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을 속엔
박 하 경
내 가을 속엔
아랫집 살았던 두 살 아래
선옥이가 코스모스로 살고있다
간드러진 허리같은
해맑은 웃음으로
선옥이는 가을을 데려왔다
작고 갸냘프고 동그마했던
그애는 어떤 날엔 하얀 코스모스였다가
어떤 날엔 샛분홍 코스모스였다가
때론 붉게 베어나는 피같은 코스모스로 피어나
내게 가을을 데려다주었다
올 가을, 내 가을 속엔
여전히 선옥이가 찾아왔다
서늘한 함박 웃음을 머금고
청아한 파아란 하늘 같은 미소를 떠받들고
간들 간들 세월의 징검다리 건너
내게로 가을을 데려왔다
내 가을 속엔 언제나 두 살 아래였던
선옥이가 코스모스로 살고있다
꽃 굿 1.
박 하 경
어야, 한판 걸판지게 놀아보자
천둥번개 징을 삼고
구름너울로 질주하는 폭우 꽹과리 삼고
강소리 물소리 ㅡ모든 물소리 장구삼아
걸판지게 한판 놀아보세
온몸이 북채되어
대지를 북삼아 두드려라, 두드려라
소리를 질러 포효하며 달려보자
공연기간은 열흘
마당놀이 제목은 '花無十日紅'
무대는 끝없을 대지로세
멈추지마라, 두드리다 두드리다
선혈이 낭자하면 붉은 꽃으로 피리라
달리다 지쳐 쓰러지면
들꽃으로 짓쳐 나리니
신명나서 뛰고 뛰다 벗겨지는 신발
이름모를 사연안고
대지를 열어 낭자한 벌과 나비를 부르리
술을 빚어라
우리가 마시고 취해야 붉을 수 있으리
내 가는 길을 막지마라
막아서지마라
땅위, 물위, 산위,
광활한 대지 그 어느 곳에도
취한 내 몸, 내 영혼 닿아야하리니.
덩더쿵 덩더러 덩더쿵!
여명은 바람
박 하 경
함정의 번지수를 안다면
희망의 발생을 저지할 수 없으리
굴절된 각도로 흐르던 바람
붙잡아둔 시선은 신선하다
동터오는 시선!
새들이 깨어나며 부서진
태양조각을 물어오고
물려온 태양은
새들의 깃털로 황홀한 빛을 흩뿌린다
일어서는 나그네처럼
지팡이 짚고 허리 치켜드는 바람
눈부셔라 저 여명의 문을 여는
바람의 흰 손, 거룩한 손길이여
하나의 정점으로
치달았다 흩어짐의 몸짓으로
먼 미래의 여명을 점치는 부챗살
동터오는 시선, 너의 소리여!
몽유도에 착륙하다
박 하 경
어둠도 아닌 새벽도 아닌 길을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걷는다
젖은 꿈이 질퍽거리는 길 위로 여자를 따른다
길이 거꾸로 서서 여자를 끌어간다
질주하는 차들은
공포와 어둠을 짙게 염색하고
다가서는 새벽을 뒷걸음치게한다
삶의 경계를 벗어나는 상여보다
더욱 힘있게 내닫는 차의 행렬
휘청이며 몽유도에 닿다
환상인가 현실인가
자욱한 안개 서리서리 꽃처럼 피었다
어지럽게 비행기가 날고
일본의 홋카이도
필리핀의 피지
호주의 시드니
이태리의 나폴리
인도네시아 발리
빙의된 영혼이 중얼거리는 뜻모를 이름들
어둠도 아닌, 새벽도 아니었던
김포공항 곁에서
몽유도에 착륙하다
일상의 코 앞에 몽유도가 있었다
대지가 샘을 긷던 날
박 하 경
비가 내리는 것은 아마도
지구가 우주의 샘물 길어
대지의 숨구멍을 틔워
피돌기를 시키는 것이리라
2007년 8월 여드렛날 출근길
지구가 샘을 긷는 소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다단조의 음률
모시한복 매무새 같은 가야금 병창소리처럼
높다랗고 가느다란 비파의 결고움으로
내게 온
펄펄 살아있는 우주의 샘 그대로였다
우산을 집어던지고싶은 충동이
곱게 접혀
내 마음 어딘가에 있을 샘 열어 함께 붓다
마를까 조심스러웠던.
영혼의 은빛 수첩
박 하 경
얼음처럼 차가운 불빛
펼쳐든 은빛 수첩에 반사되어
시술된 언어로 조각되다
수첩 안에서
불러내주기를 기다리는 이름들
누구나 주인공
누구나 나그네
누구나 조연
누구나 응시하는 죽음의 경계선상 위
공략당한 시심 우르르
3막 4장으로 막이 내리고
생과 꿈의 경계에서
오감이 만족스러운 오르가즘 향하여
희망으로 발기하며
다시 불러보는 이름들
영혼으로 여닫는 은빛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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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자르기
박 하 경
아가씨가 가위를 들고
거울속에서 나를 건너다본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자존심을 잘라줘요"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사각사각 조심스레 자존심에
가위질을 하는 아가씨의 손길이 떨려나고
거울속 내 자존심 번뜩이며
거침없는 가위질에 비명을 지른다
싹둑 싹둑 잘려나 추락하는 자존심
한뭉탱이도 넘게 잘려나간 자존심 자리엔
무엇이 남았을까
분노, 서글픔, 서러움 따위야
씨도 없이 말려야할 연민일 뿐인 거야
꼿꼿이 서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비워낸 자존심 자리엔 성공나무를 심자 맹세했던
빛나는 순간을 친구에게 자랑하며
내 머리 어때? 자존심을 잘랐는데
그녀의 지독한 쓴소리,
자존심이 아닌 자만심을 잘랐어야지/
달맞이 꽃
박 하 경
그대가 혼을 세워
달을 불러주지않으면, 못내
슬픈 낯색으로 저마다의 꿈을 저버린채
떠나고 말 걸
달을 붙잡아 지구를 사모하게 만든 네 마력에
몸을 묻고 싶은 밤
출렁임의 흡인으로 밤의 영가를 불러
너로 더불어 달을 시기케하고말리
차마 샛노랄 수 없어
달빛의 사랑으로 색을 채우는
빛나는 너의 운명은, 오직
달을 부르는 혼불!
기억의 회귀
염주알 같은 달빛이 흐르던
탱자나무 사잇길
유년시절이 고장난 시계처럼
걸터앉았고
제자리 걸음에 뉘난 탱자나무가
살째기 마음의 바다를 노저어
마실을 떠나면
허연 허벅지살 같은
내 마음도 함께 손잡았다.
탱자가시에 걸려
멈춰섰던 달무리들이 풀려나
기억의 실타래가 서서히
유영하듯
집으로 돌아올 기색이면
슬픈 영혼의 그림자들의 회귀의 거룩한 시간
기억의 실타래 따라 돌아오는 소리, 저 소리.
나 어디 있느냐고 묻는 물음
내일쯤 너를 불러줄 감각의 문지방.
독도의 새들은 한국어로 운다
박 하 경
독도 새들은 한국어로 운다
독도는 한국어로 말하는 새들의 천국
거친 파도가 갯바위를
애무하며 새들에게 한국말을 배운다
독도 새들은 한국어로 운다
태고적 이땅을 다스렸던
가림토 문자도 알고있다
단군신화가 신화가 아닌
실화란 것도 독도 새는 안다
독도 새는 대를 이어
한국역사를 한국어로 가르친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이야기
그 후 발해의 이야기,
만주벌판을 말갈기 세워 누볐던 이야기
독도 새는 한국역사를 한국어로 전해준다
한국사의 바위는 사람들이 지키지못해
독도 새가 지킨다
카페 게시글
은빛수첩낭송회 방
08년 9월 낭송시
그동안 낭송했던 시들을 모아 동인지를 만들어요. 10편 골라오세요^^*
秀重 박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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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9
08.09.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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