공통점은 두 신심회를 합병하게 되었다. 1816년 5월 25일 토요일, 아델과 샤미나드 신부의 협력으로 마리아의 딸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마리아의 사도를 양성하여 세상에 파견하려는 소망에 언제나 불타고 있었던 샤미나드 신부는 1817년 2월 1일 마리아 회를 창립하였다. 두 수도회는 프랑스 남서부에서 동북지방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1838년 9월 16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 드리는 서한에서 이렇게 두수도회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 ...중략.. 이 두 수도회는 존엄하신 마리아의 성명을 그들의 독특한 이름으로 삼았나이다. 그들은 온 세상에 마리아가 알려지고, 찬양받으시며, 사랑받으시게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서 교회를 도우시는 영광된 지위를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거룩한 어머니께 맡기셨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옵나이다......" 이 서한과 동봉하여 제출한 회헌(이것이 1839년 회헌)은 1839년 4월 27일자 칙서를 통하여 승인되었다.
1850년 1월 6일, 샤미나드 신부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왔으며 지난 몇 년 동안 그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였다. 1850년 1월 22일, 샤미나드 신부는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는 온전한 의식 속에 두 손으로 십자가를 움켜쥐고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하느님의 손에 돌려드릴 때까지 놓지 않았다. 그는 임종하기 전에, 자기의 후계자 까이예 신부와 수도자들을 축복하였다.
1973년 10월 18일 시성조사 성성은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 신부를 “가경자”로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신학적 정의, 절제 그리고 용기의 가장 근본적인 덕행들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한 표양을 보였으며 훌륭한 영적지도자였다. 이후로 교회 안에서는 샤미나드 신부를 성인으로 공경하기 위한 시성작업이 급속히 진행되어 왔으며 2000년 9월 3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