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산 시조, 무작묘용 그 대오와 성찰의 수사
1.들어가며
조오현은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선시조 창작자이자 본격적인 의미의 한글 선시조 완성자이다. “만해萬海는 만악萬嶽이 주관한 만해축전 개최를 통해 오대양 육대주로 넓어지고, 만악도 만해대상”이라는 세계적인 축제를 통하여 “국제무대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와 같이 “조오현의 선시조는 한국문단에서는 물론 세계문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2).
《심우도》(1979)는 설악산 신흥사 조실 무산 대종사 조오현(1932~2018) 시인의 첫 시조집이다. 2부로 구성된 이 책의 자서에서 그는 “제1부는 60년대 말 백수白水의 영향을 받고 그때의 심경에 일고 지는 희비의 어룽을 그려본 것들이고 제2부는 70년대 초 경허鏡虛와의 만남에서 얻어진 것들”이라 했다. 이 두 가지 차원의 분류는 첫째, 등단작을 포함한 서정성 짙은 작품군이고 둘째, 선승으로서의 ‘구도시와 증도가’3)로 분류되는 작품군이다. 이러한 구분은 무산 시조 전반에 유용하게 적용된다4)고 할 수 있지만, 이 두 가지 성향이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1968년 《시조문학》 3회 천료 당시, 대체로 서정이 주를 이루지만 불교적 상상력이 육화된 작품5)으로 무산 시조 전반에 서정성과 선적 깨침이 한데 녹아 있다. 이숭원은 서정 시조에서 출발한 무산 초기 시조의 특징을 ‘자아에 대한 성찰’이라 요약했다6). 자아 성찰은 서정의 축이거나 구도의 축이거나 선禪의 수행修行에서 온 오도悟道를 바탕으로 한 50년 무산 시조의 일관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산 시조의 특징은 자연自然과 실경實境의 시경詩境을 드리운 대오大悟와 성찰省察의 시적 수사修辭에 있다. 자연과 실경의 경계에 나타나는 시적 수사의 핵심은 자연스러움에 있고 가식이나 과장 없이 본바탕을 드러내는 참다운 경지, 진경眞境에 있다. 자연과 실경의 시경은 ‘눈앞에 놓인 물건을 허리구부려 줍듯’ 자연스럽게 하기 어려운 말 없이, 꾸밈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대상을 드러내고 심중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감정을 표현하니 어떤 목적도 작위도 없이 이루어내는 무작묘용無作妙用의 경지다.
이 글에서는 주로 서정성 짙은 대표적 성찰의 시편에 나타난 시적 수사를 살피고자 한다. 한글 선시조 완성자로서 무산 시조는 대오와 성찰을 바탕에 두고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독특한 방편의 어법을 구사”7)하고 있다. 이 독특한 방편의 어법은 시적 수사로서 무작묘용으로 압축되는 자연과 실경의 시경에서 온다. 특히 후기 성찰의 시편에서는 자연발화로서, 꾸밀 수 없는 한숨처럼 독자의 심중에 직격直擊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초기에서 중기를 거쳐 후기 열반 직전의 작품에서 절정을 보인다.
2. 무산 시조의 시기 구분
성찰의 시편에 나타난 시적 수사를 고찰하기에 앞서 무산 시조의 시기를 구분한다. 1968년 등단하여 2018년 열반에 들기까지 조오현 문학 인생은 반세기에 이른다. 여기서 그 50년을 단순히 시간 순차에 따라 나누어 볼 수는 없다. 1979년 《심우도》 발간 이후 《산에 사는 날에》 (2000), 《만악 가타집》(2002), 《절간 이야기》(2003), 《설악시조집》(2006), 《아득한 성자》(2007), 《비슬산 가는 길》(2008), 《설악 자선 시집》(2011), 권영민 엮음 조오현문학전집 《적멸을 위하여》(2012), 시선집 《마음 하나》(2013)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작품들이 중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조오현문학전집 《적멸을 위하여》는 조오현시선집 《적멸을 위하여》(2015)로 증보되면서 《아득한 성자》 이후 발표된 신작들을 포함하여 총 177편을 수록하고 있다.9) 그리고 이 증보판 이후 열반 직전 《서정시학》(2017년 겨 울호)에 발표한 성찰의 시편으로 〈고해〉, 〈자화상〉, 〈허물〉과 유고遺稿까지 포함하는 시전집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무산 시조는 창작 시기 중심으로 구분하여 초기 작품군, 중기 작품군, 후기 작품군으로 나누어 고찰함이 타 당하다. 따라서 첫째, 초기는 1979년 《심우도》에 수록된 작품까지를 초기 작품군으로 본다. 둘째, 중기는 2000년 《산에 사는 날에》, 2002년 《만악 가타집》, 2003년 《절간 이야기》, 2006년 《설악시조집》에 수록된 작품군과 이와 같은 기간旣刊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 2007년 발행 《아득한 성자》의 중복 작품군까지를 중기 작품군으로 본다. 셋째, 후기는 《아득한 성자》에서 기간 시집의 작품이 중복된 것을 제외하고 신작으로 발표된 작품군10)과 《아득한 성자》 이후 열반 직전까지 생산된 작품군을 후기 작품군으로 본다.
본고는 이 세 시기의 작품군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서정성이 짙게 나타나는 성찰의 시편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보여주는 시적 수사에 주목한다. 여기서는 〈무설설〉 연작, 〈무자화〉 연작, 〈일색변〉 연작, 〈만인고칙〉 연작, 〈무산심우도〉 연작, 〈달마〉 연작과 같은 명확히 선시조禪時調로 분류되는 작품군과 《절간 이야기》, 콩트시 〈어미〉를 제외한 작품군을 고찰 대상으로 한정한다.
3. 초기 성찰의 시편에 나타난 시적 수사
무산 시조에 관한 많은 논의 가운데 대부분은 그가 선승이라는 데서 ‘선禪의 향취가 가득한 게송이나 선시’로 읽어왔다. 김학성은 《아득한 성자》에서 ‘조오현의 시적 마력’을 읽어내면서 “그의 시편을 통해 선방의 화두를 읽어내고, 선정 삼매의 깊이를 읽어내고, 역설과 착어로 언어화된 선리禪理의 오묘함을 읽어내었다. 하지만 조오현 시인이 도달한 선의 유현한 세계를 알지 못하는 우리들 범부가 제아무리 그 시적인 깊이와 높이를 헤아리려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고 “종교시나 철학시로만 읽는다면 너무나 낯설고 먼 거리에 놓”이지 않을까 진솔한 우려를 보인다.
물론 선승들에게는 불립문자라는 깨달음의 세계를 ‘무자화無字話’나 ‘무설설無說說’의 방법으로, 혹은 역설과 언어도단의 어법으로 문자화하여 시로 표현하는 선시의 전통이 예로부터 있어왔다. 실제로 무산스님도 그런 방법으로, 제목으로 시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승 대덕의 고매한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세간의 낮은 위치에 있는 시인으로서, 오묘한 설법이 아니라 살가운 서정의 향취로 노래하고자 한다. … (중 략) … 그는 자신의 모습을 세간에 끼어들어 하찮은 시집이나 내는, 그리하여 상구보리上求菩提를 통한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진정한 깨달음에도,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막중한 사명도 다하지 못하는 ‘졸고 있는 사공’에 비유 함으로써 철저한 자기부정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자기부정이라기보다 자신이 처한 위치를 만족할 만한 위치로 받아들 이지 않는 데서 오는 ‘결핍의 감정’의 드러냄이라 할 수 있다. 이 ‘결핍의 감정’이 그로 하여금 스님이면서도 대명천지에 시집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그의 시로 하여금 선의 향취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정적 향취로 물들게 하는 비결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결핍의 감정’이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감정양식이 아니던가11).
이러한 관점에서 무산 시조는 “구도의 과정에서 겪는 스님의 자기 인식이 시인의 ‘결핍의 정서’로 전화되어 그러한 정감이 면면히 배어 있는 서정시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결핍의 정서는 초기의 작품군은 물론 50년 무산 자아 성찰의 시조에 나타나는 서정적 울림의 바탕이 되고 있다.
지난날 내가 쓴 半흘림 書體를 보니
적당히 살아온 무슨 罪迹만 같구나
붓대를 던져버리고 잠이나 잘 걸 그랬던가.
이날토록 아린 가슴을 갈아놓은 피의 먹물
滿紙, 하늘 펼쳐놓자 逆天인가 온몸이 떨려
바로 쓴 생각조차도 짓이기고 말다니!
—〈내가 쓴 書體를 보니〉
〈내가 쓴 서체를 보니〉는 《심우도》에 나타난 대표적인 자아 성찰의 시편이다. 이 작품은 《심우도》 이후 《만악 가타집》과 《설악시조 집》에서 〈1970년 방문榜文 3〉으로, 《산에 사는 날에》, 《마음 하나》에서는 〈내가 쓴 서체를 보니〉로, 《적멸을 위하여》에서는 〈내가 쓴 서체를 보니—1970년 방문 3〉으로 제목이 바뀌는데 이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다.
이 작품은 ‘1970년 방문’ 세 번째 연작이다. 방문은 어떤 일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써 붙이는 대자보 같은 것이다. 정자체로 쓰지 않고 흘려 쓴 필적을 보며 적당히 살아온 자신을 반성한다는 것일까. ‘나’는 왜 바르게 살지 못하고 죄적 같은 반흘림 서체를 남긴 것일까. 아린 가슴으로 피 흘리듯 사느라 그랬을 까. 바른 생각은 하였으나 지키고 이루지 못하였으니 하늘의 뜻을 어긴 ‘나’를 자책한다. 이 어리석은 독자도 선승의 성찰과 자성의 시를 보면 숙연해져 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초기 작품군에서 대표적인 자아 성찰의 시편으로 읽을 수 있는 이 작품에서 반흘림 서체는 삶의 태도에 대한 비유로서 죄적, 만지, 역천과 같은 한자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다. 첫째 수 종장 “붓대를 던져버리고 잠이나 잘 걸 그랬던가.”와 둘째 수 종장 “바로 쓴 생각조차도 짓이기고 말다니!”와 같이 혼잣말 같고 넋두리 같은 그 흘러넘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4. 중기 성찰의 시편에 나타난 시적 수사
중기 작품군은 주로 1980년대 이후 작품이다. 2000년 《산에 사는 날에》에 수록된 〈일색과후一色過後〉, 〈내가 나를 바라보니〉, 〈산일山日 1〉, 〈산일山日 3〉, 〈재 한 줌〉, 2002년 《만악가타집》에 수록된 〈적멸을 위하여〉, 2006년 《설악시조집》에 수록되었고 2002년 《열린시학》 여름호 발표작임을 밝힌 〈달을 그리다〉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이 가운데 〈산일山日 1〉과 〈산일山日 3〉은 《아득한 성자》에서부터 〈죄와 벌〉과 〈내 울음소리〉로 제목이 수정되었다. 이러한 제목의 수정도 독자 친화적 퇴고라 할 수 있다.
나이는 열두 살
이름은 행자
한나절은 디딜방아 찧고
반나절은 장작 패고……
때때로 숲에 숨었을
새 울음소리 듣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20년
40년이 지난 오늘
산에 살면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 소리는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다.
—〈일색과후〉
〈일색과후〉 연작은 1979년 《심우도》에서 1~5까지 먼저 발표되었다. 이 연번호 없는 〈일색과후〉는 2000년 《산에 사는 날에》에 처음 수록되었다. 2007년 《아득한 성자》에서는 ‘일색과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모든 대립을 초월하고 차별을 떠난 일체 평등의 궁극의 세계. 한 뿌리의 풀, 한 송이의 꽃 무엇을 보아도 中道의 이치를 나타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엇을 보아도 부처가 아닌 것이 없는 세계. 깨달음까지도 버린 無作妙用의 세계. 여기서는 오욕락으로 가득찬 현실에 젖었다가 청정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
일색과후. 청정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니 일체 평등 궁극의 세계가 펼쳐진다. 일곱 살에 소머슴으로 입산하여 열두 살이 되었다. 행자. 디딜방아 찧고 장작 패고, 숲에서 우는 새 울음소리에도 귀 기울여 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삶 아닌가. 40년이 지난 오늘 ‘나’는 왜 산도 못 보고 새 울음소리도 못 듣는가. 산중에 속진俗塵이 날아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는가. 언제쯤 속진의 욕망을 씻어버리고 ‘내 울음소리’로 표상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자성에 실린 고승의 목소리는 아름답다.
중기 작품군에 보이는 자아 성찰과 자성의 시는 대체로 이 작품과 같이 쉬운 우리말이 혼잣말처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펼쳐진다. 하심下心으로 내려설 수 있는 데까지 내려선 고승의 이러한 시어 운용은 독자에게 심리적 안정과 환희심을 가지게 한다.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니〉
이 작품은 《산에 사는 날에》 이후 후속 시집에 계속 수록된다. 《만악 가타집》에서 가타伽陀는 ‘부처의 공덕과 교리를 찬미하는 노래’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는 것은, 참나[眞我]로서 본래면목의 내가 현실 속의 나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기는 벌레처럼, 남들처럼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고, 배설하고 알을 슬며 살아간다. 고승이 자신을 기는 벌레에 비유하고 있다. 본대로 들리는 대로 느낀 대로 쓴다.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 진리가 있으니 어디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이것이 삶의 본질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몰자미沒滋味의 시다. 기는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승의 겸허와 성찰이 꾸미지 않은 언어로 무심無心한 듯 놓여 있다.
우리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무슨 죄가 많았을까
벼락 맞을 놈은 난데
오늘도 이런 생각에
하루해를 보냅니다.
—〈산일(山日) 1〉
이 작품은 《아득한 성자》에서 〈죄와 벌〉이라는 대중 친화적 제목으로 바뀐다. 고승이 절 밭두렁에 벼락 맞은 채 서 있는 대추나무를 보고 벼락 맞을 놈은 ‘나’라고 한다. 햇살 아래 비바람 맞으며 달콤 상큼한 열매나 주렁주렁 달아 보시하는 대추나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벼락을 맞았을까. 이목구비로 상을 만들고, 중국산 대추를 경산 대추로 속여 팔기도 하고 까치밥으로 남겨둘 것을 깡그리 따 먹는 건 사람의 죄. 그런 사람도 아닌 고승이 무슨 벼락 맞을 일이 있는 걸까. “오늘도 이런 생각에 / 하루해를 보냅니다.” 누구 들으라는 소린가. 고승의 꾸민 데 없이 소탈 겸허한 설법에 어리석은 이 중생은 부끄럽다.
한나절은 숲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산일(山日) 3〉
해조음海潮音은 ‘바다의 울음’이며 ‘부처님의 설법’을 의미한다. 이 작품도 《아득한 성자》에서 〈내 울음소리〉라는 대중 친화적 제목으로 바뀐다. 한나절 새 울음소리를 듣던 행자 시절이 있었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바다 울음소리라는 일음一音으로 부처의 법을 들었으 나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는 진정한 깨달음에는 언제 이를 것인가. 새 울음소리나 바다 울음소리는 상이 없는 본래면목의 청정 자성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 한다. 그런 세계에 살면서도 고승은 정각正覺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성찰하는 겸허한 시편을 남기고 있다. 대오의 경지가 아니고서 ‘내’ 울음소리를 듣고자 할 수 있을까. 평이하고 유려한 시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치고 있다. 유동流動. 이야기 처럼 들려오는 성찰의 시편들은 독자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면 서시와 종교와 고승에 대한 존경과 생에 대한 외경畏敬으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어제, 그끄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 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 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浮屠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뿐이네.
—〈재 한 줌〉
영축산은 경남 양산 통도사가 있는 산이다. 오랜 도반을 한 줌 재 로 보내고 내려오는 산사 길가에서 부도를 본다. 열반에 든 어느 고 승의 사리탑일까. 무정無情 부도에도 세월의 흔적이 검버섯으로 피어 났으니, 재 한 줌으로 보낸 도반의 얼굴이 떠오른다. 생각을 여의고 알아차린 순간, 손에 만져지던 재 한 줌만이 생생하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주머니 없는 수의壽衣는 무엇을 말하는가. 삶을 다한 뒤에 피안彼岸으로 가는 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 다. 업業이라는 그림자만이 흩어지는 재 한 줌 뒤로 남을 뿐. 둘째 수 종장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와 셋째 수 초장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와 같은 발화는 한 자 꾸밈없는 마음의 풍경과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진경이다.
삶의 즐거움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적멸을 위하여〉
이 작품의 제목은 2002년 《만악 가타집》에서는 〈적멸을 위하여〉였다. 2011년 《설악 자선 시집》에서는 〈평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었다. 손수 시를 골라 엮은 자선시집인 만큼 독자 대중이 느끼는 불교 편향성을 덜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자는 배려이겠다. 이후 발행된 시선집에서는 다시 〈적멸을 위하여〉로 확정된다.
적멸은 ‘일체의 상을 여읜 상태. 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려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를 이룬 상태’를 가리킨다. 깨달음의 경지. 열반. 고승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열반하셨다고 한다. 죽어야 일체의 상을 여읠 수 있으니 번뇌의 불이 꺼진다는 말이다. 상相이라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이다. 상태, 양상, 성질 등을 가리키는데 ‘생각한다고 하는 것’도 상이다. 죽으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여의게 된다. 인생 고해에서 이 번뇌의 불이 꺼지면, 죽으면 평화가 오는데 죽음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그저 기는 벌레로 살다가 후생에는 새의 먹이가 되어 또 열반을 맞을까. 적멸로 향해 가는 시에 어려운 말 하나 없이 고승의 성찰과 자성이 자연스럽게 구사되고 있다.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생명욕을 버린 무착無着의 보살행을 담고 있다.
지난달 무슨 일로 광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망월동에 처음 가 보았다
그 정말 하늘도 땅도 바라볼 수 없었다
망월동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망월동에서는 묵념도 안 했는데
그 진작 망월동에서는 못 본 것이 보여
죽을 일이 있을 때는 죽은 듯이 살아온 놈
목숨이 남았다 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나
내 지금 살아 있음이 욕으로만 보여
—〈달을 그리다〉
〈달을 그리다〉는 2002년 《열린시학》 여름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아득한 성자》에서는 〈망월동에 갔다 와서〉로, 《적멸을 위하여》에서는 〈망월동에 갔다 와서—달을 그리다〉로 제목이 수정되었다. 이러한 제목의 수정은, 80년대 광주 민주항쟁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몸 던지지 못한 자성과 회한을 담은 작품으로 현장성과 문학성을 모두 담아내려는 의지로 보인다. 역사의 현장에서 죽을 각오로 불의에 항거하지 못하고 살아남았으니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요, 살아 있다는 것이 치욕이라는 처절한 자성의 시편이다. ‘나’는 왜 그 역사의 현장에 동참하여 불의에 항거하지 못하였나. 무슨 일이거나 일선에서 제 맡은 소임을 하고 있었을 것이나 80년대 광주 민주항쟁이 소환될 때마다 통한과 회한이 남는 소시민이 있다. 일기처럼 이야기처럼 꾸밈없이 소시민의 아픔과 회한을 대변하고 있다.
5. 후기 성찰의 시편에 나타난 시적 수사
후기의 작품군은 2007년 《아득한 성자》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신작을 포함한다. 그리고 2011년 《설악 자선 시집》과 2013년 《마음 하 나》, 2015년 증보판 조오현시선집 《적멸을 위하여》에 기간 시집에서 중복되어 수록된 작품을 제외하고 추가된 작품과 2018년 열반 전까지 발표된 작품들로 발간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군을 포함한 다. 이 작품군에서 대표적인 성찰의 시편으로 《아득한 성자》에 신작으로 수록된 〈아지랑이〉와 〈아득한 성자〉, 《설악 자선 시집》12)에 신작으로 수록된 〈내가 죽어 보는 날〉과 열반 직전인 2017년 겨울 《서 정시학》에 발표한 〈고해〉, 〈자화상〉, 〈허물〉을 대표적인 성찰의 시편으로 고찰한다.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아지랑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게 삶이라 했다. 이 관념 덩어리, 실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며 붙잡고 매달려 가는 게 삶이다. 아지랑이. 무언가 이루겠다고, 존재 증명하며 힘껏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쳐 온 나날이 우습다. 그렇게 평생 헤매며 이룬 것은 무언가. 가진 것은 무언가. 이루었다 한들, 가졌다 한들 인생은 끝내 다 던져버리고 뛰어내려야 할 낭떠러지요 밀어낼 수 없는 절벽이다. 어쩌란 말인가. 인생이 그렇다 한들 도리 없는 중생은 사는 날까지 살아내야 하는 것. 무심 무착 하심으로 살면 어떤가. 어려운 말 없이 꾸밈없이 불러주는 고승의 노래가 도리 없는 이 중생의 눈을 뜨게 한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아득한 성자〉
하루살이는 성자다. 왜 성자인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있기에 아득한 성자다. 죽을 때가 지난 ‘나’는 아상我相으로, 생존욕으 로, 소유욕으로 누추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하루살이는 뜨는 해 보고, 지는 해 보고 천명대로, 이름값대로 주어진 하루에 알 까고 죽는다. 누추한 ‘나’의 생명이 천년을 산다고 해도 하루살이의 무착은 뛰어 넘을 수 없으니 하루살이는 성자다. 하루살이는 무착의 비유다.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 했듯이, 이 성찰의 시편에 독자 대중이 환호하는 것은 “하루라는 오늘 / 오늘이라는 이 하루”의 특별할 것도 없는 개인적 아포리즘의 선물에서 시작 한다. 하루라는 말에서 온 하루살이가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 알 까고 죽”어 버린다. 이 하루살이의 무착을 살신정각殺身正覺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착이라는 아주 어려운 삶의 형식이다.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에게 꽃을 던지는 사람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
아직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화장장 아궁이와 푸른 연기
뼛가루도 뿌려본다.
—〈내가 죽어 보는 날〉
이 작품은 3연 형식의 사설시조다. 길어진 중장의 사설을 엮음의 맛을 살려 이어 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초장과 종장은 장 단위로 배열하고 중장에는 밑줄과 굵은 글씨와 비껴 쓴 글씨체로 표시한다.13)
부음을 │ 받는 날은 ‖ 내가 죽어 │ 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에게 꽃을 던지 는 사람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 아직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화장장 │ 아궁이와 푸른 연기 ‖ 뼛가루도 │ 뿌려본다.
초장과 종장은 정연한 평시조 수준의 발화다. 전통적으로 ‘놀이’와 ‘풀이’의 기능을 담당한 사설시조는 풀어내고 싶은 말을 중장에 서 계기적으로 한껏 풀어낸다. 연상의 계기인 ‘생각하다가/바라보다가’, 과거를 표상하는 ‘걸어왔던/만났던/헤어졌던’, 현재를 표상 하는 ‘돌을 던지는/꽃을 던지는/따라다니는/붙잡고 있는’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반복은 유연한 리듬을 생성한다.
부음을 받고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누워 죽은 이를 생각한다는 일. 살아온 ‘나’의 행적을 돌아본다는 일. ‘나’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생 을 마치게 될까. 누가 ‘나’의 죽음을 울어줄까. 누가 ‘내’ 무덤에 와 맑은술 한 잔 올려줄 것인가. 그래, ‘내’가 죽어보는 날을 ‘나’도 한번 만들어 보자. 〈내가 죽어보는 날〉을 만든다는 것은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 어리석은 중생에게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 준다는 말이다.
진실로 이 세상은 물 없는 바다인가
하루에도 몇 차례나 이 목숨의 두출두몰頭出頭沒
잠겼다 떠오르는 한순간만 사는 것 같다
—〈고해(苦海)〉
인생은 고해라 했으니 이 세상은 물 없는 바다 맞다. 호흡지간呼吸 之間. 두몰頭沒, 이 고해에 잠기면 죽는다. 두출頭出, 떠오르는 한순간을 산다. 인간 욕망은 수미산須彌山을 다 주어도 채울 수 없다고 했다. 이 고해를 살아가며 때로는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솟구치니 욕망의 늪에 빠져 죽는 두몰이다. 때로는 나를 버린 하심으로, 무착으로 세상을 품는 내적 평화를 이루니 떠올라 숨 쉬는 두출이다. 욕망을 제어하고 욕망의 늪에서 빠져나와 숨 쉬며 살아간다는 것. 욕망을 제어 한다는 건 나를 세상에 내어준다는 말. 보살행 아닌가. 〈고해〉는 그 어떤 권위도 내려놓은 고승의 진솔 진정이 묻어나는 시편으로 독자의 심중에 직격해 들어온다. 누구라도 이 세상 물 없는 바다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성찰하게 되지 않겠나.
일흔 해를 다 보내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한갓 뛰는 것만 알고 다른 활동을 보지 못하는
두꺼비 두꺼비처럼 혼자 잘난 놈이었다
—〈자화상〉
고승으로서, 시인으로서 그의 공덕과 업적은 세상에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앞만 보고 뛰어가는 두꺼비처럼, 다른 활동을 보지 못 하는 두꺼비의 행진처럼 고승은 인생의 다른 국면들을 헤아리지 못 한 것에 대해 회한과 자성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한숨처럼 흘러나온 고승의 탄식. 어떠한 수사도 이 〈자화상〉 앞에는 사족일 뿐이다.
남의 삶은 다 보이는데 내 삶은 보이지 않네
남의 죽음은 다 보이는데 내 죽음은 보이지 않네
그것 참 남의 허물은 다 보이는데
내 허물은 보이지 않네
—〈허물〉
속담처럼 인생이란 게 그렇다.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이는데 내 눈의 들보는 못 본다. 삶도 죽음도 타인의 것이라면 거리가 있으므 로 잘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나를 관찰할 수 있는 거리가 없다. 내 눈으로 내 눈은 볼 수 없다. 그러니 내 눈의 들보, 나의 허물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남의 허물 들추지 말라는 말씀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씀이다.
〈고해〉, 〈자화상〉, 〈허물〉은 2017년 《서정시학》 겨울호 발표작이다. 사인펜으로 쓴 육필 원고의 약력은 ‘조오현, 시조시인 백담사 스님’으로 표기되어 있다. 열반 직전 한꺼번에 쓴 이 세 작품의 발화방식 또한 같다. 시적 형식도 〈고해〉와 〈자화상〉은 장 단위 3행으로 기사했다. 종장이 길어진 〈허물〉의 경우, 이 작품 의미의 핵이며 뒷구에 해당하는 “내 허물은 보이지 않네”를 분행分行하여 전체 4행의 시적 형식을 이루고 있다. 단시조는 ‘마흔다섯 글자 내외’로 표현하는 한국시가사의 가장 절제된 서정양식이다. 〈고해〉는 46음절, 〈자화 상〉은 50음절, 〈허물〉은 58음절을 보인다. 일상의 자연발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이 세 작품은 아무런 꾸밈이 없어 거침없는 발화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음보의 양식화 범위인 5모라(음절) 이내로 시어를 구사하고 있다. 고승의 지극한 대오, 큰 깨달음을 담고 있는 〈고해〉, 〈자화상〉, 〈허물〉은 삶의 이치가 오롯이 드러난 무산 시력詩歷 50년의 말후일구末後一句다.
6. 나가며
본고는 무산 대종사 열반 이후 창작 시기를 중심으로 초기·중기· 후기로 구분하여 선미禪味가 깃든 대표적 성찰의 시편을 대상으로 시적 수사를 고찰하였다. 2015년 증보 발행된 조오현시선집 《적멸을 위하여》에 수록된 작품은 177편이다. 창작 시기별 시기 구분에서 2007년 발행한 《아득한 성자》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는데 이 시집은 신작을 포함한 기간 시집의 작품들을 중복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시기 구분은 창작 시기별 작품군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론을 바탕으로 《아득한 성자》에 수록된 신작에 해당하는 작품과 열 반 직전까지의 작품을 후기의 시편으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기로 갈수록 시적 수사는 거침없고 꾸밈없는 어법으로, 옆사람에게 이야기하듯 하는 자연스러운 발화를 확인하였다. 특히 열반 직전의 작품인 〈고해〉, 〈자화상〉, 〈허물〉에서는 꾸밀 수 없는 한숨 같은 발화가 그대로 나타나 독자의 심중에 직격해 오고 있음을 본다.
선미가 깃든 무산 시조 성찰의 시편은 꾸미지 않은 무작위의 묘용으로 독자를 깊은 감화와 치유로 이끈다. 무작묘용의 창작 방식은 자 연과 실경의 꾸밈없는 진경으로서 그 핵심을 이루는 기법 아닌 기법이다. 조계선풍시원도량설악산문(曹溪禪風始原道場雪嶽山門)의 조실로서 무산 시조는 내려갈 데까지 내려간 하심으로 자연스럽게 하기 어려 운 말 없이, 꾸밈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대상을 드러내고 심중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정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평이하고 유려한 시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며 이야기처럼 들려오는 성찰의 시편들이 독자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독자 대중은 시와 종교와 고승에 대한 존경과 생에 대한 외경으로 심리적 안정과 환희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것이다.
입을 열어 말을 하면 곧 틀린다는 선문禪門의 말이 있으나 의언진여依言眞如,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는 뜻을 전할 수 없으니 고승은 시를 남긴다. 한시로 쓰던 전통적인 선시는 대중이 가까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시가 많다. 어려운 말 없이, 꾸밈없이 이해하기 쉬운 구어체 자연발화로 쓴 무산 시조는 아름다운 서정과 깊은 선지禪旨가 은은히 배어 있어 보고 느끼는 대로 독자 대중의 심중에 파고들며 감화와 치유의 몫을 감당하고 있다. 이보다 더 높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있을까.
1) 2022 만해축전 학술세미나 자료집에 수록된 본고를 《시조미학》(2022년 겨울호)에 재수록 하며 일기 몇 자를 옮긴다. 재수록을 위한 윤문 중에 불가해한 사건을 발견했다. 논문 기초자료에 포함된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산에 사는 날에』(2000)가 무산 시조의 시기 구분에서 빠진 것이다. 온전히 나의 잘못이다. 재수록 과정에서 누락을 발견하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밀어 놓았던, 논문과 작품론을 모은 평론집 출간을 앞두고 신중에 신중, 숙고의 자세를 다진다.
2) 배우식, 〈설악 조오현 선시조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148~150면 참조. 조오현의 법명은 무산(霧山)이고 법호는 설악(雪嶽)이며 자호는 만악(萬嶽)이다.
3) 오세영, 〈조오현의 선시조〉, 《설악무산의 문학 그 깊이와 넓이》(불교평론 엮음), 인북스, 2021. 190면.
4) 이숭원, 〈설악무산의 문학세계와 그 위상〉, 《설악무산의 문학 그 깊이와 넓이》(불교평론 엮음), 인북스, 2021. 212면 참조.
5) 앞의 책, 앞의 글, 210면 참조.
6) 앞의 글, 211면 참조.
7) 앞의 글, 246면 참조.
8) 《설악 자선 시집》에는 모두 66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2011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발행한 이 책을 두고 시인은 “한자어와 불교 용어를 빼고 우리말 표현으로 제목도 수정하여 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쓴 작품이 150편에서 160편가량 되는데 108편만 남겨서 훗날 책을 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9) 권영민이 엮은 이 책은 《조오현문학전집》(문학사상, 2012년 11월 12일)으로 1판 1쇄가 발행 되었고 《조오현시선집》(문학사상, 2015년 5월 20일)으로 2판 1쇄가 발행되었다.
10) 《아득한 성자》에 수록된 91편의 작품 가운데 기간 시집과 중복되지 않는 신작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성자〉, 〈아지랑이〉, 〈허수아비〉, 〈이 내 몸〉, 〈오늘〉, 〈축음기〉, 〈숨 돌리기 위하여〉, 〈춤 그리고 법뢰〉, 〈어미〉, 〈머물고 싶었던 순간들〉, 〈성(聖), 토요일의 밤과 낮〉, 〈떠 흐르는 수람(收攬)〉, 〈2007·서울의 대낮〉, 〈2007·서울의 밤〉, 〈사랑의 물마〉, 〈오늘의 낙죽〉, 〈떡느릅나무의 달〉, 〈쇠뿔에 걸린 어스름 달빛〉, 〈주말의 낙필(落筆)〉, 〈어간대청의 문답(問 答)〉, 〈궁궐의 바깥뜰〉, 〈늘 하는 말〉. 격외시 3수의 ‘1~3 그곳에 가면’의 제목을 〈저물어가는 풍경〉, 〈어스름이 내릴 때〉, 〈숲〉으로 바꾸어 발표. 〈산일 1〉의 제목을 〈죄와 벌〉로 바꾸어 발표. 〈산일 3〉의 제목을 〈내 울음소리〉로 바꾸어 발표. 〈일색과후(一色過後)〉, 〈너와 나의 절 규(絶叫)〉, 〈너와 나의 애도(哀悼)〉. 책 끝에 〈등걸불〉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절간 이야 기》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을 바꾸어 18편을 수록하고 있다.
11) 김학성, 〈시조의 전통미학과 현대시조 비평의 실제-조오현 시집 《아득한 성자》의 시적 마력〉, 《한국고전시가의 전통과 계승》,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353~354면 참조.
12) 이 책은 《설악 자선 시집》이라는 시집 이름과 만해사상실천선양회라는 발행처만 표기되어 있을 뿐, 발행 일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부처 형상의 선화를 가운데 그리고 우측에 ‘홍성란 시인에게’와 좌측에 ‘설악무산’이라 서명한 다음 하단에 ‘2011. 6. 9’라고 일자를 적은 시집을 소장하고 있다.
13) 이 작품의 분석은 홍성란, 〈설악무산 시조의 형태 분석〉, 《설악무산의 문학 그 깊이와 넓이》 (불교평론 엮음), 인북스, 2021. 163~164면 참조.
홍성란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경복궁 근정전)으로 등단. 첫 시집 『황진이 별곡』(1998), 『따뜻한 슬픔』(2003), 『바람 불어 그리운 날』(2005), 『춤』(2013), 『매혹』(2022), 우리시대현대 시조100인선 『겨울 약속』(2000), 시선집 『명자꽃』(2009), 시선집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2012), 한국대표명시선 100 『애인 있어요』(2013), 단시조 60선 『소풍』 (2016), 제1회 조운문학상 수상기념시집 『바람의 머리카락』(2016). 편저 『중앙시조대상 수상작품집』(2004),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조 100선』(2006), 현대시조감상 에세이 『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백팔번뇌』(2009), 베끼고 싶은 한 구절, 낭송하기 좋은 시조 100선 『세상의 가장 안쪽』(2017), 시조교육전문 연간지『유심시조아카데미』 (2012~2014) , 공저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의 시』(2014) 등이 있음. 제14회 중앙시조대상 신인상(1995), 제1회 유심작품상(2003), 제24회 중앙시조대상(2005), 제12회 현대불교문학상(2007), 제44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08 문학부문), 이영도시조문 학상(2009) 등 수상. 현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