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여 어렵게 찾아왔지만 수많은 천혜비경과 선한 인심에 빠져 쉽사리 돌아서지 못하는 곳이 청송이다. 2017년 상주영덕구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지금은 서울에서도 서너 시간 만에 올 수 있게 되었다.
한라산, 성산일출봉, 만장굴, 서귀포층, 산방산, 용머리해안, 수월봉, 중문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천지연폭포 등 제주도의 9곳에 이어 경상북도 청송군은 군전체가 두 번째로 지질학적 희귀성과 중요도를 인정받아 2017년 4월에 유네스코지정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었다. 주왕산이 유네스코등재의 중심에 있음은 물론이다.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헌장)에서 세계적으로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 명소와 경관을 보호·교육·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하에 관리하도록 지정한 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은 전 세계에 총 41개국 147개 공원이 인증되어있다
지각을 구성하는 암석은 마그마가 식어서 형성된 화성암, 광물조각들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암과, 화성암이나 퇴적암 같은 기존암석들이 열이나 압력을 받아 변한 변성암으로 나눌 수 있다. 청송에는 이 세 종류의 암석이 모두 분포하고 있다.
청송군 주왕산면에 소재한 주왕산周王山은 산세가 아름답고 특히 수직구조로 쌓인 화성암단애가 많아 경북의 소금강으로 불리는데 유서 깊은 사찰과 유적지도 다양하여 1976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중국 동진東晉의 왕족인 주도가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하자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었다. 그 뒤 나옹화상 혜근이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산의 이름을 주왕산으로 하면 고장이 복될 것이라 하여 명명했다고 한다. 웅장한 산세에 깎아 세운 듯한 기암절벽이 마치 돌병풍을 두른 것 같아 석병산石屛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왕산을 화두에 올리면서 주산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2013년 명승 제105호로 지정된 주산지는 주왕산국립공원 내에 있는데 주산천 지류의 발원지로서 길이 200m, 너비 100m, 수심 8m에 총저수량 10만 5천 톤으로 1720년 조선 경종원년에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고 한다. 비가 오면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는 퇴적암층이 바닥을 형성하고 있어 풍부한 수량을 유지할 수 있다.
주산지에 자생하는 능수버들과 왕버들 20여 그루가 울창한 수림과 함께 연출하는 아늑한 분위기는 고고하고도 신비롭다. 1983년 제방확장공사로 저수지 물을 뺀 이후, 30년 만인 2013년에 제방보수공사를 위해 물을 모두 뺀 적이 있는데 이때에도 왕버들의 생육에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자연그대로의 계곡트레킹을 할 수 있는 절골을 거쳐
주왕산 절골의 아름다운 산세와 어우러진 물안개 피는 주산지의 새벽을 담으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몰렸다. 늦은 밤 서울에서 출발해 다음날 새벽에 동트기를 기다리며 지켜본 주산지였지만 짙은 안개와 어긋난 기상으로 인해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저녁노을에 어우러진 왕버들과 청아하고도 붉은 물빛이 신비스러웠던 주산지의 옛 정취를 떠올리다가 절골입구로 걸음을 옮긴다.
세 번째 탐방인 오늘 주왕산행은 미답지인 절골을 통과하기로 한 산악회계획에 무조건 맞추기로 하였다. 약 10km에 달하는 계곡에 사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죽순처럼 솟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이 마치 별천지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글귀에 기대감을 가진 것이다.
절골주차장에 다시 차를 세우고 운수雲水길이라 이름 지은 절골입구로 들어선다.
‘우람한 주방산천周房山川 너무나 애틋하고, 아득한 운수동천雲水洞天참으로 어여쁘네.’
조선후기의 문인 이상정은 주왕산의 두 계곡을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구름과 물이 어우러진 계곡이니 얼마나 깊고 운치 넘치겠는가.
붉음과 노랑에 초록이 섞여 반겨주는 절골입구부터 암반과 자갈을 충분히 적신 청정옥수가 하얗게 피어오른 구름 아래로 흐르듯 멈춘 듯 잔잔하다. 여름에 적당한 강우 뒤의 수량이라면 계곡트레킹에 적절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절골은 절리 및 풍화작용으로 다양한 형상의 급준 단애cliff가 지속적으로 눈에 띈다. 암석들이 수직으로 뻗은 기암절벽의 급사면에 초록과 주황, 노랑이 어우러져 가을수채화를 전시해놓은 듯하다.
계곡의 그늘 쪽은 덜하지만 햇살 받는 양지 쪽 단풍들은 형형색색 화려한 색감을 드러내는 중이다. 동시에 산객들의 얼굴에도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절골은 때 묻지 않은 물리적 공간이 가을을 공유하며 동시에 탐방객들을 마냥 흐뭇하게 한다. 철제난간이나 데크계단 등이 거의 없어 바위징검다리를 딛고 물을 건너는 자연그대로의 물길트레킹을 할 수 있어 더더욱 흡족하다.
담과 소에 뿌려진 낙엽들은 신혼부부의 겨울 비단이불처럼 곱고도 푸근하다. 암반 위를 걷고 물을 건너다가 대문다리삼거리에서 주왕산의 첫 봉우리 가메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절골탐방안내소로부터 3.5km 지점인 대문다리에서 등산화 끈을 고쳐 메고 산길오르막으로 접어들면 가메봉을 1.2km가량 남겨두고 추색 고운 공간에 뒤떨어지지 않는 숲길을 걷게 된다.
가메봉삼거리에 이르러 잠시 숨을 돌리는데 산객들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내원마을로 방향을 잡거나 후리메기 쪽으로 가는 이들이다. 처음 예정했던 대로 일단 가메봉을 찍고 돌아와 내원마을을 경유하기로 한다.
가메봉(해발 882m)은 정상석 대신 팻말로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주변이 낭떠러지라 추락위험을 경고하는 안내 글이 적혀있다. 올라온 절골과 북쪽 먹구동일대, 물 오른 주변봉우리들을 두루 둘러보고 200m 아래의 삼거리로 다시 내려선다.
천연의 오묘함, 주방계곡의 폭포향연
후리메기삼거리와 주왕산 주봉 쪽에 비해 내원마을과 용연폭포방향으로 내려가는 산객들은 그리 많지 않다. 역시 곱게 물든 단풍숲길을 지나 경사로를 내려오면 억새군락을 만난다. 주변단풍들과 잘 어우러진 건강한 억새밭이다.
청송군 주왕산 내원골에 위치한 전기 없는 내원마을. 임진왜란당시 산 아래 주민들이 계곡상류 쪽으로 피난을 오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1970년대에는 80여 가구 500여 명이 거주했는데 1980년대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산객들에 의해 전기 없는 오지마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2005년 9가구가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2007년 수질오염과 미관저해를 이유로 철거되었다.
최근 국립공원사무소에서는 내원마을의 옛 추억을 더듬고 완만하게 펼쳐진 주왕계곡코스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생태문화휴식공간을 조성하였다. 내원마을의 유래를 살펴보고 마을 터를 지나 억새의 하늘거림을 보다가 용연폭포에 닿는다.
2단으로 이루어져 쌍용추폭포라고도 부르는 용연폭포는 주왕산의 폭포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규모이다. 1단 폭포는 폭이 약 4m, 낙차는 6m에 달하고 폭과 길이가 10m 정도에 이르는 구혈이 형성되어 있다. 구혈양측 암벽단애에는 왼쪽 면에 세 개, 오른쪽으로 한 개씩 하식동굴, 즉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겨난 동굴이 있다.
폭포수의 수량만큼 크고 깊은 용연의 짙푸름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데 금세라도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한걸음 뒤로 물러서게 된다.
상상이 지나쳐 등골 오싹함을 느끼다가 주방계곡으로 내려간다. 주왕산 방문탐방객의 90%가 찾는다는 주방계곡은 절골과는 확연히 다른 기암괴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명실상부한 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이다.
절구폭포를 지나 3폭포부터 2폭포, 1폭포가 이어지는 폭포향연에도 수많은 탐방객들이 몰려있다. 3단의 용추폭포 중 1단폭 아래의 못은 선녀탕, 2단폭 아래는 구룡소라 불리는데 탐방객이 없으면 선녀들이 마구 입수할 것 같은 천연의 오묘함을 지녔다.
높고 거대한 단애사이의 협곡으로 내려서는 길도 신비롭기는 마찬가지다. 설악산의 흘림골이나 주전골, 오대산 청학동계곡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학소대 암벽 사면과 병풍바위에 가을이 진득하게 묻어있다
주변을 붉게 물들인 시루봉이 가을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
학소교를 건너 학소대와 그 맞은편에 떡을 찌는 시루처럼 생겨 이름붙인 시루봉을 대한다. 옆에서 보니 설악산의 귀면암처럼 다소 사나운 얼굴형상에 가깝다. 자하교를 건너 비로봉과 촛대봉 암벽사이의 협곡에 높이 5m, 길이 2m가량 되는 주왕굴이 있다.
당나라가 반정에 실패하고 달아난 후주천왕 주도를 없애달라고 신라에 청하자 신라는 마일성 장군에게 주도의 소탕임무를 맡긴다. 마 장군에게 쫓긴 주왕이 이 굴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맞은편 촛대봉에서 쏜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맞은 주왕이 흘린 피가 주방천을 따라 흐르면서 붉은 수달래가 되었다고 한다.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 고생이 많았었구나.”
쫓겨 와 끝까지 재기하지 못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은 주왕에게 측은지심이 생긴다. 당나라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온 주왕은 죽기 전까지 여기 와서 많은 일을 도모했나보다. 적군의 침투를 방어하기 위해 자하성(주방산성)을 구축했고, 그의 군사들은 연화굴을 훈련장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또 주왕이 무기를 저장해두었던 무장굴이 있는데 굴속은 큰 암석으로 가로막혀 10m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다.
자하성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주왕암은 높이 솟은 나한봉, 지장봉, 관음봉, 옥순봉, 칠성봉, 호암봉 등에 의해 보호받듯 둘러싸여 있다. 이들 봉우리들을 둘러보고 오늘 산행의 날머리 대전사大典寺로 향한다. 대전사는 대개의 주왕산탐방객들이 들머리로 삼는 주왕계곡의 입구에 자리하였는데 주왕산을 병풍 삼았기에 첫눈에도 풍광이 뛰어난 사찰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특히 대전사 전면에서 볼 때 그 뒤로 우뚝 솟은 기암이 제일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암은 원래 하나의 암석이었으나 여섯 개의 거대한 주상절리를 따라 풍화작용이 이루어지면서 일곱 개의 암봉으로 분리되었는데 그 폭이 무려 150m에 이른다.
주왕을 쫓은 마 장군이 꼭대기에 깃발을 세워 기암旗巖이라 부른다. 한가운데에 두 조각으로 갈라진 금이 나있는데 마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서 생긴 거라고 전해진다. 사실 여부를 떠나 보기에도 특이하고 기묘한 기암奇巖이 대전사를 훌륭한 사찰 터로 거듭 각인시킨다.
대전사로 내려와 기암을 올려다보며 그 유래를 되짚어본다
대전사는 서기 672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적혀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로서 백련암과 주왕암이 부속암자로 있다. 최치원, 무학대사, 서거정, 김종직 등이 수도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군훈련을 시켰던 곳이다.
석가모니 삼존불을 봉안한 본당 보광전(보물 제1570호)과 관세음보살을 모신 부속전각인 관음전, 그리고 명부전, 산령각, 요사채 등을 둘러보고 경내를 빠져나온다.
가까이에 달기약수터가 있지만 시간에 쫓겨 이번에는 들르지 못한다. 청송읍 부곡리에 있는 이 약수는 빛깔과 냄새가 없고 마신 즉시 트림이 자주 난다. 시간당 약 60리터의 약수 솟는데 사계절 그 양이 동일한데다 가뭄에도 양이 줄지 않고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다. 빈혈, 위장병, 관절염, 신경질환, 심장병, 부인병 등에 특효가 있어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약수터를 찾는다. 골짜기를 따라 신탕, 상탕, 중탕, 하탕 등 여럿의 약수구가 있다.
다시 주왕산에 올 때는 여유롭게 청송 한옥민예촌에 고택숙박을 예약하고 달기약수로 위장도 튼실하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대감댁, 영감댁, 정승댁, 훈장댁, 참봉댁, 교수댁, 생원댁 등 일곱 채의 한옥을 만들어 마을을 꾸린 민예촌은 한옥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한껏 살리면서 편리하고 안락한 숙박시설을 구비하여 고택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내려와서 다시 올려다보면 주왕산은 서울인근의 북한산이나 도봉산처럼 언제든 가까이 다가설 만큼 친근한 느낌을 준다. 특히 오늘 같은 절정의 가을이면 손꼽아 가고픈 곳 중의 한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