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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죽문향(栢竹門響)
 
 
 
카페 게시글
선조 이야기 해동역대명가필보
고은 추천 0 조회 33 22.11.24 15:45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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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2.11.24 19:05

    첫댓글 부사과 휘 천석(天錫)공은 임연선조의 귀함으로 참판을 증직받으셨습니다. 157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글씨는 잘 모르지만 임연선조께서 글씨를 잘 쓰셨다는 것은 책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본 임연선조의 글씨는 행서나 초서가 대부분이었는데, 해서 글씨를 이렇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흡사 판본으로 인쇄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 작성자 22.11.25 20:45

    임연재 선생의 필체에서 엄정하고 굳센 기운이 느껴집니다.

    임연재선생 년보를 살펴보니 1573년 참판공께서 돌아가시어 호애산 선영에 장사지내고, 묘소 아래 여막을 짓고 삼년 시묘하였으며 1575년 服闋(3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음)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연후로 孤哀子라는 표현을 쓰신것으로 보이며 위의 글은 시묘하는 여막에서 쓰신것으로 보입니다.(연보중 三年一不下家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임연재선생 연보

    神宗萬曆元年癸酉 先生四十歲 正月。丁參判公憂
    1573년 선생 40세.1월 참판공께서 돌아가시다.

    執喪過禮。晝夜號泣。坐臥草土。仍中濕。葬纔畢。下部痿弱。起居須人。浴椒水而得差。 

    아버지 상사에 있어 예가 지나쳐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통곡하였으며, 거적자리에 앉고 흙 베개를 베고 누워서 중습(中濕:습기에 놎둘되어 생기는 병)에 걸렸다. 장례를 겨우 치르고는 하반신이 저리고 약해져서 기거(起居)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했는데, 초수(椒水)에 목욕하고는 조금 나았다.

    三月葬參判公于虎崖山承旨公墓後。虎崖山在柰城縣南三里許。

    3월 호애산 승지공묘 뒤쪽에 참판공을 장사지냈다. 호애산은 내성현 남쪽 3리에 있다.

  • 작성자 22.11.25 12:01

    丁未葬先夫人鄭氏。至是合窆。構廬墓下。三年一不下家。
    정미년(1547)에 선부인(돌아가신어머니)을 장사지냈는데 이에 이르러 합장하였다.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삼년동안 집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先生嘗語子弟曰今人從禮返魂。未爲非也。一或不謹。其罪大矣。且中材以下。易流於惡。或貧不得盡合於禮。則不如廬墓之爲得也。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예에 따라서 반혼(返魂)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조금이라도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 죄가 클 것이다. 또 중재(中材) 이하는 악(惡)으로 흐르기 쉽고 간혹 빈부가 고르지 않아서 먹고 자고 기거하는 것이다. 몸가짐이 예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시묘(侍墓)하는 게 차라리 낫다.”라고 하였다.

     秋定墓山禁護約束。虎崖山自曾祖妣以下三世墳塋在焉。子孫之居是傍者數十家。先生爲之嚴立約束看護。
    가을에 묘산(문중선산)의 보호 규칙을 정하였다. 호애산(虎崖山)은 증조비(曾祖妣) 로부터 삼대(三代)의 분묘(墳墓)가 있는곳이다. 자손 가운데 이 곁에 살고 있는 자는 수십 집이 된다.선생이 엄격하게 규칙을 세워 묘를 보살피게하였다.

  • 작성자 22.11.25 12:02

    神宗萬曆二年甲戌 先生四十一歲 春。撰參判公墓誌。○十月請參判公墓碣銘于具柏潭

    1574년 선생41세 봄. 참판공 묘지를 찬하였으며 10월 구백담(구봉령)에게 참판공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神宗萬曆三年乙亥 先生四十二歲 三月服闋 構齋舍于虎崖山下。扁以追遠堂。因作齋菴。使僧徒守之。洪正字思齊書扁額。柳文忠公記之

    1575년 선생 42세, 3월 상제가 끝나 상복을 벗고 호애산 아래에 재사를 지었다.
    편액을 추원당이라 하였으며 암자의 승려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정자 홍사제가 편액을 쓰고 류문충공(류성룡)이 기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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