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오라는 곳도 없고 딱히 갈 데도 없다 보니 생활이 나태해졌다. 세수하고 거울을 보니 웬 낯선 중늙은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젊었을 때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거울 속에 있는 내가 남처럼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 피부는 탄력을 잃어 후줄근하다. 머리카락은 반백이고 머리숱도 듬성드뭇하다. 이마는 머리가 빠져 넓어졌고 주름살이 굵어졌다. 눈동자도 똘박한 맛이 없어지고 눈꼬리도 밑으로 처졌다.
보드랍고 까맣던 눈썹은 거칠어지고 굵은 눈썹이 두서너 개 길게 자라 호랑이 털 같다. 입술도 탄력을 잃었고 입 꼬리도 아래로 처져있다.
얼굴 전체의 윤곽은 피부가 탄력을 잃으니 밑으로 좀 처졌고 이마가 넓어지니 얼굴이 길어졌다. 얼굴 중에서 유일하게 콧날만큼은 오뚝하니 젊었을 때와 진배없다.
강산이 예닐곱 번 변했으니 몸 구석구석이 성할 리 없다. 어디가 아파 병원에 가면 큰 병 진단을 내릴까 봐 겁이나 망설여진다.
젊었을 때 만판 먹고 마셨다. 그때 술을 덜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면 지금보다야 좀 낮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 내가 나를 소중히 여겨 나를 사랑했다면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거울을 보고 있으니 회한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늙는 거야 자연이 이어도는 질서이므로 어떡할 수 없으나 이 세상을 살다 떠날 때까지 남이나 자식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면 지족자부(知足者富)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나름의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내가 아는 지식을 더듬어 관상을 보았다. 관상학에서 말년의 운수는 하정을 본다고 한다. 하정은 코 아래 인중에서 턱까지를 말한다. 입은 단정하고 입술이 두꺼우며 입꼬리가 처지지 말아야 한다.
턱은 둥근 듯 모나면서 흠이 없어야 좋다. 이런 형상이면 말년에 가진 재산을 보존할 수가 있고 부부의 정도 좋으면서 자식 덕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얼굴이 가름해서 젊었을 때는 턱이 빈약했으나 지금 보니 조금 펑퍼짐해졌다. 젊었을 때와 비교를 해보니 턱에 살이 붙어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턱에 흠 같은 게 없어서 말년 운이 그리 박복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본 관상은 대체로 괜찮았으나 입 꼬리가 아래로 처진 것이 눈에 거슬린다.
입 꼬리가 아래로 처지면 가진 재산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지금은 벌이가 없고 조금 벌어 놓은 재산을 가지고 여생을 살아가야 한다. 노루 꼬리만큼 남은 삶인데 재산이 빠져나가면 쪽박 차는 신세가 되는 게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나이가 들수록 의식주에 걱정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아프지 않으면서 부부가 해로를 해야 노년의 품위를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런데 입 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재산이 나간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노릇이다. 자주 웃는 사람은 입 꼬리가 한일자로 바르나 웃음에 인색한 사람은 대부분 내려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웃음에 인색한 편이다. 내가 잘 웃지 않으니 입 꼬리가 내려간 모양이다.
우리가 어릴 때 남자가 자주 웃으면 남자답지 못하고 잔망스럽게 보인다고 특별한 일 외에는 웃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웃음소리는 남자답게 호방하게 웃으라고 했다.
웃음은 남자보다 여자가 구속을 더 많이 받았다. 여자는 웃을 때 소리가 나지 말아야 하고 자주 웃으면 도화살이 끼어 팔자가 기박하다고 했다. 처녀가 웃음이 헤프면 '남자 여럿 잡아먹을 상'이라는 말을 들었으면 시집간 여자가 자주 웃으면 '서방 잡아먹을 년'이라는 말을 들었다. 여자 웃음 중에서 눈웃음은 화류계 웃음으로 시집을 못 갈 정도로 팔자 사납게 보았다. 이런고로 여자가 자주 웃으면 대경실색을 한다. 웃음이 나오면 뒤란에 가서 행주치마 입에 물고 남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웃었다고 한다.
요즘은 젊은 사람만 얼굴 모양이나 주름제거 수술을 하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든 사람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진 입 꼬리도 수술을 받으면 위로 올라간다고 한다. 지금 나이에 칼을 댄다는 게 겁이 나지만 돈이 문제다.
나는 돈 들이지 않고 내 방법으로 얼굴 모양을 바꿔 보기로 했다. 우선 웃는 연습을 해서 입 꼬리를 바로 잡아보기로 했다.
거울을 보고 웃으니 볼 살이 흔들리면서 입 꼬리가 올라간다. 어릴 때부터 웃는 것이 습관화되지 않아서 볼 살이 굳어진 모양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을 하니까 웃는 모습이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진다. 무엇보다 웃지 않을 때도 입 꼬리가 거의 바로 잡혀져 간다. 연습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길게 자란 눈썹을 가위로 간잔지런하게 정리하면서 머리도 연한 검정으로 염색을 했다.
모처럼 외출하려고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니 헌칠민틋한 낯선 사람이 서 있다.
눈썹도 가지런히 정리되어있고 머리도 염색이 되어 흰 머리카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웃으니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게 얼굴 전체가 평안하게 보이고 인자하면서 중후한 얼굴에 노익장의 빛이 난다.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열 살 아래로 젊게 보인다. 웃음을 띠면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하니 주위 사람들이 보기가 좋다고들 한다. 남들이 좋게 봐주니 마음이 흔흔하다.
무엇보다 웃으니 얼굴에 화색이 돌고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생각이 깊어지고 모든 사물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변화된 내 모습을 보니 품위 있게 늙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어 품위 있게 늙는다는 것은 해넘이 노을과 같다. 해넘이가 연출해 내는 노을은 해돋이 못지않게 장엄하고 아름답다.
해넘이 노을의 진가를 안다면 나이 듦은 결코 지는 해가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빅톨 위고는 ‘주름살과 더불어 품위를 갖추면 경애를 받는다. 행복한 노년에는 말할 수 없는 빛이 있다.’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 품위를 갖추면서 경애를 받자면 내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면 해넘이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을처럼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면서 당당하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선다. 남은 세월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다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