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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중심 속 지극한 사유
-고영서 시집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중심
꽃이 피고 지듯 인간의 삶 속에서도 언어라는 형식을 통해 말이 피고 진다. 그 과정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회한 같은 감정을 수반한다. 문학이라는 자장 안에 간직된 삶의 지층들도 사물로 대변되는 자연현상과 다르지 않다. 자연현상 속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사물들은 종종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익숙한 이미지로 전환된다. 특히 감각으로 전이된 사물적 형상을 내면의 시간으로 초대하여 언어적 표면을 구체화하는 것이 시적 발현이다. 언어의 임의성 대신 사실에 근거하여 외연을 확장해가는 고영서 시인의 최근 발간된 세 번째 시집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에서 세월은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 결과를 새로운 형태로 재현해낸다. 어김없이 다가온 일상의 시간은 시인에게 시 쓰기를 강박했을 것이고 현실과 상관없는 일들마저 ‘언어’라는 관심 축을 발아시켜 문장에 대한 전조前兆를 욕망하게 했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들이 헛되지 않은 삶의 일상이었다면 당연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꽃을 보듯 한다면야 백번이고 시를 강요받아도 좋다. 고영서 시인의 시적 토대가 된 삶의 근경은 인간적인 욕망의 절제와 진정眞情한 언어의 의미를 심화하려는 데 있다. 금번 시집은 시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면서 견고해진 화법을 정치성으로 현재화하는 노력을 모색해간다. 그것은 고영서 시인만이 갖는 알레고리이면서 향후에도 그 화법은 개인적인 시력을 고도화시키는데 유효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문장 속에서 허용된 언어적 가치를 다양하게 분화하여 시적 본령인 인간의 삶에 다가 가려한다.
됴화,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물큰한 살냄새를 풍기며 애인이
저만치서 다가오는 것만 같고
염문 같고
뜬구름 같은
해서는 안될 사랑이 있다더냐
-<됴화桃花> 부분
입안 깊숙한 곳에서 발음된 마음을 읽어내려는 ‘됴화’도 그 한 예로 보면 될 것이다. 복숭아 꽃인 도화桃花를 따라 발성하다 보면 듣는 사람도 당연히 기분이 좋아진다. 유사 동음어도 구음口音에서 생성되는 소리 형태이니 자꾸 듣다 보면 의미까지 분별이 될 것이다. ‘도화桃花’를 ‘됴화’라고 한다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몇 번 따라 하면 금방 익숙해지는 말이 된다. 유사 동음어가 갖는 아포리아적 언술은 애매 모호성을 분별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리로 발현된 언어의 경계가 표상하는 세계를 확연하게 변별하려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복숭아꽃을 상상하지만, 잘 익은 복숭아가 갖는 다양한 이미지를 연상하고 있다. 마침 잘 익은 복숭아를 맛있게 먹고 있는 팔순 노파가 있다. 복숭아의 단맛처럼 흘러가버린 ‘노파’의 지난 세월을 상상해본다.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됴화’ 속에서 도화桃花를 건너온 시간이 또 “공무도하公無渡河/ 공경도하公竟渡河// 부르면 또 금방이라도/ 서러워지는 이름”으로 번져간다. 만남으로 시작된 사랑이 더는 진전되지 못한 채 이별을 채비하고 있다. 인간의 삶도 복숭아꽃이 피고 지듯 별반 다를 바 없다. ‘도화’나 ‘됴화’의 절정적 이미지가 ‘도하渡河’에 이르러 안타까운 이별의 심리적 저항선이 된다. 시인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유의미한 언어들이 갖는 한계와 유한성을 시적으로 활용하려 한다.
<목백일홍, 그 꽃잎을>의 첫 연 “얼마를 견뎌야/ 저 타오름의 경지에 닿나”라며 무연한 불특정 타자들에게 묻고 있다. 특히 시의 관심 대상은 다수를 향한 타자이면서 귀를 기울여줄 수 있는 청자까지를 의식한다. 목백일홍의 붉게 피고 지는 형상을 보며 단순히 심미적 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타오름의 경지’는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욕망으로 집착한 아름다운 상상과 이별의 고통이 혼재되어 있다. “아득해라, 한 움큼의 꽃잎을 쓸어/ 가슴에 한 사람을 들여앉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듯이 많은 우여곡절을 시사하고 있다. 마치 한 생애 질곡을 헤아릴 수 없듯 삶의 본질과 자연 속 사물의 변화도 다르지 않다. 고영서 시인의 시적 사유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것의 천착에서 탐색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삶의 진정을 담아 공감할 수 있는 지평을 넓혀가려는 것이다. 일반성을 통해 평범한 담론적 사유를 삶과 밀접한 근원적 사유로 통찰하고자 한다. 그것은 현대시의 근간인 ‘일상’이라는 현실과 실재한 사물을 통해 현대인의 인식 범주를 부단하게 포용하려는 데 있다. 그것은 경험이나 체험 공간의 현실 속에서 획득한 시적 접면을 활용한 고영서 시인만의 변별성을 담보해준다.
<밤꽃>도 그런 부면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다. 차령고개 ‘정안’ 근처를 지나며 “훅 끼쳐 오는 비린내”가 진동한 걸 보면 시기적으로 ‘밤꽃’이 개화한 5월경이었을 것이다. “피우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증명할 수 없는 것들/ 지천인 세상”에서 더 내려간다면 “오뉴월 땡뼡에/ 정사를 치렀는가// 삼천리 방방곡곡/ 번지는 파문”의 풍경까지는 농염하다. ‘밤꽃’은 남성의 ‘팔루스phallus’에 대한 상징성을 암묵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시인은 단순하게 원초적 욕망에 한정하지 않는다. 차령고개를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칠 뻔했다. 다행스럽게 그곳에서 ‘밤꽃’의 만개를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확인하게 된다. 이어 ‘밤꽃’으로 전이된 독특한 방향芳香이 갖는 의미 속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자연현상으로 변화하는 하루 중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무래도 일출과 일몰의 풍경일 것이다. 그 지점의 신비와 오묘함은 생동과 소멸로만 말할 수 없는 깊은 시적 사유를 촉발한다. 시인이 서 있는 곳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의 ‘염산 바다’를 붉게 물들인 일몰 앞이다. ‘일몰’의 숨이 가빠질수록 하루가 더 애절한 <염산 바다, 일몰日沒>은 “조증과 울증 사이/ 물결이 아득히 사라졌다 드는 무렵/ 경운기 한 대가 탈탈거리며 지나간다”는 그 길을 보며 엄정한 생의 순간으로 데자뷔 되었을 것이다. 마침 떠나간 밀물이 되밀려 오며 고달픈 하루를 마감하듯 “가라, 서둘러 오는 것들은/ 서둘러 떠나갔으니”라며 이내 담담해진다. 이어 “이미 드러낸 검은 음부를/ 다 보지 않았느냐”라며 금지선을 넘은 성적 엑스터시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서로에게 입은 치명적 상처만 안고 갈 뿐이라는 삶의 보편적 담론을 주제로 담고 있다. 일몰 이후의 시간은 어둠뿐인 침묵이 전부다. 그렇게 본다면, 자연현상으로 반복되는 죽음으로 상징되는 세계(일몰)는 시의 맥락 속 은유인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하루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존재한 욕망으로 부활하는 것은 자연의 생동적 순리다. ‘일몰’을 통해 재현된 영원성은 “그 끝에 붉은 햇덩이 하나 품고/ 누가, 투신한다”며 생명의 유한성으로 마감하지만, 열정의 잔상은 쉽게 사라질 수 없다. 여기에서 '투신'은 다시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재현되는 에너지로 전환된다. 다시 시작되는 내일은 오늘 사라진 ‘일몰’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일몰은 시인의 끈질긴 시적 욕망처럼 도사린 내면속 기미幾微를 끝없이 충동한다.‘염산 바다, 일몰’의 수런대는 파도소리는 소멸할 수 없는 생명이 잉태하는 시간으로 예비된다. 고영서 시인은 부여된 대상의 진정함을 인간의 욕망으로 치환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긴장은 놓을 수 없다.
큰물이 져서
큰물이 져서
기르던 소만 떠내려간 게 아니다
손때 묻은 세간살이
텃밭 푸성귀
파이고, 찢기고,
무너지고, 등등,
잠긴 집의 온기가 돌아오기까지
-<서시천 코스모스> 부분
이 상황은 2020년 여름 섬진강의 범람으로 발생된 구례 수해 현장에 대한 기록이다. 사실적 묘사를 통한 진실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구례 시가지까지 침수된 수해는 섬진강댐의 일시 방류로 인한 인재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도 딱히 판결이 난 것도 아니다. 정황상 그렇게 추정할 뿐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수해지역민의 고통으로 남아있다. 문제는 수해를 당한 섬진강변의 구례와 남원 해당 지역민들의 열악한 환경에 있다. 아직도 재난 피해 복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전언은 절박한 곡성哭聲이다. 피해 주민들의 불만을 외면하듯 “넋 놓고 하소연하려도/ 마스크부터 씌우고 보는/ 세상 아닌가”라며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할 곳이 없다. 계절의 변화는 엄정하여 범람한 섬진강물이 역류해 휩쓸어버린 ‘서시천’에도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핀 것이다. 서시천 제방길을 걷는 ‘산동아짐’의 “어디서 이런 존 냄새가 난다냐”라며 지르는 환성을 보며 그나마 다행이다. 시인도 서시천을 걸으며 지난 아픈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시인이 보듬어야 할 의식의 저변은 처처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시대의 양심이어야 한다. 과거를 되짚어보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다시 아픈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시간 속 <말러를 듣는 밤>에서 “2017년 12월, 익명의 수집가로부터 제보를 받은 필름이 38년 만에 공개되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만난 한 시민은 16mm 흑백 필름 속에 음성은 안 나오지만 우리한테는 다 들린다고 했다// 침묵의 시간, 어디선가 울려 퍼졌을/ 교향곡 2번”, ‘부활’ 편에서 고스란히 집약된 80년 광주가 집단 무의식을 통해 발현되는 동시성 현상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재생된다. 아직도 80년 광주는 우리가 사는 사회 전반에서 철회할 수 없는 미해결 상태란 것을 각인시키고 있다. 시 이전의 실재했던 당시 상황은 무의식 속에서 끝없이 자아를 의식으로 몰입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실제로 그날의 기록이 광주 지검 공안부 검시 조서로 상세하게 남아있는 <두부처럼 잘리워진 너의 이름은>에서 “어제는 생일/ 오늘은 기일// “왼쪽 가슴에/ 날카로운 것으로 찌른 상처와/ 골반부 및 대퇴부에 여러 발의 총탄이 관통하였다”// 온몸이 짓이겨져/ 산산이 부서진 이름// 손옥례// 1961년 5월 21일 출생/ 1980년 5월 22일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의 모호성이 사실적 서사로 확인되어가는 과정에서 무의식 속에 엄존하고 있는 생생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시인의 시에서 ‘80년 광주’라는 시대 공간은 내면의 깊숙한 층위에 침적된 기억들로 소멸될 수 없는 참혹한 과거로 구축되어 있다. 80년 신군부에 대항한 ‘광주항쟁’이 역사의 진실인 이상 장황한 언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차명숙’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실존한 생존 인물이고, 그 사람은 우리의 이웃과 다르지 않다. <차명숙>에서 ‘차명숙’이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시내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외쳤던 대가로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혹독한 세월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 시간을 감당하면서 위로가 되지 못한 현실의 고뇌도 시인이 마저 실행해야만 한다. 현실 속 ‘광주’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가 아닌 ‘너’이거나 철저히 외면당하는 국외자 같은 ‘타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 안에서 국외자처럼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505보안부대 옛터
성한 유리 하나 없는 창
무너져 내린 지붕
여덟 개의 지하 방을
간신히 빠져나온
건물 밖
경작 금지 경고문에도
자라는 저 연둣빛
상추 마늘 가지 오이
쑥갓 토마토······
비를 맞고 있다
온몸으로 막고 있다
-<불법 체류자들> 전문
‘보안부대’는 과거 한 시절에 위압의 메타포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께름칙한 느낌을 갖고 보는 곳이다. 왠지 그 이름은 친근함보다 기피하거나 회피해야 할 대상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안保安’이란 ‘비밀을 은밀하게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의미처럼 ‘보안 부대’란 곳도 군軍의 특성상 특수한 집단의 필요에 의해 조직된 기관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80년 ‘광주민주화항쟁’이 촉발되던 전후에도 ‘505보안부대’는 광주 지역을 관할하는 조직이었을 것이다. 그 조직이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5·18을 불순한 폭동으로 왜곡 조작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연행하여 구금한 곳으로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이 감행되었다”고 한다. 그 참혹한 장소가 현재는 ‘5·18 사적 26호’로 지적되어 관리되고 있다 하니 격세지감이다. 그 ‘보안 부대’ 안에서 “성한 유리 하나 없는 창/ 무너져 내린 지붕/ 여덟 개의 지하 방을/ 간신히 빠져나온”다는 것은 공포와 감시로 불가능하다. 그곳에서 “경작 금지 경고문에도/ 자라는 저 연둣빛/ 상추 마늘 가지 오이/ 쑥갓 토마토······”가 불안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마치 80년 광주 시민들이 강제된 억압에 저항하듯 ‘연둣빛’ 푸성귀들이 “비를 맞고 있다/ 온몸으로 막고 있다”며 연약한 것들은 언제나 시대의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은 생에 대한 강한 의지에 비해 대우받지 못한 삶의 딱지는 가혹했다.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그들은 ‘불법 체류자’란 낙인이 전부다. 통증은 환부에서 전이되어 마음속 상처가 된다.
<여섯 자 비문>도 사실을 기록한 시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죽음에 이르렀다면 부모에겐 천형이다. 80년 광주의 5월도 여느 곳의 봄날처럼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곱게 물들었을 것이다. 시골 개구쟁이 여럿이 끝말잇기를 하며 신나게 놀던 때에 날아온 “탕! 탕! 탕!”하는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다 부모님이 사 준 검정고무신이 벗겨져버렸다. 그걸 주우러 다시 되돌아가다 총격에 ‘전재수’군이 살해되고 만다. 이후 화병을 앓아 세상을 먼저 떠난 어머니와 망자가 된 아들 봉분 앞에 서 있는 아버지. 1969년 생 효덕초등학교 ‘전재수’군의 “고이 잠들어라”라고 적힌 묘비 앞에서 못다 부른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라며 노래를 불러준다. 동요 속 ‘하모니카’는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반성하게 할 수 있는 오브제일 수 있다.
추억으로만 남은 유품을 통해 80년 광주 5월까지 생존해 있었던 사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하모니카 소리 들리는, 오월이었네>의 “그가 떠난 창가에는/ 손때 묻은 하모니카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묘지번호 2-38 박용준,” , 연락처와 가족도 없어 태어난 곳마저 모른다. 아는 것은 “영신원과 무등육아원에서 자라” 이후 ‘들불야학’에서 사회 운동에 헌신했다는 것이 전부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스물다섯 살 청년을 가슴으로 불러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등산의 겨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첫눈이 내릴 것이다.
<무등서설無等瑞雪>의 ‘무등無等’은 ‘누구에게도 차별하지 않아 똑같다’는 만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겠다는 소망이 깃들어 있다. 그런 사상이 깃들어져 엄마의 품처럼 따스한 무등산無等山이다. 광주 사람들에게는 풍경으로만 파고드는 산이 아니라 깊숙한 세월을 품어 안은 어머니의 산으로 인식한다. 시에서 “너는 첫차로 가고/ 나는 막차로 오는/ 광천동 터미널 대합실 구석구석/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쳤다// 제 그림자를 늘이며/ 조금씩 조금씩/ 내려앉던 산이/ 어느 저녁에는/ 명멸明滅하는 도시를/ 보듬었으리// 억새의 군무도 늦게 단풍도/ 시나브로 사라져/ 연두도 초록도// 이윽해지는 시간// 높아야만 명산이겠나// 입석이, 서석이/ 구름 위에 드시는 듯// 정처도 없는 우리,// 첫눈이 오면/ 첫눈이 오면” 꼭 소망한 것이 있다. 지금껏 이루지 못한 대동세상을 염원하는 이상理想이 광주 사람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 땅(지구)의 사람들에게 절실한 생존의 문제이면서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이기 때문이다. 서정 깊어지는 겨울 초입의 서설은 시적 풍경의 반전처럼 도래할 미래의 시간을 간구하고 있다. 그 풍경은 아름다운 서정을 위한 이미지가 아닌 심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세계의 변화를 갈망한다. 어차피 누군가는 떠나고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는 ‘광주’ 관문인 ‘광천동 터미널’ 대합실의 썰렁함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안아준 무등산無等山이 있어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고영서 시인의 시는 시적 완성을 쫓지 않는다.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세상이 던진 풍경을 깊은 사유로 내면화하고 공감적 표면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평범한 사건들이 생것처럼 포장되지 않은 채 문장이 되어 진실한 시대의 기록물이 된다. <김윤덕 옹>도 ‘사할린’을 여행 중 구술한 내용을 옮겨 적은 시다. 앞서 말한 ‘보안부대’처럼 ‘사할린’도 과거 역사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다. “만나자마자 밥 타령이시다/ 밥 먹고 가라신다”며 한 핏줄이라는 반김이 습관처럼 우리네와 같다. ‘김윤덕 옹’의 사연은 “내가 여기 안 올 긴데 일본 놈들이 마을마다 강제징용을 나왔지 그래 아부이 대신 안 왔능교 1943년 겨울인기라 부산서 출발해 일주일 넘어 도착했는데 날이 밝아 보니 지난 밤의 풍경은 간데없고 설경이 고마 딱 기가 찬 기라”라며 “내 고향은 경북 경산 하양면 남하리”라며 그때 나이가 열여덟 살이라 했다. 가슴 아픈 시대의 참상 앞에 먹먹해지는 시간이다.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은 모든 연어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태평양으로 갔다가 산란을 위해 하천으로 돌아오는/ 연어를 만났다/ 아이누인의 말로 ‘자작나무의 섬’ 사할린,/ 울퉁불퉁한 자작나무 숲길을 한나절 지나서 본/ 해 질 녘의 물비늘들// 비행기로 세 시간이면 닿는 거리가 어떤 이에게는 50년,/ 또 어떤 이에게는 평생 가닿지 못하는 태 자리였다/ 거센 물살을 헤치고 차오르다가 스스로 내동댕이쳐지고/ 바위에 부딪혀 죽고// 돌아가는 곳이 떠나가는 곳/ 창공에서 내려다보면 섬 전체가 한 마리 거대한 물고기,/ 지느러미가 아프도록 물살을 거슬러 가고 있었다”는회귀 본능에 대한 좌절을 말하고 있다. 사할린 땅에 강제 이주된 ‘아이누인’도 우리 사할린 동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모천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연어들처럼 아이누인들은 고향을 마음속으로만 상상해야 한다. ‘사할린’의 동포들도 과거에는 우리 형제와 같은 피붙이였다. ‘사할린’! 그 동토의 땅은 우리의 역사 속 아물 수 없는 통증 도진 환부로 남아있다. 과거라는 시간에 갇힌 사람들은 오고 싶어도 찾아올 수 없고, 찾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고국에서 잊혀져버린 사람들이 그 땅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시인은 기억한다. 고영서 시인은 앞으로도 가슴 아픈 시대의 실상을 꼼꼼하게 기록해갈 것이다. 그 대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도시적 일상에 맞춰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이든 정신적인 노동이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손톱이 꽃잎 모양으로 휜다>는 노동 현장의 고달픔을 토로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언제나 현실은 먹고사는 문제와 부닥친다. 그것을 회피했을 때 감당해야 할 피해가 크기에 쉽게 그렇지도 못한다. “파스를/ 잘게 잘라 손가락에 붙이고/ 업무는 시작된다”는 것을 보면 주로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업무임을 알 수 있다. 반복적인 동작은 피로 가중과 박피로 인해 심하면 “꽃봉오리 같은 하루가/ 손에서 피어”나고 만다. 도시에서 지속 가능한 삶의 조건은 그런 고통을 일상으로 감수해야 한다. 몸의 한계를 회피하지 않듯이 고영서 시인의 시적 서정은 현상(대상)을 우회하지 않고 사실성에 근거한 탐닉과 집요함에 있다.
지금껏 살펴본 고영서 시인의 시가 골몰하는 지점은 사람 즉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시의 표면으로 등장한 다양한 시적 발현들이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는 전제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거를 미래에 도래할 의미까지 예측하면서 감각적인 연대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시가 시다워야 하는 순간을 잊지 않은 고영서 시인이다. 시의 구조는 단단한 삶의 서사성을 현실 인식으로 반성하고 재현을 통한 통찰에 있다. 어차피 발화된 시의 문장들이 지시하고 있는 세계는 현전하는 시 의식으로 변주하는 부단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을 비추는 거울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란 것을 시로써 부단히 말해준다.