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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과 호서의 서원을 답사하며
2022년 9월 17일, 대구 박약회 청장년회에서는 호서 지역의 선현 유적을 답사하였다. 며칠 전부터 관련 서적과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며 답사를 준비하였다. 회덕(懷德)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등 서인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였던 西人은 배타적인 붕당정치로 많은 문제를 야기(惹起)하였지만, 호락(湖洛) 논쟁을 통해 성리학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은진송씨(恩津宋氏) 대종가
아침 7시에 출발한 15인승 버스와 승용차 1대는 거의 2시간을 달려서 대전 대덕구에 있는 은진송씨(恩津宋氏) 대종가에 도착하였다. 은진송씨는 호서를 대표하는 가문이다. 은진송씨의 기반을 닦은 분은 동춘당의 6대조인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이다. 송유가 세종 14년(1432)에 이곳에 낙향한 후 자손이 번창하면서, 쌍청당이 있던 이 동네는 ‘송촌(宋村)’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쌍청당은 송유의 호(號)이면서, 송유가 지은 건물의 이름이다. 그리고 현재는 은진송씨 종가의 상징이 되었다.
은진송씨는 17세기에 이르러 송시열과 송준길 등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벌(門閥)이 되었다. 이곳에서 대대로 모여 살던 은진송씨들은 정성을 다해 쌍청당을 지키면서 족친(族親)의 정을 나누었다.
쌍청당 앞 안내판을 보니,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이 지은 쌍청당기(雙淸堂記) 원문(原文)과 한글 번역문, 글의 유래와 의미까지 같이 쓰여 있었다. 문화재를 관람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서 깊은 쌍청당(雙淸堂)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문이 닫혀있었다. 망설이다가 동춘당(同春堂)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전의 보물 동춘당(同春堂)
쌍청당 앞에서 이정표를 보니, 동춘당이 700m라고 하였다. 짧은 거리이기에 걸었다. 동춘당에서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동춘당은 고층 아파트를 등지고 외롭게 서 있다. 바로 뒤에는 종택이 있고 왼편 좀 떨어진 곳에는 호연재(浩然齋)가 있었지만, 거대한 아파트 앞에서는 왜소하게 보일 뿐이다.
동춘(同春)은 봄과 함께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종묵 선생은 『조선의 문화공간』 3책에서,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이 동춘당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쓴 시를 인용하여 ‘동춘’을 설명하고 있다. ‘동춘당 아래에서 봄옷을 입어보니 춘흥이 일어 기수에서 목욕하는 듯(同春堂下試春衣 春興悠然想浴沂)’이라는 구절을 통해, 증점(曾點)의 흥(興)을 배우고 하늘과 땅이 만물을 기르는 뜻(生意)을 살피려는 송준길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풀이한다.
당시 송준길은 ‘소통과 화해의 명수’로 인정받았다. 서인의 종주(宗主)인 사계 김장생의 제자이면서, 남인의 영수인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자 제자였다. 이것은 송준길이 붕당의 틀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송시열과 비교된다. 송시열은 평생 좌충우돌하며 살다가 숙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당시 ‘대로(大老)’로 불렸던 대단한 위상의 인물이었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당파와 친소(親疏)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배척하였다. 송준길은 이러한 송시열을 포용하면서 평생 우의(友誼)를 나누었다. 동춘당을 답사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실천한 군자의 모습을 생각하였다.
동춘당 앞에 선 우리 회원들(사진:장광덕)
답사지에서 활주(活柱)로 추녀를 지탱하는 옛 건물을 볼 때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서 있는 연로하신 노인의 모습이 연상되어 안쓰러웠다. 그러나 동춘당은 연세는 드셨으나 허리 꼿꼿한 어른의 모습이다.
17세기 건물인 동춘당에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인 영쌍창(靈雙窓)과 독립 창호가 있다. 동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건물인데, 좌측 2칸은 온돌방이다. 온돌방 전면은 창호가 둘인 쌍창인데, 동춘당의 쌍창 사이에는 문설주가 서 있다. 이러한 창호를 ‘영쌍창’이라 하는데, 조선 전기 건축에서 많이 보이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사라지는 양식이다. 온돌방 서편 벽에는 독립 창호가 설치되어 있다. 독립 창호는 창호를 지지(支持)하는 나무 부재가 벽 속에 숨어 있기에, 지지대 없이 홀로 있는 듯하다고 붙여진 명칭이다.
동춘당 현판
건물에서 떨어져서 바라보니 처마 선도 아름다웠다. 처마 밑에는 ‘同春堂’ 현판이 걸려 있는데, ‘숭정 무오년 3월에 화양 동주가 쓰다[崇禎戊午暮春華陽洞主書]’라고 되어 있다. ‘화양 동주’는 송시열이 스스로 지은 호(號)이니, 이 현판 글씨는 송시열이 1678년에 쓴 것이다.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명(明)도 이미 멸망하였고, 같은 집안으로 우의를 나누었던 송준길도 이미 세상을 떠났던 시기였다. 이때 송시열은 귀양지에 있었다고 하니, 그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여중호걸(女中豪傑)이 거처하던 호연재(浩然齋)
쌍청당에서 나와 왼편으로 조금 걸으니 소대헌(小大軒)과 호연재(浩然齋)가 있었다. 소대헌(小大軒)은 송준길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가 지은 건물이다. 후에 송병하의 아들인 송요화가 옮겨 짓고 집의 이름을 ‘小大軒’이라 하면서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小大’라는 뜻을 찾아보니, ‘큰 테두리만 볼 뿐이지 작은 마디에는 개의치 않는다(見大體不拘小節)’의 의미라고 나온다.
소대헌 옆에 있는 건물이 호연재(浩然齋)이다. 이 집의 주인은 송요화의 부인인 안동김씨인데, 여중호걸로 알려져 있다. 동춘당에서 소대헌으로 가는 길에는 호연재를 설명하는 안내판과 큰 돌로 만든 시비(詩碑)가 있었다. 시비에는 오언율시 ‘야음(夜吟)’이 적혀 있는데, 읽어보니 그 느낌이 맑으면서도 시리다. 호연재가 가졌던 절절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특히 눈에 띄는 구절은 제5구 ‘삶이란 석 자의 시린 칼[生涯三尺劍]’이란 표현이다. ‘호연(浩然)’이라는 호(號)와 시의 이 구절은 호연재의 기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호연재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우리 회원들
호연재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호연재 김씨는 134수의 한시를 남긴 분으로 17~18세기 여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과거 공부를 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큰 집 살림을 경영하고 집안의 어린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충청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은 숭현서원(崇賢書院)
호연재에서 버스를 타고 숭현서원으로 향했다. 1585년에 수부 정광필(守夫 鄭光弼), 충암 김정(冲菴 金淨),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를 배향하였으며, 이시직(李時稷)의 상소로 ‘숭현’이란 이름을 사액 받았다고 한다. 후에 사계 김장생을 비롯한 다섯 분을 추가 배향하여 여덟 분의 선현을 모시는 서원이 되었다.
출입로 공사 때문에 정문으로 입장하지 못하였다. 영귀루(詠歸樓) 앞에 있는 홍살문은 일부가 파손되었고, 떨어진 파편은 영귀루 밑 구석에 있었다. 해설사는 숭현서원을 설명하면서, 사당을 대성전(大成殿), 강당을 명륜당(明倫堂)이라고 한다. 강당을 명륜당이라 한 것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서원의 사당을 ‘대성전’이라 하지는 않는다. ‘대성(大成)’은 공자를 상징하기 때문에, 성균관이나 향교 등 공자를 모신 사당 이외에는 ‘대성전’이란 현판을 붙일 수가 없다. 『맹자』 만장편(萬章篇)에, ‘공자지위집대성(孔子之謂集大成)’라는 말이 나온다. 이글을 살펴보면, 공자가 이전의 성인(聖人)인 백이(伯夷),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의 덕을 합쳐서 크게 이루었다는 의미로 쓰였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숭현서원을 설명하는 블로그에도 강당을 명륜당, 사당을 대성전이라 한 사례가 있었다.
숭현서원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숭현서원지(崇賢書院址)’는 제목이 붙어 있다. 서원이 복원되지 않았다면 맞는 표현이지만, 복원된 서원을 설명하면서 ‘옛터’를 의미하는 ‘지(址)’를 붙인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숭현서원은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98년에 복원되었다. 강당 안 북쪽 벽에는 입교당(立敎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인데, 정면 3칸은 온돌방이고, 중간 2칸은 마루였다. 마당에는 상촌 신흠(象村 申欽)이 짓고 송시열이 덧붙인 묘정비(廟庭碑)가 서 있는데, 글씨는 송준길이 쓴 것이라 한다. 훼손을 염려하여 옛 비석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해설사는 말하였다.
서원 앞에는 영귀루(詠歸樓)가 있는데, 다행히 위로 올라가서 주변 경치를 살필 수 있었다. 같이 답사한 일행 중에 한 분이 ‘옛날 영귀루 앞에는 큰 시내가 흘렀기에 풍광이 좋았는데 지금은 볼 수 없어 아쉽다’고 말하였다.
연둥쭈구미본가에서 먹었던 코다리 조림과 막걸리
20명 가까운 인원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을 구하는 것도 답사를 진행하는 사람에게는 큰일이다. 4년 동안 답사 실무를 맡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집행부가 겪을 여러 고충이 짐작되기도 한다.
원래 점심은 칼국수와 수육을 생각하였으나, 예약이 되지 않아 연둥쭈구미로 급하게 바뀌었다. 총무간사가 지인(知人)을 통하여 섭외하였는데, 휴일임에도 사장님은 우리를 위해 식당을 열어 주셨고, 넉넉하게 음식을 주셨다. 양도 많고 맛도 좋았는데, 특히 코다림 조림이 일품이었다. 거기에다 지역 막걸리를 곁들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매사필구시(每事必求是)의 가르침, 도산서원(道山書院)
‘매사에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여 제일의를 잃지 말라[每事必求是 毋落第二義]’는 만회 권득기(晩悔 權得己)가 아들인 탄옹 권시(炭翁 權諰)에게 내린 가르침이다. 송인창 교수의 논문을 보면, 권시가 호조좌랑의 벼슬을 받은 후에 효종에게 올린 상소문의 일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신은 어려서부터 신의 아버지에게서 ‘義와 利의 분변이 곧 사람됨의 첫 번째 조건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의 아버지는 항상 후생을 이끌어 말씀하시기를 ‘매사에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여 제일의(第一義)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열 글자를 ‘만회십자훈(晩悔十字訓)’이라 한다. 탄옹 권시(炭翁 權諰)는 송준길, 송시열 등 서인계 학자들뿐만 아니라 윤휴, 허목 등 남인계 학자들과도 폭넓게 교유하면서 당시 첨예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주관을 갖고 있었다. 노론의 근거지에서 ‘南人’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감정적인 부딪침은 거의 없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글이 있다. 송시열이 직접 지은 권시 묘표(墓表)의 일부분이다.
‘시론(時論)을 당하여 두 마음을 먹는 세상에서도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고 항상 大道와 함께 하였다.’
적자지심(赤子之心)은 갓 태어난 어린 아기가 가진 마음이다. 『맹자(孟子)』를 보면, 아기 시절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을 대인(大人)이라 한다. 송시열은 권시에 대해 최상의 찬사를 하고 있다.
대전 도산서원 현판
도산서원(道山書院)은 만회 권득기(晩悔 權得己)와 탄옹 권시(炭翁 權諰)를 모신 서원인데, 좁은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른쪽에 강당과 동서재가 있었고, 왼쪽 언덕 위에 함덕사(涵德祠)와 전사청(典祀廳)이 있었다. 햇살이 따가워 동재인 시습재(時習齋) 툇마루에 앉았다. 강당을 보니, ‘道山書院’이란 현판이 보인다. 통나무를 켜서 만든 판자에 서원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근엄(謹嚴)함이 느껴지는 서원과는 다른 분위기의 현판이다.
정면 5칸의 강당 건물에는 좌우에 1칸씩 온돌방이 있고, 중앙 3칸은 대청이다. 대청은 미닫이로 막혀 있어 시원한 느낌이 없다. 편협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미닫이로 막혀 있는 서원 강당은 답답하다.
강당 안에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만회 권득기(晩悔 權得己)의 십자훈(十字訓)이 걸려 있다고 들었지만, 닫혀있는 문을 열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버스를 타고 나오다 서원 관리사무소를 보았다. 관리사무소를 먼저 방문하였다면, 답사의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인근에는 탄옹 권시의 묘소도 있다고 하니 다음을 기약한다.
주자(朱子)를 모신 충현서원(忠賢書院)
주자(朱子)를 모신 서원을 답사한 것은 처음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홍살문을 들어서니 송시열을 추가 배향할 때 세운 추향비(追享碑)가 서 있다. 이 비석은 서원의 실질적 주인이 송시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왼편에는 박약당(博約堂)이 있는데, 강당이라고 보기에는 위치가 이상하다. 일반적 서원 건물 배치에서는 서재(西齋)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서예를 하시는 분들이 활용하고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를 건너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니 멀리 사당 건물이 보이는데, 처마 밑에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 쓰인 현판이 있다.
충현서원 주자 영정
삼가는 마음으로 사당 문을 열어보니, 주자의 영정(影幀)이 보인다. 마음을 가다듬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예를 갖추고 살펴보았다. 주자를 주벽(主壁)에 모시고, 주자의 좌측에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동주 성제원(東洲 成悌元), 중봉 조헌(重峯 趙憲),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있고, 우측에 한재 이목(寒齋 李穆), 고청 서기(孤靑 徐起),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이 있다.
관련 글을 읽어보니, 1581년에 서기(徐起)가 주자의 영정을 모신 것이 충현서원의 시작이다. 후에 일곱 분을 추가로 모셨는데, 흥선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1925년 사당을 다시 세우면서, 별사(別祠)에 모시던 고청 서기(孤靑 徐起)의 신위를 같이 모셨다고 한다.
용문서원(龍門書院)과 중화당(中和堂)
용문서원과 초려역사공원은 모두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관련 유적이다. 제갈량을 모델로 삼았던 이유태는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고자 했다. 1695년에 그는 현종(顯宗)에게 자신의 개혁안을 담은 기해봉사(己亥封事)를 올렸다. 하지만 자신의 개혁안이 시행되지 않자, 조정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면서 공주 중동(公州 中洞)으로 물러난다.
김장생에게 글을 배운 그는 호서오현(湖西五賢)의 한 사람으로 불리던 학자였지만, 후에 송시열과 갈등이 생기면서 노론 주류로부터 고립된다. 조정에 나아가 뜻을 펼칠 수도 없었고,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절친한 벗에게 배척되었다.
용문서원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었다. 옆에 있는 초려(草廬) 고택의 대문이 열려 있기에, 들어가서 관람을 허락받았다. 용문서원은 상당히 경사진 곳에 지어진 서원이었다. 따라서 사당과 동서재, 강당의 위치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징원당(徵遠堂) 앞을 지나면서 ‘미원당(微遠堂)’으로 잘못 읽었다. 위치나 규모로 볼 때 서원의 강당 건물로 지어졌다고 생각된다. 징원당을 돌아 뒤편으로 가니, 서원의 동서재로 보이는 오량가(五梁架) 맞배지붕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영남에서는 종가나 서원의 중심 건물이 아니면 오량가를 구경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늘 답사를 다녀보니, 호서에서는 중심 건물이 아니라도 오량가 건축물이 많이 있음을 본다.
용문서원 중화당
존성재(存省齋) 앞에 서니, 맞은 편에 ‘중화당(中和堂)’이란 편액이 보인다. 분명 위치로 볼 때는 서원 동재인데, ‘중화당’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당’이라는 명칭도 그렇지만, ‘중화’라는 말도 낯설다. 『중용(中庸)』을 보면, ‘중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天地)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진다’고 하였다. 임금이 사는 건물에나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덕수궁(德壽宮) 중화전(中和殿)이 생각나기 때문인가? 사당에는 ‘명덕사(明德祠)’란 편액이 걸려 있다. 용문서원의 주요 건물에는 유교 철학의 핵심인 ‘명덕(明德)’, ‘중화(中和)’, ‘존성(存省)’이 붙어 있다. 그 의미가 서로 연결되어 이해되지 않으니,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대구로 돌아오며 호서와 영남을 생각하다.
호서(湖西) 지방을 답사하면서 영남과 비교하였다. 호서는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老論)의 본거지였다. 조선 후기에 서울과 함께 정치와 문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호서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영남에 비해 호서지방은 서울과의 거리가 적절하였다. 상황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출사(出仕)와 은거(隱居)를 선택할 수 있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도 좋았고, 처사의 명분을 지키기도 좋았다. 또 중국을 왕래하는 연행사(燕行使)를 통해 새로운 문화에 접할 수 있었다. 여기에 금강을 통한 물류의 편리함과 넓은 평야에서 나오는 풍부한 생산물까지 있었다.
반면에 영남은 정치에서 밀려났기에 벼슬살이도 어려웠고, 산간을 무대로 하였기에 농업 생산물도 부족하였다. 새것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옛것에 집착하면서 사고의 폭은 점점 좁아져 갔다. 그러나 영남 유림은 이러한 환경에서 성리학을 더욱 정미(精微)하게 탐구하면서 힘을 비축하였다. 이렇게 응축된 힘은 한말 의병과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는 바탕이 되었다.
낯선 곳을 답사하면서 한 번에 많은 것을 얻기는 힘들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현장에서 설명을 들으면서 알고자 노력해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답사 후 버스 안에서 오가는 대화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 배움이 있는 만남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