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짐을 매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 날 어둔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비」입니다. 비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지연시켜주는군요. 그래서 시적 화자는 그 비가 너무나 고맙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은 화자의 간절한 심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비가 그치면 기어코 떠나야 하는 사람이기에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라고 노래하며,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둘째 수 종장에서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라며 짐짓 비를 빌려 자신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는데 셋째 수에 오면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가 들리는군요. 빗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그 사람도 헤어지기 싫은 건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러기에 ‘시름없이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아 떠나지 않는 거지요. 그만큼 두 사람의 사랑은 깊고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