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북간도 첫 방문에서 북녘땅에서 넘어왔다는 아주머니 한분을 만났다. 조선족동포의 안내를 받아 찾아 온, 그녀의 이빨은 처참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살기 위해 중국 시골 농부를 따라 살림을 차린 게 문제였단다. 술로 망가진 그 농부와의 삶은 술주정과 폭력의 연속이었다. 생 이빨을 모두 잃은 어느날 그녀는 여기저기 SOS를 보냈다. 나 역시 그 간절한 도움 요청을 받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우선, 난생 처음 만난 북녘 동포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다. C국에서 운신의 폭은 좁았다. 발만 동동구르다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에겐 도울 힘이 없었던게 아니지만, 조금도 힘이 되지 못했다. 갈팡질팡 잠만 설치고 있던, 무력한 나 자신을 자책했다. 그 사건은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 생애의 아픈 이빨로 남았다.
5년 전, 캐나다 켈로나 B교회를 방문했다. 그곳 목회자는 동족어린이사랑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콧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젊은 목회자에게는 거슬리는 수염이었다. 이빨 문제 때문이라 했다. 이빨 치료비가 없어, 수염을 길러 입을 가린다 했다. 북간도에서 만났던 그 동족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그는 캐나다란 선진국에 살고 있었지만, 경제적인 벽에 막혀 고통받는 또다른 아픈 이빨이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그의 이빨 치료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동족어린이 사랑 단톡방에 안타까운 그의 상황을 알렸다. H장로님이 천 불을 보내왔다.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빨 치료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는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신 주님을 바라보았다. 계속 기도 드렸다. 그리고 한 해 그리고, 두 해가 흘러갔다. 그는 턱수염으로 여전히 무너진 이빨을 가리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북방으로 가는 길에 고국을 들렀다. 거기서 주께 쓰임받는 놀라운 의사를 만났다. 선교사들의 열악한 이빨 치료를 사명으로 하는 K치과의원이었다. K의원은 그에게 말도 안되는 치료비를 받고, 임플란트 10개를 심어 주었다. 아픈 이빨은 회복의 길을 찾았다.
15년 전부터, 나에겐 북녘땅에 들어갈 길이 열렸다. 동족어린이들(탁아소 유치원)을 위해 심부름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 유독 나에게 크게 다가오는 건 아이들의 아픈 이빨이다. 나도 어린 시절 아픈 이빨로 고생한 기억이 선하다. 30년 전, 답없이 헤어진 아픈 이빨은 동족어린이들 가운데 지금 풀어가야 할 숙제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