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사진은 비운의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연주는 독일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의 연주로 보입니다. '자클린의 눈물'을 연주한 많은 유명연주자가 있지만 제겐 그의 연주가 가장 진하게 다가와서인지 그의 연주를 주로 듣게 됩니다. 베르너 토마스는 오펜 바하의 미발표곡인 이 곡을 발굴해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붙인 연주자이기도 하지만, 슬픈 선율이 몸을 휘감으면서 작곡자인 오펜 바하의 악상을 또 다른 의미로 깊게 다가오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이토록 깊게 다가올 수 있을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짧은 논문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구두’를 통해 구두상점에 진열되어있는 갓 구어 낸(?) 구두와 다르게 삶의 흔적이 깊게 베어있는, 주인이 벗어놓은 ‘그 낡은 구두’가 어떻게 존재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노철학자의 혜안으로 깊게 천착한 바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그 작품에서 고흐가 드러낸 예술작품속의 진실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낸 셈이지요.
우리가 두 차례의 작품 분석을 통해 베이컨과 로스코의 삶을 마주하면서 그 작품들에 우리가 공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삶의 진실이 우리에게 매개가 필요 없이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인간이 세계 속에서 살아내고 있는 보편적 삶의 진실을 천착해나가고 구현해나간다는 점에서 예술과 철학은 그 공통 지점을 분명히 공유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 과정은 험난하고 어려운 과정이기에 모든 예술가가 그러할 수 없듯이 모든 철학자가 그런 일을 해내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시간이 흐르면서 인류에게 진실을 남기는 예술가나 철학자들은 결국 그 진실이 담긴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은 이론이나 작품은 잠시 떠돌다가 사라지겠지요.
그렇다면 증상으로 표현되는 작품(정신분석의 입장에서)은 그저 정신적 질병의 결과일까? 또는 치유되지 못한, 그래서 반복되는 무의식적 배설물(?)(흔적들)에 불과한 것일까(?)라는 물음이 떠오르게 되기도 합니다. 정신적 질병체계든 정신분석적 분석의 틀이든, 모두 인간 행위에 대한 일정한 이론적 분석의 틀일 뿐이지 그것에 해당하는 ‘절대적 질병 사실’이 ‘팩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형태로 그러한 인간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것이 이론이 하는 역할이니까요...즉 그러한 필터를 통해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한 것일 뿐, 인간의 ‘순수 경험자체’를 드러내 보일 수는 없기에(일정한 이론적 필터링을 거칠 수밖에 없기에 원천적으로 불가능) 부분적인 설명을 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격자들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인간을 둘러싼 삶의 진실은 저 밑바닥에 침전되어 있을테고 몇 안 되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특별한 인물들에 의해 길어 올려지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인물이 철학자일 가능성보다는 예술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철학자는 언어라는 갇힌 체계 속에서 개념을 통해 사유하지만 예술가는 인간의 원초적 감각인 시각(미술), 청각(음악)등을 통해 세상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무의식적 배설의 찌꺼기가 예술이 될 수 없고, 공허한 궤변으로 철학을 만들어낼 수가 없듯이 그러한 진실에 대한 직면과 표현은 많은 잠재력이 요구되지 않나 생각합니다....이것이 바로 제가 예술가도 철학자도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ㅎㅎ
그래서 어쩌면 예술영역이 반성적 능력이 없어서 반복된다는 표현은 다분히 이성적 사유능력을 우위에 둔, 플라톤 이후의 이성 중심적 시각을 모방하는 일 편향적 판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