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다시읽기 58회에서는 한국의 시인 백석과 필리핀의 의사 호세 리잘을 이야기합니다.
- 일시 :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저녁 6시 30분 ∼ 8시 30분
- 장소 : 홍대역 2번출구 앞
- 회비 : 5천원(처음 참가하는 분은 면제)
호세 리잘(José Rizal, 1861. 6. 19 - 1896. 12. 30)
잘 있거라,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받는 태양의 고향이여,
동방 바다의 진주, 잃어버린 우리의 에덴 동산이여!
나의 이 슬프고 암울한 인생을, 기꺼이 너를 위해 바치리니,
더욱 빛나고, 더욱 신선하고, 더욱 꽃핀 세월이 오도록
너를 위하여도, 너의 행복을 위하여도, 이 한 목숨 바치리라.
전쟁터에서 열광적으로 싸우며, 다른 형제들도
한 점의 의혹도 두려움도 없이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치나니,
장소가 무슨 상관이랴, 사이프러스 나무여, 월계수여, 백합꽃이여,
교수대에서건, 들판에서건, 전쟁에서건, 잔인한 순교대에서건,
내 집과 내 조국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나 다 한 가지.
하늘이 어두운 망토 뒤에서, 벌겋게 달아오르며
마침내 새 날을 알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죽어가노라,
너의 여명을 물들일 꽃물이 필요하다면
거기 나의 피를 부어라, 기꺼이 나의 핏방울을 쏟으리라
밝아오는 햇살에 하나의 빛을 더할 수 있도록.
아직 사춘기 어린 시절의 나의 꿈들로부터
이윽고 활기에 찬 청년 시절의 나의 꿈까지,
내 꿈은 어느 날인가, 동방 바다의 보옥, 오직 너를 보고자 했나니,
눈물을 닦은 그 까만 눈동자, 그리고 찌푸린 이맛살도, 주름살도,
부끄러움의 흔적조차 없이, 높이 쳐든 너의 반짝이는 이마를.
내 인생의 꿈이여, 내 불꽃의 살아 있는 열망이여,
이윽고 떠날 채비를 하는 이 영혼이 너에게 소리쳐 건배하노라!
건배! 아, 너의 비상을 위해 추락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다는 것, 너의 하늘 아래 죽는다는 것,
그리고 너의 사랑과 매혹의 땅 속에 영원히 잠든다는 것.
나의 무덤 위에, 그 짙게 덮힌 소박한 풀잎들 사이
혹시 어느날 초라한 한 송이 꽃이 싹터오르는 것을 보거들랑,
그 꽃을 너의 입술에 가져다다오, 거기 나의 영혼에 입맞추어다오
그러면 나는 차거운 무덤 아래서, 나의 이마에
너의 사람의 숨결, 너의 입김의 따스함을 느끼리니.
달이 와서, 그 보드랍고 고요한 달빛으로 나를 지켜보게 하라,
새벽이 와서, 여명이 그 불빛 광휘를 내게 비추게 하라,
바람이 와서, 그 아픈 신음소리로 내 곁에 와 울게 하라,
그리고 무덤 위 내 십자가 위에, 새 한 마리 내려와 앉거든
거기 앉아 소리 높여 평화의 찬가를 부르게 하라.
불타는 태양이 빗방울을 증발시켜, 그대로 순수하게
하늘로 되돌아가게 하라, 나의 절규를 함께 이끌고...
나의 친구 있거든, 나의 이 철 이른 종말을 울게 하라
그리고 어느 고요한 하오(下午)에, 나를 위해 기도하는 자 있거든
기도하라, 너도, 오 나의 조국이여! 나로 하여, 하느님을 쉬게 하리니...
불행하게 죽어간 모든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천하에 없는 고통을 당하고 가신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하라,
고생 속에 신음하는 우리 불쌍한 어머니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 아들과 과부들, 고문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끝내 구원을 받아야 할 너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묘지가 어두운 밤에 휩싸일 때
그리고 오직 주검들만이 홀로 남아 밤을 지샐 때, 그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
그 신비로움을 깨지 말라 : 그 어딘가로부터 시턴 소리 들리면,
사랑하는 조국이여, 이는 너를 위해 부르는 나의 노래일지니.
그리고 어느 날 아무도 나의 무덤을 기억하지 못할 때
나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어느 십자가도 돌도 없을 때,
사람들이 괭이로 땅을 갈고 흙을 흐트러놓아도 좋으니,
그때의 나의 잿더미는 아무것도 없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만드는 너의 양탄자의 먼지로 남아 있으리니.
그때는 네가 나를 잊은들 무슨 상관이리 :
너의 대기, 너의 공간, 너의 마을 들을 돌아다니며, 나는
너의 귀에 은밀히 속삭이는 맑고 떨리는 음악이 되리니 ;
나의 신앙의 본질을 끝없이 반추하는 신음소리,노래소리
수런거리는 소리, 색깔, 빛, 향기가 되리니.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나의 아픔 중의 아픔이여,
사랑하는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들으라.
여기 너에게 모든 것을 놓고 가노라,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나의 사랑을,
나는 가노라, 총도 살인자도 압제자들도 없는 곳으로,
신앙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그곳, 오직 하느님만이 통치하는 그곳으로.
안녕히 계세요, 부모님! 잘 있거라, 형제들아, 내 영혼의 피붙이들아,
집을 잃은 내 어린시절의 친구들아,
피로하고 지친 날을 내 이제 쉬게 되었음을 감사 드려다오,
잘 있어요, 다정한 이방인이여, 나의 친구 나의 즐거움이여 ;
안녕, 사랑하는 이들이여, 죽는다는 건 쉬는 것.
- 호세 리잘, '마지막 인사'(Mi Ultimo Adios, title by Mariano Ponce). 번역/민영태(한국대사관), 달계
리잘 탄생 150주년 기념우표. 2011년 발행
I
사람들은 나에게 오랜 세월 침묵 속에
녹슬어 있는 리라를 연주해 달라고 하지만
나는 단 한 소절의 노래도 깨울 수 없고
내 음악의 여신 또한 아무런 영감을 못 가지나니!
내 가지가지 생각으로 모진 고문을 받을 때
싸늘한 그녀의 말 몇 마디는 이내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바뀌고 ;
그녀가 웃는 순간은 거짓을 말하는 때이고
그녀가 한탄 속에 거짓을 말하는 시간은 흥분을 한 때이니 -
이는 외진 나의 슬픔 속에서 내 영혼은
들떠 장난을 치거나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
II
한때는 그러한 시절이 있었지,
이건 사실이라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때는 사라져 버렸네 ―
쏟아지는 사랑과 넘치는 우정이
나를 또한 시인이라 불리게 했던 시절 말일세.
이제 그 세월, 그 시절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네 ―
축전의 날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고 나면
며칠간 귓전을 떠돌다가 잊혀지는
신비로운 멜로디처럼 말일세.
III
나는 동방에서 뿌리를 뽑혀 와,
이곳 타향에서 성장이 정지된 식물 ―
나의 고향, 동방은 향기가 대기이고
삶이 꿈인 곳.
아, 잊을 수 없는 고국의 땅이여!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 준 그대,
너로 인해 얼마나 많은 노래를 나는 불렀던가 :
지저귀며 노래하는 새들,
우레처럼 쏟아지는 폭포들,
그리고 바닷가 모래 언덕의 고요한 파도소리여.
IV
어린 시절의 나는
그녀의 햇볕을 보고 웃을 수 있었고
내 가슴 속으로 뜨거운 불구덩이
활활 타오르는 걸 느꼈지.
나는 그때 시인이었네 ― 나는 나의 시로,
나의 숨결로 날랜 바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 “어여 날아가
그녀의 명성을 알려다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칭송하라,
땅 위에서 하늘 끝까지!”
V
나는 그녀를 떠났네!
내 몸 안의 화로는,
약탈되고 쪼그라든 나무는
더 이상 옛날의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않네. 나는 내 주위의 바다가,
나의 광기로 인해, 내가 찾으려 했던
행복 대신 죽음과 슬픔의 유령을
내게 씌운 것을 알지도 못한 채
저주의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조바심으로
광활한 대양을 건너왔네.
아름다웠던 환상들,
사랑과 열정, 욕망 들은
꽃의 땅 하늘 아래에
고이 놓아둔 채로 :
아아, 여윈 나의 가슴에
사랑의 노래를 청하지 말게나!
― 이 사막 위를 평온 없이 걸을 때,
나는 혼(魂)이 번뇌의 구덩이에 있음을,
영(靈)이 나락 속에 잠들어 있음을 느끼니.
― 호세 리잘, ‘사람들은 내게 시를 청하지만’(1882, Me Piden Versos / They Asked Me for Verses), 달계 역
* 맨 위 사진은 마닐라 성 아우구스틴 성당 내원(courtyard)
첫댓글 http://news.joins.com/article/1306484
『민영태씨는 이 시집에서 한국 전쟁과 외국 땅에서의 외국어를 하며 사는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내 잊혀지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는 조국에의 향수를 역설적 몸부림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그의 시를 분석했다.
「포에시아·이스파니카」는 이어서 그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하고 있다.
때때로 괴로운 건,
내 모국어를 잊지 못한 것.
혓바닥을 에이는 듯 물리는 아픔,
깊숙이 파고드는 얼얼한 통증,
내 몸 깊숙이 내 피를 빤다.
[출처: 중앙일보] 「스페인」어판 민영태 시집 『티없는 몸에』 호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