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시내 봉산문화거리에 있는 대구화랑에서 서예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인과 인사를 하니, 나에게 보여준 것이 바로 이 분재기였습니다. 이 문서는 나의 12대조(휘 흥주興冑, 1624~1660)가 돌아가신 한참 후에 자녀분들이 재산을 나눈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분재기 뒷면을 보니, 이 문서는 셋째이신 만(晩)의 아드님(휘 수장遂章)께서 관청에 신고하고 현감의 수결을 받은 것이 보입니다. 첫머리에 '옹정(雍正) 13년 을묘(乙卯)'라 쓰여 있으니, 관청에 신고한 연도는 1735년입니다. 따라서 분재기를 작성한 해도 1730년대 초반이 될 것 같습니다.
저의 12대조는 휘는 흥주(興冑), 자는 윤백(胤伯)입니다. 생부의 휘는 택전(澤全)인데, 백부(휘 숙전淑全)의 양자로 가서 종가(宗家)를 계승하였습니다. 12대조께서는 금역당(琴易堂) 선조의 손자이고, 임연재(臨淵齋)의 증손자가 됩니다.
12대조의 자녀는 모두 7남 1녀입니다. 장남은 휘는 석(晳, 1641~1663)이며, 자는 성여(聖與)입니다. 학문의 성취가 빨라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차남이신 11대조의 휘는 창(昶,1643~1716))이고 자는 서여(舒汝)입니다. 아우인 도와(綯窩)공의 문집을 보면, 재주는 뛰어났으나 돌아가신 형님을 대신하여 집안을 이끌었기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집안 어른께 들은 바에 의하며, 우리 집안의 집성촌인 등재(登峴)에 처음 터를 잡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아우인 면(冕)과 함께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삼남(三男)은 휘가 만((晩)이고 자는 대성(大成)인데,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을 지내습니. 아래 분재기를 영일현 관아에 제출하고 현감의 수결(手決)을 받은 수장(遂章)공은 공의 아드님이 됩니다.
사남(四男)은 휘가 면(冕)이고, 자는 봉경(奉卿), 호는 도와(綯窩)입니다. 갈암 이현일의 제자로 학문이 높았으며, 문집으로는 [도와집(綯窩集)]이 있습니다. 어려서 백졸암 류직(百拙菴 柳稷), 금옹 김학배(錦翁 金學培)에 글을 배웠으며, 자라서는 갈암 이현일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금옹 김학배는 생부인 택전(澤全)공의 사위이니, 도와 선조에게는 고모부가 되기도 합니다.
공이 돌아가신 후에 영남의 명사들은 공을 가리켜 '영남의 일류(一流)'였다고 하면서, 유학의 도를 계승할 인물이 돌아가셨다고 슬퍼하였다. 이러한 후대의 평가에 의해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의 증직(贈職)을 받았습니다.
오남(五男)은 휘가 경(炅)이고 자는 회여(晦如)입니다. 계부(季父, 휘 興一)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육남(六男)은 휘가 준(晙 )이고 자는 군보(君甫)입니다. 칠남(七男)은 휘가 석(碩)인데, 자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따님은 광산 김의순(光山 金順義)에게 출가하였습니다.
처음 분재기를 보았을 때, 재산이 분포한 곳은 영일현이라 되어 있어서 의문이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안은 안동을 중심으로 살아왔었기 때문이지요. 아마 안동 지역의 재신을 먼저 나누고, 나중에 영일현의 재산을 나눈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2대조(휘 흥주興冑)께서 1660년에 돌아가셨는데, 분재기 작성은 173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니,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재산은 그 자녀분의 아들이나 손자가 대신 참석하여 수결을 하고 재산을 상속받고 있습니다. 아마 이 당시에는 12대조의 자녀분들은 대부분 돌아가신 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 문서를 보면, 9대조이신 등고(登皐)공께서 직접 붓을 잡고 재산 분배 내역을 적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의 친필을 대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글씨를 보는 안목은 없지만 필체가 좋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문서를 구입한 분(대구화랑?)이 분재기를 검토하고 '유루분재(流漏分財)'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재산 상속 후에, 누락된 영일 지역의 재산을 확인하고 나눈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루분재(流漏分財)' 오른 편에는 '재주자필배수장(財主自筆裵遂章)'이라 쓴 것이 보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때 분재기 뒷편에 쓰여진 이 글은 12대조의 삼남이신 만(晩)의 아드님인 수장(遂章)공께서 관청에 재산 상속을 신고하기 위해 쓰신 글이라 생각됩니다.
오른 편 위를 보면, '옹정(雍正) 13년 을묘(乙卯)'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관청에 신고한 연도는 1735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왼편 위에는 영일현 현감의 수결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