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화 의지의 폭력성에 관한 성찰
-서금복의 <라떼는 말이야>
여세주
오랜 기억을 불러내어 그것에 대한 감성을 표현하는 서정 수필이 한국 수필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런 만큼 사회현실에 관한 문제는 수필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서구의 에세이와 달리 한국 수필에서 작품의 시대성은 애초부터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무관심을 문학적 순수성으로 오해한 탓이다. 수필이 사회적 문제를 배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삶의 조건인 사회현실에 관심을 두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궁구하는 일에 해당할진대,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일종의 현실 도피다.
서금복의 <라떼는 말이야>는 이 시대가 당면한 세대 간의 사고방식 차이에서 오는 갈등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한국 수필의 물줄기를 바꾸려는 대열에 앞장선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직장 생활의 힘겨움을 하소연하는 아들과의 전화 통화를 하는 데서 문제의식을 찾는다. 아들은 지친 목소리로 “무조건 ‘나 때는 말이야’로 밀어붙이는 힘”을 막아낼 수 없어 “직장 생활 10년 만에 이렇게 자존감이 무너지긴 처음”이라고 하소연한다. 작가는 그런 아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전쟁이 벌어지는 이국에서 힘들게 직장 생활을 버텼던 남편을 내세우며 아들에게 은근히 충고하는 말을 해버린다. ‘나 때는 말이야’로 힘겨워하는 아들을 ‘나 때는 말이야’로 나무란 셈이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이러한 무의식적 태도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라는 유행어는 직장 상사나 부모 등 나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위를 희화화하는 말이다. 기성세대는 오직 자신의 경험을 앞세워 젊은이들에게 조언하려 한다. 자신이 살아온 공간과 시간에 갇혀 구태의연한 가치관으로 젊은 세대들을 가르치려 든다. 조언과 가르침은 곧잘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기성세대의 이른바 ‘꼰대질’이 젊은 세대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이슈화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대 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대 갈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특별히 대두되고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다. 농경사회와 산업화사회에 걸쳐 가난하게 살아온 구세대와 후기산업사회의 풍요 속에 성장한 신세대 사이의 가치관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시대적 변화가 너무 크기에 기성세대들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시대적 필연이다. 기성세대들이 보는 세상과 젊은 세대들이 보는 세상이 같을 수 없는데도, 기성세대들은 눈앞에 놓여있는 이 세상이 젊은 세대들이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마치 진리인 양 젊은 세대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이 작품은 기성세대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수적 권위주의’라고 규정한다.
이 작품에 대한 이해는 기성세대가 지닌 동일화 의지의 폭력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각성하는 데서 멈출 수 없다. “자기 흉을 자기가 알면 그러지 않겠지”라는 작가의 말은 기성세대의 자발적 성찰을 유도한다. 여기서 ‘흉’이란 단어를 단순히 ‘비웃음을 살 만한 행위’를 지시하는 사전적 의미로 한정시켜 둘 필요는 없다. ‘무지의 흉’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를 따진다면 ‘변화와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지’인 것이다. 아들의 세계와 아버지의 세계가 다르고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실상을 알면서도 아버지이기를 바라는 동일화의 의지와 힘을 가동시킨다면 착각이며 오인이다. 변화와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동일화의 의지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르면서 세상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고 오인하는 무지는 벗어나기 어렵다. 무지한 줄 알면 그 무지에서 벗어나려 애쓰겠지만, 그것을 모르면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는 그 ‘흉’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는 것’은 지식을 갖는다는 말이 아니다. 깨달음을 의미한다. 기성세대들이 ‘선험적 가상’에 매몰된 종속적 주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시대적 관습이나 이념, 특정한 지식이나 가치에 갇히지 않고 세계의 유동적인 전체성을 인식할 때 진정한 자각에 이른다.
작가는 이와 같은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내용을 통일성 있게 펼쳐나가고 있다. 여러 개의 직간접 경험들을 순차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사유를 펼쳐나간다. 경험을 불러내어 하나하나 해석하면서 글을 이어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유의 전개를 위해 적재적소에 경험을 동원하는 글쓰기를 한다. 경험과 사유를 교차시켜 놓는다. 경험은 감각적인 관찰이라면 사유는 지적 통찰이다. 경험은 구체성을 추구하고 사유는 추상성을 추구한다. 수필은 경험과 사유의 적절한 교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장르의식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의 구성은 튼튼하다. 그런 점에서 어느 한 단락은 물론, 한 문장조차도 허투루 던져진 것은 없다.
문학작품에서는 정연한 질서가 요구된다. 이때 문학작품이 추구하는 질서를 문학적 질서, 유기적 질서라고 바꾸어 말해도 된다. 의미론적 체계라고 이해해도 상관없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보수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대한 성찰로 이루어진다. 보수적 권위의식을 하나씩 발견하고 확인해 가는 점증적 과정으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장 생활을 견뎌냈다고 충고한 말의 문제성→꼰대 여부를 점검해 보는 문항 다섯 가지에 다 해당하는 자신의 정체 발견→집안 행사 때마다 며느리 보란 듯이 치마 갖춰 입기, 가족 생일에 반드시 편지 쓰기 강조, 아들이 출근길에 전화하기, 손자가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문안 인사하기’로 이어지는 경험의 연쇄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작가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문제라고 말한다. 어느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갈등에 관한 또 하나의 경험적 사례를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을 자신의 가치관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동일화의 욕구는 나이 든 사람이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작품 전개를 통해 독자를 감동시키려 하기보다는 독자를 변화시키려 한다.
서금복의 <라떼는 말이야>는 매우 잘 짜인 문학적 질서, 즉 의미론적 정연성을 구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파격이 수필의 여유라는 이유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구조적으로 완벽성을 갖추어야 아름답게 보인다. 한 송이의 꽃이 지닌 질서만 봐도 얼마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가. 어그러지지 않는 자연의 질서를 모방하려는 것은 미를 추구하는 문학의 본성이다.
-《수필미학》 33호, 2021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