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미래의 대안이 된지는 교육이 시작되고 부터인 듯하다.
교육이란 인간이 태어나서 현실의 삶에 적응하는 것, 나아가 자신의 삶을 보람되게 경영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즉, 인류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은 여기에서 나아가 미래사회에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적응시키고 더불어 우리의 운명을 맡길까하는 생각이 더 보태진 듯하다. 여기에는 지금 교육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마음이 깔려있다. 즉 이대로 아이들을 가르쳐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방법을 제시한다. 교육부에서는 인성교육프로젝트 5개년 계획을 시작한지 3년차이며, 중학교 자유학기제 등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관점을 조금 바꿔서 보고자 한다. 인간을 교육시킴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발도르프 교육을 창립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이론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현 아이들의 문제점은 공부를 스스로 하지 않는다. 또 공부에 흥미가 없다. 즉 자발성이 없는 것이다. 그럼 다른 분야에 흥미가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학교폭력과 같은 잔인성은 인간의 본래 모습과 오히려 어긋나고 있다고 본다.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되었는가 살펴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방법은 지식교육이다. 탐구학습과 같은 개념으로 쓰여지며 지식을 탐구하여 개념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정직이란 개념을 갖고자 한다면 '정직'이란 지식을 탐구한다. 즉 다양한 정직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도 살펴보고, 정직이란 뜻, 정직하는 방법도 살펴본다. 결과 아이들은 정직에 대한 개념을 가져야 한다. 달리 말하면 아이들은 정직해야 한다. 그러나 정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식과 실천의 괴리, 지식을 배워도 실천이 안된다는 교육의 무용론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인성교육 방법이 다시 새로 등장한 것이다.
지식교육이 왜 문제인가? 지식교육은 소크라테스가 메논에서 지식은 모든 삼라만상에 들어있기 때문에 이중 한 가지라도 골똘히 탐구하면 알수 있다고 말한 대목에서 출발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방법이 지금의 지식교육방법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이 진화해 온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지식을 골똘히 탐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중 영혼의 활동에서 반감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되면 공감이 점차 어려워진다. 공감이 이루어져야 대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말은 공감을 하면 정직이란 지식의 개념을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현 교육은 공감을 배제하고 반감활동을 촉진하는 교육-지식교육-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당연히 지식과 실천의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본성 중에서 영혼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영혼은 호흡을 하듯이 공감과 반감을 한다. 두 활동을 인간은 절대적으로 알지 못하나 두 활동의 흐름인 감정을 통해서 느낄수는 있다. 공감감정은 대상과 하나되는 온전한 사랑의 감정, 반감은 대상으로 보는 상태로 슈타이너의 표현을 빌리면 구역질을 하는 토할 것 같은 감정이라고 한다. 공감은 사랑의 감정과 같이 어떤 경우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지식을 표현하고자 할때에는 반드시 반감을 통해야 한다. 즉 지식은 대상으로보는 상태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추하면 어린아이가 지식교육을 많이 하면, 달리 말하면 지식으로 표현하도록 요구받으면 반감을 많이 하게되어 짜증을 많이 내는 감정상태가 되는 것이다.
대상의 본질 파악은 공감이 되어야 가능하다.
대상의 본질은 하나가 되어야 파악할수 있다. 공감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상태이다. 당연히 공감이 되지 않으면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지식을 배워도 그 지식의 본질을 모르면 배우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교육을 해도 교육의 효과는 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공감을 시키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영혼의 작용이 보이지도 않고 또 소크라테스의 탐구학습- 인류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탐구학습이라고 해석했다-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의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세요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생님 아무 생각이 안나요' 한다.
교사가 교과서 내용을 읽고 답을 물으면 아이들은 잘 대답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교사가 교과서 내용을 가지고 아이들이 생각하도록 문제를 바꾸면 위와 같은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필자도 도대체 왜 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한참 고민을 했다.그래서 나온 결론이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교사는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뇌가 움직여야 내 생각이 나온다. 만약 앞에 통닭이 놓여있다면 내 입안에는 곧 바로 침이 고인다. 이는 뇌가 움직여서 신경세포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내 생각이 안 나오는 것은 뇌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지식교육으로 인하여 뇌가 공감하지 못해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 원인의 하나로 너희들은 공부가 하기 싫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뇌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공감은 사랑의 감정이다. 공부가 재미있을때 뇌, 즉 뇌가 움직인다. 스스로 공부가 재미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말하였지만 사실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지식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현재의 아이들은 인간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감기능이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현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의 본성에서 - 영혼의 기능 중- 공감기능이 망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감기능이 곧 인성교육이고 창의력 교육의 씨앗이다. 공감기능을 살리면 현 교육의 문제점뿐 만 아니라 미래교육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뇌가 움직여야 내 생각이 나온다는 것을 현재 우리가 하는 방법으로 말하면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라. 그러면 의지와 창의력이 나온다'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지금은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한 교육이 주객이 전도된 상태가 아닌가 한다.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그 방법이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회자되는 말로 하면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라고 할수 있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